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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09] 한민족의 경제사상 - 배성룡

by 똥이아빠 2011.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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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경제사상

-동양식 정체성과 빈락경제관


이 글을 쓴 배성룡은 경제학자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배성룡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裵成龍

1896 경북 성주~1964.

사회주의 운동가, 경제평론가.

8·15해방 후에는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다.

본관은 성산(星山). 필명은 수성(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생(星山生)·성산인(星山人)·별뫼. 아버지는 운홍(運鴻)이며, 어머니는 유윤이(柳允伊)이다. 1917년 결혼을 전후해 일본의 니혼대학에 유학해 1923년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사하고 1924년 11월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했다. 가입 후 사회주의 운동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저를 발표해 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1925년 8월 이후 〈동아일보〉를 주무대로 활발한 평론활동을 했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28년 2월 1년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만기 출옥했다. 1929년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11월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사에 경제부장으로 입사하여, 1932년 봄 정치부장, 10월에는 논설반 주필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3월 〈중앙일보〉가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자 편집차장·정치부장을 역임하다가 10월 신문이 정간되자, 절필하고 은둔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글들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 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로 파악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

1945년 9월 이극로가 주도하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에 가입해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권오익(權五翼) 등과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를 조직해 좌우익 정당통합에 주력했다. 1946년 1월 이극로·권오익 등과 함께 통일정권촉성회를 결성해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7월 도진호(都鎭浩)와 함께 좌우합작촉진회를 결성했다. 1947년 2월 〈세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이극로·조봉암·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민족주의독립전선을 결성하고 상임위원 및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0월에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5인 정강·정책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 문화인 108인 성명'에 서명하고, 권태석과 함께 김규식의 제2차 특사로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7월 김규식과 김구가 연합한 통일독립촉진회에 참여했다. 1950년 이후 〈동아일보〉와 〈사상계〉 등에 경제평론을 발표하여, 대외의존체제의 극복과 내포적(內包的) 공업화를 통한 경제자립을 주장했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동양경제를 강의하기도 했다. 저서로 〈조선경제론〉(1926)·〈조선경제의 현재와 장래〉(1933)·〈조선농촌연구의 준비지식〉(1933)·〈이 혼돈을 어떻게 수습할까〉(1945)·〈자주조선의 지향〉(1949) 등이 있다.



裵成龍

1912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기사;

1919 日大 사회과;

1923 조선일보 입사;

1926 조선공산당 가입;

1931 조선일보 경제부장;

1932 중앙일보 정치부장;

1947 민족자주연맹 활동, 세계일보 편집국장;

1950 이후 대학강사, 한국일보 논설위원, 경제평론가;

1964.12 사망


위키백과에 등재된 배성룡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라.

http://ko.wikipedia.org/wiki/%EB%B0%B0%EC%84%B1%EB%A3%A1



이 글은 짧은 논문이다. 먼저 소제목부터 보자.

1. 경제사상의 구성

2. 중국문화영향을 받은 생활양식

3. 동양식 낙천농경

4. 오직 일관한 토지경제관

5. 유교 이전의 한국 고대경제관

6. 유교의 경제관과 폐단

7. 경제학파와 경제사상

8. 경제사상은 경제생활에서


이렇게 소제목을 붙였지만 각 내용은 짧아서, 간단하게 읽을 수 있다.

흥미를 끄는 3. 동양식 낙천농경 부분을 읽어보자.


동양문화권에 속하는 제민족의 일반적 경향에 의하여 한민족사회의 조기적 농경 제발달은 이 또한 현연사실인 듯하다. 원시적 민족사회에서는 한 세대가 많은 가족을 포함하여 계급과 빈부의 차가 없으면서도 토지를 유일한 생산수단으로 하였다. 자급자작의 농경생활양식은 필연적으로 인구의 지방적 정착성이 강조되고 농경과 기후와의 긴밀한 관계성에 의하여 자연숭배열이 높아졌으며 유무를 상자하는, 물물교환하는 공동생활사회의 기능은 저 목축농의 **한 다른 원시사회에 비하여 비교적 미약하였고, 토지를 유일한 생산수단 삼으니만치 농경용수의 공급을 위한 관개사업은 남달리 중요시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농경의 전업성이 강대하고 또 교환을 등한시하여 자급자작의 생활양식이 발달되며 모든 자연적 생활조건이 다분히 안전성을 잘 유지되면서부터 낙천적 농경생활은 개시된 것이다. 안식적인 경제생활로서 모든 식물 획득 채취를 위한 투쟁수단은 필요치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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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 목축을 위주로 하는 생활보다는 농경 생활이 정착하고 안정하며, 따라서 낙천적인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사회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받아들일 내용은, '자급자작'과 '공동체 생활'이다. 자본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오늘날,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더 많아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규모 단위로 공동체가 생기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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