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커, 데일 대 이블 그리고 핸섬가이즈
코믹 호러, 코믹 슬래셔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혼란하게 만든다. 정통 장르 영화 - 호러, 슬래셔, 공포, 잔혹 영화는 그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상황이 실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관객은 공포와 끔찍한 감정으로 흔들린다. 사람의 감정은 자신이 직접 느끼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간접 체험만으로도 실제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도록 진화했는데, 이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에서 극단의 참혹한 장면을 보일 때, 관객은 그 장면을 견디지 못하고 극장을 뛰쳐나가거나,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는 행동을 통해 자신을 보호한다. 특정한 장면을 통해 사람마다 극단의 참혹한 장면을 견디는 수위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링', '주온' 같은 사람 귀신이 나오는 영화를 못 보는 관객이 있고, 사람을 살해하고 육체를 학대하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차가운 열대어' 같은 영화에 거부감을 갖는 관객도 있다. 어지간한 잔혹 영화는 끄떡 없이 보는 관객이라도 '세르비안 필름' 같은 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보기는 힘들다.
이런 영화들은 분명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연출된' 장면들이지만 관객은 자연스럽게 영화 속 세계에 몰입한다. 그건 인간의 공감 능력이 발동하는 것이고, 우리의 감각 - 뇌 감각 -은 현실과 가상을 따로 구분하지 않(못)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감정의 일관성으로 볼 때, 공포, 호러, 잔혹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한다. 즉, 관객이 영화 속 주인공 가운데, 가해자나 피해자에 몰입하면서 공감한다. 대부분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공포에 감응하겠지만, 드물게 가해자의 폭력에 감응하는 관객도 있다. 현실이 아니니 어느 쪽이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게 영화와 같은 창작, 예술 작품이 갖는 장점이다.
'터커, 데일 대 이블' 그리고 '핸섬가이즈' 같은 잔혹 코믹 영화는 정통 잔혹 영화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의 혼란을 느낀다. 관객은 그런 자신의 감정 변화를 스스로 어처구니 없어 하지만, 이런 장르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그런 관객의 혼란스러움을 의도한 것이다.
관객은 어처구니 없이 죽어가는 등장인물을 보면서 끔찍하면서 한편 그 어처구니 없는 행동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난다. 즉, 잔혹한 장면을 보면서 웃는 기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공포면 공포의 감정, 웃기면 웃는 감정을 각각 드러낸다. 이 둘이 혼재하는 방식의 상황을 맞닥뜨릴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복합적 감정을 느끼는 상황을 만들고, 관객은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을 영화를 보며 느낀다. 잔혹한 장면을 보며 끔찍함과 웃기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건 우리(개인)가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에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복합적 감정을 분출하는 건, 영화 뿐 아니라 예술 작품을 마주하며 느끼는 공통의 감정이다. 영화는 다른 분야의 예술과 달리 감정을 보다 직접 분출한다는 점에서 반응도 그만큼 즉물적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장점, 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터커와 데일'은 깡촌에 사는 평범한 청년들이다. '재필과 상구' 역시 시골에 사는 평범한 청년들이다. 주인공들을 시골 깡촌에 사는 촌놈 남성으로 설정한 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도 못해서 늘 열등감과 주눅든 인생을 살아가는 이 청년들은 또래의 청년들이지만 도시에서 온 대학생들을 보면서 부러움과 질투, 열등감 같은 복합적 감정을 갖는다.
도시에서 온 여자 대학생은 너무 예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마치 다른 차원에 사는 존재처럼 보인다. 남자 대학생은 똑똑하지만 거만하다. 세련된 비싼 옷을 입고, 멋진 향수 냄새가 나는 이들은 꾀죄죄한 시골 무지렁이 촌놈들이 감히 마주할 상대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도시 청년 대 시골 청년의 대립이 성립한다.
도시에서 온 대학생들은 여러 이유로 자신감, 자만심을 갖고 시골 청년들을 상대하지만, 그들이 있는 공간은 산골이고, 산골에서 오래 살아 온 시골 청년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침입한 도시 청년들에 대해 이질감을 느낀다. 이런 공간적, 심리적 대립이 두 집단 사이에서 오해를 일으킨다.
사건의 발단은 오해에서 비롯하고, 오해는 다시 더 큰 오해와 잘못된 판단을 만든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게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우리가 귀신이나 외계의 존재에 대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으로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물, 대상과 영역에서 인간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지만, 모호하거나 감각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한 무언가를 보거나 느낄 때 가장 먼저 공포를 느낀다.
사람은 공포를 느끼는 순간 공격성을 갖춘다. 생존 본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공포 반응은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매우 종요한 반응이었으며, 매우 유효한 반응이므로, 공포를 느끼는 순간 주변에 있는 대상은 '나'에게 적대적 존재가 된다.
도시의 대학생들이 시골 청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면서 발생하는 불안한 감정이 공포로 치환되면서, 시골 청년들을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공격하던 학생들이 죽어나간다. 이때 나무파쇄기로 돌진해 몸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은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에서도 나오는 바로 그 장면과 같다. '파고'에서도 이 장면은 엄청 잔혹하지만 관객은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난다. 마찬가지로 잔혹 코믹 영화에서 이런 잔혹한 장면은 실수를 통해 발생하기에 끔찍함과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동시에 표출된다.
죽은 나무를 전기톱으로 자르던 터커와 재필이 나무 속에 집을 짓고 살던 말벌에게 공격당하자 전기톱을 든 채 미친듯 뛰어 도망하는 장면에서, 시골 청년들의 집 근처에 있던 도시 대학생들은 전기톱을 든 양아치가 자기들을 공격하는 걸로 오해하고 도망한다. 그 과정에서 삐져나온 나무가 배를 꿰뚫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건 영화 '텍사스 전기톱 학살'의 명백한 오마주다. '텍사스 전기톱 학살'의 주인공 레더페이스가 전기톱을 들고 외지에서 온 대학생들을 잔혹하게 썰어대는 장면을 '터커와 데일', '핸섬가이즈'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설정이어서, 전기톱 장면은 고어 영화의 클래식으로 인정한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도시의 대학생은 이들 시골 촌놈 청년들과 우연히 가까이 지내게 된 여자 대학생인데, 이들은 오히려 시골 청년과 함께 지내면서 서로 오해가 풀리고,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갖는다. 이건 낯선 존재라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 되고, 서로의 감정, 생각을 교류하면 적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낯선 존재에 경계할 수는 있으나 소통하려는 의지 없이 적대적으로 마주하면 결국 상황은 더 나빠지고,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된다는 이야기를 호러와 코믹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핸섬가이즈'는 원작 '터커와 대일 대 이블'을 리메이크 했는데, 둘 다 보니 원작이 조금 더 나아보였다.
반응형
'영화를 보다 > 한국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 란 (2) | 2024.10.11 |
---|---|
베테랑2 (2) | 2024.09.14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1) | 2024.08.25 |
범죄도시 4 (1) | 2024.04.27 |
파묘 - 역사와 정치의 알레고리 (0) | 2024.03.15 |
조용한 가족 (1) | 2024.01.30 |
선산 (1) | 2024.01.30 |
노량 - 죽음의 바다 (2) | 2023.12.21 |
잠 - 일상이 공포가 될 때 (1) | 2023.12.17 |
서울의 봄 (1) | 2023.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