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
이준익 감독 작품. 재미있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직전의 영화 '동주'는 그다지 재미있다는 말을 못했는데, 이 영화는 재미있다. 이 영화를 볼 때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조금의 이해가 있다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겠고, 역사를 몰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1920년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 가운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로 단순 번역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인 박열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그의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짧은 시기를 그린 영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왕세자를 암살하려는 주범으로 몰려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데, 이 영화는 그 과정을 담았다.
이준익 감독 특유의 유머가 섞인 연출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의 억압과 간토대지진으로 조선인들이 수 만명씩 학살당하던 시기 속에서 웃음과 감동을 함께 버무려 내는 특기를 보여주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런 연출이 시기의 엄혹함에 어울리지 않는 가볍고 희화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1920년대의 몇 년만을 그리고 있지만,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긴 세계의 1920년대 전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다. 1917년 10월에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이 발생했다. 일본은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새로운 이념이 급격하게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외국과의 교류가 잦았던 일본이었기에 외국의 사상 또한 빠르게 흡수되었다. 외래 사상 가운데 공산주의와 아나키즘도 일본에 퍼져나갔고, 20년대부터는 사회주의가 특히 지식인 청년(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많은 조직이 생겼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도 독립운동과 연계해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을 받아들인 청년들이 많았고, 박열은 아나키즘 계열의 운동을 하는 청년이었다. 조선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20년대부터 본격 시작되었으며, 독립운동과 연계하면서 사회주의는 조선에서 주류의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일제는 사회주의자들과 독립운동을 떼어놓기 위해 강력한 탄압을 했지만, 조선에서 사회주의는 독립운동과 계급투쟁을 동시에 진행하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 시기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와 단체들은 중국으로 자리를 옮겨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민족주의 계열의 상해임시정부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는 개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바꾸닌과 끌로포드낀으로 이어지는 아나키즘 역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적대적 관계가 된다. 레닌은 아나키스트들이 러시아혁명을 방해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을 방해하는 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혁명 이론이 과학적으로 토대를 갖추고 있다고 믿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노동자와 인민이 역사의 발전단계에 맞게 혁명을 일으키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한다고 말하는데, 아나키즘은 그런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론이 빈약했고, 실천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노동조합을 기초로 조직적 결집과 행동을 바탕으로 혁명을 준비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황제나 대신들을 개별적으로 테러해서 암살하는 방식으로 사회변혁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박열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무엇보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었고, 조선의 독립과 애국운동의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했거나 안 했던 것은 그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가 놓여 있는 환경이 '공산주의자'보다는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 영화는 훌륭하게 잘 만들었지만, 영화 속 박열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박열은 오래 살았고, 그는 아나키스트에서 우익 계열의 민단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즉, 감옥에서 나오기 전까지의 박열과 감옥에서 나온 이후의 박열은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한 사람을 평가하기에는 이 영화가 단편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영화는 잘 만들었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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