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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영화] 문라이트

by 똥이아빠 2017.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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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라이트

이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다고,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본 많은 관객 가운데는 기대보다 실망한 사람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리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잘 만든 것과, 영화로서의 재미가 있는 것은 조금 다르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나의 경우) 매우 재미있고, 몇 번씩이나 보게 되는 최고의 영화로 꼽지만,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없다. 코엔 형제의 작품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은 있지만, 대중성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하나의 작품을 두고, 평론가들이나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는 결과들이 대중의 기호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대중적 인기와는 관계 없이 잘 만든 영화는 분명 있고, 이 영화 역시 잘 만든 영화임에 틀림없다. '나는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은 개인의 주관이지만 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평론가와 영화잡지, 영화상을 주는 관계자들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흑인 소년 샤이론의 성장 영화다.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보여주는데, 각각의 부분에서 시간은 훌쩍 건너 뛴다. '리틀', '샤이론', '블랙'의 소제목으로 드러나는 소년 샤이론의 정체성은 성장하는 시기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으로 관객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시간을 관통하는 샤이론의 정체성을 통해, 우리는 한 소년의 20여년의 삶을 이해하고, 그의 슬픔과 깊은 절망을 객관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이 영화는 영화 속 주인공과 관객 사이에 공통의 공감대가 얼마나 형성되는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고 본다. 주인공 샤이론은 불우한 소년이다.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엄마와 둘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데, 성격도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데다 체력도 약해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다.
이때 만난 사람이 후안. 후안은 쿠바 사람으로, 동네에서 마약을 파는 중간 판매상인데, 범죄자임에도 상당히 인간적인 면을 보여준다. 후안은 힘 없고 외로운 샤이론을 위해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고, 자신의 애인인 테레사와 함께 유사가족을 이룬다. 샤이론은 친엄마보다 후안과 테레사에게 더 따뜻한 애정을 느낀다.

몇 년이 지나 샤이론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고, 그는 여전히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그 사이 엄마는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샤이론의 삶은 더 나빠지고 있다. 그를 돌봐주던 후안은 어떤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테레사는 여전히, 유일하게 샤이론의 친구가 되어 준다.
어릴 때 친구였던 케빈을 다시 만난 샤이론은 바닷가 모래해변에서 그의 생애 최초로 육체적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오랜 친구였던 케빈이라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 운명적이다. 이 경험이 결국 샤이론의 삶에서 변곡점이 되고, 이후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케빈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을 괴롭히는 양아치 터렐을 때려눕힌 샤이론은 결국 전과자가 된다.

동네 마약상이 된 샤이론의 모습은 예전에 자신을 돌봐주었던 후안과 매우 비슷하다. 강인한 체력, 번쩍이는 금이빨과 체인형 금목거리 등 전형적인 거리의 건달이 된 샤이론은 예전의 비쩍 마르고 수줍음 많았던 소년이 아니다.
마약중독자들이 생활하는 재활원에서 엄마에게 전화가 오고, 뒤이어 10여년 동안 연락이 없던 케빈에게서도 전화가 온다. 엄마는 샤이론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그런다고 과거가 변하지는 않지만, 샤이론은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지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케빈의 전화로 샤이론은 그를 찾아간다. 샤이론은 케빈에게 고백한다. 그때 이후로 누구도 나를 만진 적이 없었다고.

이 영화를 동성애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샤이론이 동성애자가 되느냐는 질문도 적당하지 않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샤이론이 30여년의 세월을 통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스스로 질문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영화는 샤이론의 삶을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려고 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한편으로 단점이기도 하다. 샤이론의 성장은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떼놓을 수 없이 직접적임에도, 그가 놓여 있는 환경의 구조적 문제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그것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접근하는 것은 짧은 영화 시간의 한계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할 것이다. 
샤이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관객은 그의 소년, 청소년, 청년의 시기를 건너 뛰어가며 보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공백을 상상으로 메운다. 그 상상의 빈 시간 속에서도 샤이론은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다.

반면, 이 영화와는 조금 다르지만 '나, 다니엘 브레이크'의 경우를 보자. 다니엘은 평범한 영국인이자 서민이고, 40년 넘게 목수로 일한 노동자다. 그는 몸이 아파서 요양신청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영국의 어리석은 행정제도 때문에 몹시 괴로움을 당한다.
다니엘은 끝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죽음은 분명하게 영국 사회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관료적이며, 반서민적인지를 고발하고 있다. 성실하고 실력 있는 목수였던 다니엘이 무능한 인간으로 죽어가야 하는 사회라면, 그의 정체성과는 관계 없이 개인의 삶을 재단하고, 구조적인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샤이론의 삶이 빈민가의 소년이 자라서 너무도 당연하게(?) 거리의 마약상이 되는 사회라면,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원천에서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사회에서 소수자이고, 차별과 억압을 당하는 흑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이란 그리 다양하지 않은데, 여기에 탈출구조차 막힌 빈민가의 소년이라면 어떻겠는가.
샤이론의 삶은 애당초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동물처럼, 그 한계가 너무도 뚜렷해서 마치 후안의 복제품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샤이론의 삶을 강제한 것은 영화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는데,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영화를 샤이론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긴 고통의 시간이 안타깝고 애처롭게 보인다. 하지만 샤이론의 이야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 현실이다. 수 많은 샤이론이 미국 사회의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그것을 단지 '개인적인 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는 무지이거나 의도적 왜곡이다. 영화에서 이런 점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역시 초점이 다르기 때문이 가장 큰 원인이고,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를 읽을 때는 샤이론이 놓인 사회적 위치와 존재 방식을 사회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샤이론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빈민 소년에서 마약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자신의 능동적 행동의 결과라기 보다는, 사회의 억압에 의해 타율적으로 선택한 삶이기 때문이다.

샤이론의 어둡고 깊은 눈길은, 그가 갈망하는 삶이 외롭고 고통스러울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알면서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깊은 절망을 느끼는 소년의 아픔을 우리는 푸른 빛을 통해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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