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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영화> 설국열차

by 똥이아빠 2015.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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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

* 중간부터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영화를 안 본 분들은 주의하시길.
왕십리CGV의 IMAX 화면은 일반 영화관 스크린보다 두 세 배 이상 큰 듯 하다. 거대한 화면 속으로 들어간 듯,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
무려 400억 원이나 투입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Snowpiercer는 기대되는 영화였다. 여기에 대자본의 광고와 홍보가 융단폭격으로 깔려서인지, 다른 어떤 영화보다 많은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영화 개봉 이틀만에 60만 명이 넘었다고 하더니 사흘째 160만 명이 봤다는 통계가 나왔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 영화를 두고 호불호가 갈리느니, 뛰어난 작품이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로였다는 관객의 평가가 끊이지 않고 올라왔다. 결국 우리 가족도 개봉 이틀 째 되는 날 이 영화를 봤다. 그리고, 역시 봉준호 감독이라는 평가를 했다.
모든 창작물은 그것을 보고, 듣고, 읽고 느끼는 사람(관객, 독자)의 주관적 평가에 따라 다양한 면을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수준의 평가가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적 합의'라고 말한다.
즉, 영화 '대부'를 본 사람들은 그 영화가 영화사에 남을 걸작임에 동의한다.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 '대부'가 뛰어난 작품과 연출, 배우들의 연기로 훌륭한 영화임을 인정하고, 여러 번 봐도 재미있는 영화로 생각한다. 미국의 영화 데이터베이스인 IMDB에서도 '대부'는 별 9개 이상을 받아 걸작의 반열에 들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설국열차' 역시 사람들의 판단 기준이 너무 주관적이라서 어느 정도의 선을 제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영화평론가들의 시건방지고 잘난 척하는 태도도 매우 싫어하지만, 영화에 대해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무조건 영화를 '까고 보는' 관객 역시 싫어한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 호불호는 있겠지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싫어하는데, 오로지 영화를 '까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의 삶도 불행할 것이다.
예전에 나온 '지구를 지켜라'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를 만든 장준환 감독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데, 이 영화도 흥행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졸작일까? 나는 한국영화사에서 '지구를 지켜라'가 상위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걸작이라는 뜻이다. 영화는 여러 요인에 의해 실패와 성공의 갈림길에 선다. 누구도 그 법칙을 알아낸 사람은 없고, 앞으로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는 작품성, 감독, 배우 등 일차적인 요인이 완성되어야 하고, 마케팅과 시기에 따라 흥행이 결정되는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 작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고, 작품이 조금 떨어져도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설국열차'는 한국의 스타감독인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고, 여기에 대자본이 제작비를 댔으며, 제작 단계부터 마케팅과 홍보가 시작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영화는 달리는 기차라는 폐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삶에 대한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빙하기가 시작되고, 생물들이 멸종하는 가운데, 인간만이 달리는 기차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발상은, 당연히 매우 이기적인 인간 위주의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인간의 행동'을 위한 알레고리인 만큼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열차를 만든 윌리엄 길포드가 있는 가장 앞쪽, 엔진이 있는 곳부터, '쓰레기'로 불리며 생존하고 있는 '꼬리칸'의 사람들까지, 이들은 철저하게 서열화되어 있다.
인간의 서열화는 곧 '계급'을 뜻한다. '계급'은 마르크스가 과학적으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발생한 진화의 산물이다. 즉,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부터 '계급'도 탄생하고, 노예, 농노를 거쳐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까지 발전한 것이다.
영화에서 '꼬리칸'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생존하고 있다. 그들은 빈민굴같은 열차칸에서 악취와 더러운 환경에 갇혀 짐승처럼 생존하는데, 이들과 앞칸의 상류층 생활과 비교하면 그 충격은 더욱 크다.
오늘날 어느 나라든, 도시의 빈민들의 삶과 상류층의 삶을 보면, 이 영화의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꼬리칸'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엔진을 차지하기 위해 전진한다. 그들은 감옥칸에 갇힌 차량설계자 '남궁민수'를 찾아내 앞칸으로 전진하는 문을 열게 한다. 
'꼬리칸' 사람들이 무수한 피를 흘리며 앞칸으로 전진하면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같이 놀라운 광경들이다. 그들이 매일 먹는 '단백질 블럭'은 양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퀴벌레를 재료로 만든 것이고-바퀴벌레는 양식을 하는 듯 하다-물탱크가 있는 칸을 지나가면서 신선한 과일이 나는 온실과 바다생물이 사는 수족관과 학교, 온천, 사우나 등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앞칸으로 전진할수록 술집, 클럽 등 쾌락을 위한 공간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의식주가 해결된 인간이 추구하는 감정을 단계별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꼬리칸' 인간들이 전진하면서 맞닥뜨린 폭력은 당연히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의 폭력이고, 계급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많은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매우 복잡해지는데, '꼬리칸'의 지도자인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엔진칸에 도달하고, 여기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갈라진다. 커티스는 엔진을 점령해야 하는 이유를 담담하지만 끔찍한 과거를 들어 이야기하고, 남궁민수는 기차의 문을 폭파해 기차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리지만, 두 사람 모두 합리적이고 합당한 주장을 하기 때문에 관객은 누구의 판단이 옳은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지도자 커티스는 '달리는 열차'를 인정하고, 그 내부 시스템을 뒤집어 엎자는 말이다. 그동안 당해왔던 '꼬리칸' 사람들의 설움을 복수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궁민수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려, 열차 자체를 폐기하자는 주장이다. '달리는 열차' 외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 같으면 누구의 말을 따를 것인가?
결국 엔진칸의 문은 열리고, 커티스는 '설국열차'를 만든 윌리엄 길포드는 만난다. 그리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윌리엄 길포드의 말은 매우 그럴 듯 하다. 폐쇄된 열차가 안정되게 달리려면 적정한 인구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기적인 정리가 필요하고, 대규모의 반란은 '민중의 뜻'이 아닌, 지배계급의 요구에 의해 일어나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반란'을 계기로 사람들의 숫자를 줄여나가도록 앞칸과 뒷칸(꼬리칸)은 연결되어 있고, 커티스가 엔진을 맡아도 그 계획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커티스로서는 매우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논리정연한 윌리엄 길포드의 주장을 들으며 거의 동의할 뻔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장면으로 인해 상황은 바뀌고, 결국 남궁민수의 주장대로 잘못된 것은 그 자체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하면서 산다. 이 체제와 제도가 매우 모순되고 억압의 사회임을 알면서도 마땅히 대안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잘못된 것은 그 자체로 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인간이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그저 굴종과 노예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별 네 개. 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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