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만화를 읽다
동경일일 - 마츠모토 타이요
똥이아빠
2025. 2. 23. 15:49
동경일일 - 마츠모토 타이요
근대(近代)의 향수와 추억을 담아내려는 편집자 시오자와의 노력과 고집. 한편으로는 자신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악착 같은 오기의 양면성을 내재하고 있다. 만화출판사에서 무려 30년을 일한 시오자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자유로운 몸이 된다.
사표를 내게 된 결정적 이유는 자신이 추진했던 만화잡지가 실패해서 회사에 재정적 손해를 끼친 것이지만, 한편으로 자기가 선택한 작가들이 이제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 '상품'으로 가치가 떨어져 소비되지 못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오자와가 시도한 작업은 과거 그와 함께 작업했거나 적어도 안면이 있는 작가들 가운데 훌륭한 작가들을 찾아가 단편 작품을 하나씩 받는 거였다. 시오자와가 만나는 작가들은 한때 최고 작가였거나, 재능은 뛰어난데 편집자가 올바르게 '디렉팅'을 하지 못해 아직 빛을 내지 못하는 작가들이다.
시오자와가 추진하는 기획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출판사에서 근무할 때, 자기가 기획해서 만든 만화 잡지가 실패해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편집자의 경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라는 점에서 뼈아픈 경험이었다. 시오자와는 자기가 무능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그 일을 해내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시오자와는 현재 만화의 현실에 불만이다. 그가 함께 작업했던 만화가들은 나이 들어 과거의 명망으로 살아가거나, 한때의 영광을 가슴에 안고 만화 작업을 포기한 작가들인데, 과거의 만화에는 지금 만화에서 볼 수 없는 깊이와 감동이 있다고 시오자와는 확신한다.
즉 현재 만화는 작가의 영혼이 없는, 기능과 기술과 클리셰가 가득한 만화일뿐, 진정한 예술로써의 만화, 독자에게 감동과 진심어린 추억을 남기는 만화는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오자와는 '진정한' 만화를 다시 한 번 만들어 눈 밝은 독자와 만나기를 바란다.
시오자와가 지금은 잊혀진 작가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7인의 사무라이'를 보는 느낌이다. 한 마을에서 도적떼의 약탈을 막으려고 가난한 사무라이를 고용해 마을을 지킨다는 내용이어서 '동경일일'과는 아무 관련 없지만, 편집자 시오자와가 만화계의 원로,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읍소하면서 작품을 하나씩 받아낸다는 구조는 맥락이 같다고 생각한다. 즉, 절실함과 간절함으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마을'과 '시오자와'의 입장은 본질에서 같다. 그리고 '7인의 사무라이'가 목숨을 던지며 마을을 지킨 것처럼, 원로 고수 만화가들의 작품은 시오자와의 노력으로 빛을 발한다.
'동경일일'은 일본에서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하고 특별한 관행을 바탕으로 한다. 세계의 모든 출판사에서는 '편집자'가 있고, 편집자는 저자, 작가의 작품을 '높은 품질'로 만드는 기획자이면서, 저자, 작가의 조력자이며, 책 내용을 판단해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유명한 저자, 작가에게는 뛰어난 편집자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편집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출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에서 만화 편집자는 일단 단행본 편집자보다 더 많은 권한과 권력을 가진 걸로 알려졌다. 작가와 창작 단계부터 함께 내용과 캐릭터를 협의하며, 주간, 월간 연재를 결정하며, 원고료 수준 등 중요한 결정을 한다. 스타 작가에게는 '을'의 위치에 있지만, 신인이나 보통의 작가에게는 '갑'으로 군림하기도 한다. 뛰어난 편집자를 만나 성공하는 작가도 많기에, 편집자의 역할은 작가와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데, 시오자와는 편집자로 30년을 살면서 나름 능력 있는 편집자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시오자와가 찾아가는 작가들은 한 때 최고 작가로 이름을 알렸던 작가들로, 지금은 나이도 어느 정도 들었고, 인기의 절정을 지나 조금씩 잊혀지는 작가들이다.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안고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이제 만화와 인연을 끊은 작가도 있다. 시오자와는 자신의 판단으로 선택한 작가들을 찾아가 작품집을 내겠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편집자 시오자와의 판단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만화 편집자로 일하면서 수 많은 작가를 만났고, 작품을 봤으며, 대중이 좋아하는 작품과 작가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시오자와가 잊혀진 작가를 찾아가 작품집을 내겠다고 제안하는 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두 가지 목적이 있지만, 그 대상이 되는 '작가'가 누구인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시오자와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아집도 있고, '진짜 좋은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주고픈 욕망도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작가들이 누구인가를 고민했고, 몇 명의 작가를 선정해 찾아간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예전 작가들은 시오자와의 만화 세계관에서 최고의 작가로 인식된 작가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선택은 시오자와가 퇴사 직전에 만든 만화 잡지가 판매 부진으로 폐간하게 된 이유와 정 반대라는 걸 알 수 있다. 즉, 퇴사 직전에 만든 만화 잡지는 현재 독자를 상대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려 했던 시도였으나, 그 시도가 실패했다. 그건 시오자와 개인만의 실패가 아니라 출판사가 지향하는 만화 잡지의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시오자와는 출판사의 판단을 배제하고 오로지 자기 스스로의 판단으로 새로운 만화 잡지를 만들어 독자의 판단을 받아보려는 생각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만화 잡지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자기의 감각을 믿고 있다. 그건 시오자와가 집에 오래 전부터 모아 온 만화책을 헌책방에 팔려고 업자를 불렀다 판매를 철회하는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여전히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 창작을 직접 하지 않지만 작가를 도와 만화 창작을 하는 과정에 개입하고, 독자에게 새로운 만화를 선보이고, 좋은 만화가 세상에 나와 독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만화의 세계로 빠져드는 일련의 과정을 즐기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동경일일'은 진정한 만화 독자와 만화가, 만화편집자를 위한 만화다. '만화를 위한 만화'를 그리고, 그런 만화를 사 보는 독자가 있는 것도 일본의 특수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최대의 만화 강국이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포함하면 '만화 대국'이다. 만화 산업의 규모도 크고, 스타 작가가 되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 '만화를 위한 만화'를 천재 만화가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렸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 사소한 이야기를 이렇게 매력 있게 그릴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이라서 더욱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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