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와 미시
오래 전, 중학과정의 미술시간에 무뚝뚝하고 날카로웠던 미술선생이 '미시미'와 '거시미'에 관해 설명한 내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쉬운 개념이지만, 열 네살의 어린 나이에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신기하고 놀라웠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최근 어떤 페미니스트의 글을 읽으면서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극좌' 편향을 가진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여주는 비판의 일반화 오류를 발견하고, 그것을 나에게 적용해 보았다. 내가 전투적 페미니즘에서 불편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내가 남성이고, '원죄적 기득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홍준표가 자서전에서 밝힌 것처럼, 여성 모르게 돼지흥분제를 술에 타 먹여 성추행, 성폭행을 하려는 시도를 두고,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남성들이 그러한 본성, 본능을 내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남성'은 잠재 성범죄자이며, 여성의 적이라는 주장을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에 대한 적대적 분노를 이해하고 공감한다. 물론 내가 아무리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해도 그 수준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고, 여성의 입장에서는 '조족지혈'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해도, 남성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원죄적 기득권'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 말고, 적극적으로 여성을 억압, 수탈, 학대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상황을 조금 바꿔서 생각해 보자. 노예제 사회에서 흑인 노예들은 백인에 종속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백인노예주들은 흑인노예를 착취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호의호식하며 대를 이어 떵떵거리고 산다. 하지만 백인들 가운데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돈 많은 농장주도 있지만, 흑인노예들과 크게 처지가 다르지 않은 가난한 백인 농민, 노동자도 있다.
즉, 남성 중심의 사회, 남성가부장제 사회에서 많은 남성들은 노동자, 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어항 속에 들어 있는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젠더적 불평등과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예제 사회에서 가난한 백인이라도 흑인노예가 당하는 처절한 억압과 착취의 고통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여성의 존재는 가부장제사회, 노예제사회에서는 백인농장주>백인여성>흑인남성>흑인여성의 순서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존재인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본가>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남성>여성의 순서로 착취와 억압의 밀도는 높아지게 된다.
이런 논리로 볼 때, 인류의 초기, 모계사회를 제외하면 여성은 약자 가운데서도 가장 약자의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던 만큼, 지금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이는 극단적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 현상을 들여다 볼 때,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관점을 혼동하거나, 무시하게 되는 순간, 합리적이고 정당한 논리는 사라지고 극단적인 주장만이 난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극우집단에서 가장 많이 주장하는 단어가 '종북좌파'다. 이는 '종북'과 '좌파'가 분명 다름에도 무지한 대중을 선동하는데 유용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사용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남성 모두가 여성을 혐오하고, 학대하고, 성적 대상으로 삼고, 성추행과 성폭행을 공모하는 것이 아님은 전투적 페미니스트는 물론이고 평범한 여성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극소수의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은 세상의 모든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젠더적 공격을 가한다. 그렇게 하면 선명성은 확실하게 살아나지만 실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레닌은 '좌익소아병'을 경계하면서, 극단으로 치우칠수록 자기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의 사회적 입지, 인식의 개선, 동등한 인권의 확보, 젠더로서 받는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적'인 남성들 가운데도 여성의 동지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다. 반대로 같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의 '적'인 동성들도 많다.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운동도 아니거니와 어리석거나 무지한 소수의 고립된 행동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치루면서, 다섯 개의 정당은 자신들의 후보를 돋보이기 위해 상대방 후보와 정당을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도 거시적 태도와 미시적 태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전략적, 전술적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 것을 봤다.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는 적대적 후보는 홍준표가 유일하다. 하지만 홍준표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도 문재인 후보를 공격했다. 그것도 선거공약이나 비전과 같은 구체적이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 아니라, 인신공격이 대부분이었으니, 홍준표 후보처럼 앙시앵 레짐 체제의 청산대상이라면 인신공격을 비롯해 어떠한 마타도어도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보수'나 '진보'로 표방하는 후보들이 홍준표 후보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태도였다.
문재인 정권에서 어떤 사안을 두고 거시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사회의 기조와 흐름이 지난 10년의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다는 흐름이 읽힐 때, 정권이 표방하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하지만 아주 작은 사안까지 꼬투리를 잡아 정권을 흔드는 것은 과연 누구에게 이로운 행위일까. 나는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노무현 정권은 역대 가장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 정권이었음에도 수구집단은 물론 진보진영에서도 조금의 정치적 배려나 인간적 온기 없이 오로지 가차없이 날카로운 비판과 비난의 화살을 날렸고, 그 결과 노무현 정권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수구집단의 승리로 끝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타의적 자살을 하고 말았다.
우리가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나누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권력을 향해 돌팔매를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만든 정권을 우리가 끌어내리고, 상처를 입히고, 수구집단에 제물로 바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성운동에서도 동지적 관계를 지향하는 남성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운동을 도구로 삼아 여남평등의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뿐, 남성들과의 연대나 사회의 본질적 변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지적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비판해야 할 것과, 미시적 관점에서 비판해야 할 사안을 구분하며, 적(수구반동집단)에 대항해서는 연합, 연대를 강화하고, 내부적으로는 건전한 비판과 우호적 연대를 키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여성운동이든, 정치권이든, 국제사회의 외교든 한결 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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