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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영화> 파이란

by 똥이아빠 2014.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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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이란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 '러브레터'가 원작이지만, 원작에서 가져 온 주요한 모티브-양아치, 불법체류자 여성, 여성의 죽음-만 같고, 세부적인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른 다른 영화는 <라 스트라다>였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어리석고 멍청한 남성과 헌신적이고 사랑이 가득한 여성이라는 것, 그 여성이 바로 남성을 구원한다는 것, '여성성'이 인간 관계에서 더 뛰어난 형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여주인공 파이란이 강재를 만나지 못한다. 오로지 그녀가 남긴 두 통의 편지만으로 양아치로 살아가던 강재의 삶을 바꾼다. 하지만 <라 스트라다>에서는 살아 있을 때의 젤소미나는 잠파노를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죽은 젤소미나는 잠파노의 영혼을 흔든다. 두 영화 모두, 여주인공이 죽음으로 남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설화 '바리데기'나 '평강공주'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여성(성)이 남성(성)과 남성으로 대표되는 가부장 사회, 국가, 체제를 교화하고, 폭력과 분쟁, 다툼을 잠재우고 평화와 우애, 사랑과 배려를 확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이것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자들이 바로 수구꼴통들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여성의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으로 한 여성의 죽음이 아닌, '모성'의 상실, '고향'의 상실로 상징된다. 강재나 잠파노와 같은 남성들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모성'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한 채 어른으로 성장했고, 또한 일찍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겪은 삶은 피폐하고 살벌하며, 서럽고, 외로운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이런 유형의 남자들은 '모성'을 갈구하지도, 집착하지도 않지만, 정작 '모성'이 가까운 곳에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보인다.(당연히, 그들에게 '모성'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모성'을 인지하고, 자신의 내부에 억눌렸던 '모성에 대한 갈구'의 감정이 폭발하기까지는 특별한 사건이 있어야 했다. 그 사건이 바로 파이란의 편지였고, 젤소미나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삭막하고 암울한 감정으로 인생을 살아왔던 남성들에게, 부드럽고 따뜻하고, 화사한 감정의 흐름은 두려움과 공포였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 자신의 쌓아온 두꺼운 방어막이 한순간에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는 동물처럼 살아왔던 거친 남성을 더 난폭하고 공격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많은 남성들에게 '여성(성)'의 등장과 '여성'과의 만남은 두 가지 딜레마를 던져준다. 마초나 양아치처럼 거친 남자 흉내를 내면서 '여성(성)'을 거부하다 죽을 것인지, 아니면 '여성(성)'을 받아들여 스스로 변화하고, 부드러운 인간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지가 그것이다.
많은 경우, 남성들도 변화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성 스스로 능동적으로 변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은 남성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아마도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선택한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부분의 남자는 강하고, 냉정하고, 직선적인 것을 좋아한다. 반면 여성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면적인 곡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여성은 남성보다 포용력이 크고, 문제의 이면과 본질을 살필 줄 알며, 주변 사람에게 배려하는 마음이 자연스럽다.
두 영화에서도 여주인공들은 모두 헌신적인 모습과 배려를 보여준다. 그들은 남성을 향해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남성을 변화시킨다.
여주인공이 너무 수동적이고 희생적이며 소극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페미니즘'을 들이대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를 여성을 차별하고, 비하하고, 학대하는 영화로 읽을 수도 있겠다. 만일 여주인공의 삶을 남성의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로 읽는다면, 이 영화는 여성의 입장에서 대단히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논리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 영화는 남성(들)에 의해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것은 맞지만, 등장하는 남성들 역시, 그들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사회적 약자로, 억압과 착취의 대상으로 살고 있음을 상기할 때,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적 모순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모성'과 '여성(성)'이 '남성(성)'은 물론 남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모순을 구원할 수 있는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피해자인 여성의 모습을 보면서-여주인공의 죽음-남성은 깨닫고 변화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그런 변화를 통해 남자 주인공 고로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이 영화에서는 끝내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주인공 강재는 살해당한다. 
이때, 강재의 (살해당하는) 죽음은 '여성(성)'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려는 '남성(성)'에 대한 테러임을 알 수 있다. 즉, 집단으로서의 '남성(성)'은 변화를 시도하는 개체의 '남성(성)'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런 작은 변화가 결국 '남성(성)'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회에서, 가부장 사회와 마초적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논리이기도 하다. 무한 경쟁, 착취에 기반한 구조, 생존경쟁, 이기주의 등 특히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논리는 '남성(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흔들린다는 것은 곧 지배계급의 몰락을 뜻한다.
결국, 지배계급을 몰락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폭력보다는 '여성(성)'에 기반한 부드러움, 유연함, 사랑, 배려, 공동의 화합, 따뜻함과 같은 상생의 논리라는 것이 증명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도 하나의 수단이 되겠지만, 그보다 더 일상적으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것은 부드러움과 따뜻함, 배려, 사랑, 화합이다. 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지금 벌어지는 모든 불평등과 갑질에 대한 대답도 그러하지 않은가. 별 세 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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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감하자마자 건달 생활로 돌아가는 못 말리는 양아치, 강재(최민식)는 한심하게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친구 용식(손병호)은 조직의 보스가 돼 있지만 강재는 나이트 클럽 삐끼 신세를 면치 못한다. 희망이라곤 없는 팍팍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강재는 용식과 우연한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살인을 저지른 것은 용식이지만 강재는 '배 한 척 앞세우고 고향 땅을 밟겠다'는 오래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용식의 죄를 뒤집어쓰기로 한다. 비장한 결심을 한 강재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한다. 오래 전 위장결혼한 여인 파이란(장백지)의 부음이 전해진 것. 파이란과의 관계를 이어 준 고향 후배 경수(공형진)와 함께 그녀의 주검을 찾아가던 강재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남자'라고 믿어 준 파이란의 편지와 사진을 보고 흔들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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