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두 권의 소설에서

최근 읽은 소설 가운데 우연히 남편의 존재에 관한 내용을 다룬 작품 두 편을 읽었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과 마리 다리외세크의 <유령들의 탄생>이 그것인데, 두 작품 모두 어떤 이유에서든 남편을 잃은 여성의 이야기다.
'환상의 빛'은 책읽기 모임에서도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작품인데, 20대 중반의 남편은 어느날 기차 선로 위를 걷다 기차에 치어죽는다. 남편의 죽음은 누가 봐도 명백한 자살이었고, 아내이자 주인공 유미코는 남편이 왜 자살했는지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어린 아이를 둔 유미코는 남편이 죽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바닷가 마을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살고 있는 남자와 재혼한다. 두 사람은 잘 지내지만 유미코는 죽은 전 남편의 '자살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이유를 알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느꼈던 바닷가에서의 '환상의 빛'을 남편도 어느 순간 봤을 거라고, 그 '환상의 빛'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고, 어느 순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빛이라는 것을 생각할 뿐이다.
'유령들의 탄생'은 어느 날, 바게뜨빵을 사러 나간 남편이 사라진 이야기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 온 남편은 집에 빵이 없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빵을 사러 나간 다음, 사라진다. 남편의 실종을 믿지 못하는 아내는, 동네를 찾아다니고,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돌아올 기약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왜 집을 나갔는지, 아내는 그 이유를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남편이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환상의 빛'은 여자 주인공의 눈으로 바라봤지만 작가는 남성이다. 그리고 '유령들의 탄생'은 여성 작가다. 두 작품이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두 작품 모두, 남편의 자살과 실종에 있어 그 사건의 원인이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왜일까? 두 여성 주인공은 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물론 남편의 '부재'에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소통의 부재'다. 남편이 사라지게 된 결정적 원인이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그 고민에서 자신의 문제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나 때문일까?'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걸까? 그건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두렵기 때문이다. 여성(아내)이 자기의 잘못으로 남편이 자살하거나 사라졌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자기의 몫이고, 가족, 친구, 친지, 이웃 모두에게 비난을 받을 것으므로,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두 작품을 읽어보면, 주인공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바라보면 당연히 남편의 자살이나 실종의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두 주인공을 멀찍이 바라보게 되면, 두 여성의 존재가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고,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고, 남편의 자살과 실종에 그들의 배우자 즉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혹시라도 여성을 비하한다고 여기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위의 상황은 남자와 여자를 바꿔놓아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편의 자살이나 실종의 문제는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자'의 문제인 것이다. 만일 여기서 자살이나 실종을 하는 사람이 여성이었다면 당연히 문제의 근원은 그들의 배우자인 '남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소통의 부재'인 것이지 젠더로서의 '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렇다고 남편들의 자살이나 실종의 책임이 온전히 그들의 배우자에게 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두 작품에서 아내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부분은 상당하지만 100%라고 말할 수는 당연히 없다. 모든 사건은 상대적이고, 완전히 어느 한쪽이 잘못하는 경우는 '범죄'에서만 가능하다.
평범한 부부가 살아가면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잘못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아무 잘못 없는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이라면, 그것은 범죄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과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의 경우, 두 부부는 몇 년 동안 큰 문제 없이 잘 지냈다. 거의 다투지도 않았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지도 않았으며, 남편이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남편들은 자살했고, 사라졌다. 왜일까?

나는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아내에게 있다고 말한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렇다면 본질적으로는 누구에게 더 책임이 있을까. 남자인 내가 생각할 때, 결정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는 역시 남편에게 있다.
'환상의 빛'에서 남편은 불과 25세 젊은 나이에, 그것도 첫딸을 낳은 지 불과 석달만에 자살한다. 그는 영세한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부부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만 두 사람 모두 가난한 집안에서 중학교만 겨우 나오고 세상의 밑바닥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의 입장에서, 세상은 이미 고정되어 있고, 자신은 몇 십년은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것만 남아 있는, 미래가 지금과 똑같은 암담하고 고생스러운 시간으로만 남아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내와 갓난아이가 있으니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맞는 말이지만 잔인한 말이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결혼을 한 것부터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런 절망과 좌절과 뼈저린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실존에 관한 질문을 던졌고, 사회의 높은 벽과 도시빈민으로 꿈지럭거리는 한 마리 지렁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런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너무 젊은 나이에,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내와 갓난아이를 그렇게 버리고 자살한 것이 이기적인 태도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유미코의 남편은 어려서부터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유미코도 마찬가지인데, 남편은 엄마를 따라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가난한 살림 때문에 엄마는 어린 아이를 잘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외롭게 큰 아이는 가족의 따뜻함을 몰랐고, 가족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죄 없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자살하는 것이 잘 한 것이냐는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다. 유미코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 있었다면 오히려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유미코는 갓난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런 경우, 실존이 존재를 위협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령들의 탄생'은 그런 면에서 '환상의 빛'보다는 조금 더 그 이유가 선명하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에게 빵을 사 오라고 말하는 아내.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자신이 그동안 남편에게 무심했었다고 독백하는 아내. 그러면서도 왜 남편이 사라졌는지를 모르는 아내.
여기서 사라진 남편은 '환상의 빛'에서 자살한 남편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자발적인 실종을 선택했을 뿐, 자살을 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출이 아니라 범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빵을 사러 가는 길이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당하거나 차량으로 납치를 당했을 가능성은?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을지언정 자살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남편은 하루 일과를 마쳤고, 여느 때처럼 저녁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왔으며, 아내가 저녁준비를 마쳤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죄의 가능성도 매우 희박한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거리는 사람들의 왕래도 많고, 밤이라도 불이 밝은 곳이어서 범죄자들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남편이 사라진 당일의 행적을 보면, 남편은 부동산 거래를 위해 몇 건의 상담을 했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실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수완이 좋고 능력이 있어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독백으로, 남편에게 무심했다는 말을 한다.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는 무심하고, 식사도 잘 차려주지 않고 그렇다고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종일 집에서 뭘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 하는 여느 주부들처럼 집안 살림에 신경을 좀 쓰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그걸 말로 한다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지나가면서 남편은 이런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저녁도 차리지 않은 아내가 빵이 없다면서 자기더러 빵을 사오라고 한다. 낮에 뭐하고 있다가, 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남편은 화를 내는 대신, 차갑게 웃으면서 알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지갑에 들어 있는 얼마 안 되는 현금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차를 타고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의 존재가 유령처럼 생각되겠지만, 남편의 입장에서는 숨막히는 저주로부터 풀려난 느낌이라는 걸 아내는 과연 알까?
이 소설은 사실 정반대의 입장 즉 남편의 입장에서 똑같은 분량으로 더 쓰여져야 한다. 앞부분에서 아내가  남편의 실종에 관한 아방가르드하고 슈르레알리즘적인 서술들이 남편의 실종에 관한 자기연민이라면, 뒷부분에서 남편의 독백은 그로데스크하고 자기학대적인 폭력적인 표현들로 난무할 것이다. 
여자를 잘못 선택한 멍청한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과 구역질 나는 결혼생활에 대한 자학과 7년 동안 참고 살아 온 고통과 불만의 폭발로 채워질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남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자들의 자기비판이 일정 부분 있어야 할 것이지만, '환상의 빛'에서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유령들의 탄생'에서는 남편의 실종에 아내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아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럼에도 아내보다는 남편(남자)에게 더 큰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극단의 상황까지 오는 동안에 아내에게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아내를 낯선 사람, 타자, 이방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남편들의 잘못이었다. 그런 것까지도 아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다. 문제의 심각함을 알아달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남편들이었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껏 남편의 심기를 헤아려야 한다고 믿었던 남편들의 이기심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두 남편은 아내를 완전히 믿었을까?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적어도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 때는 사랑했을 것이고, 믿었을 것이지만, 결혼생활이 지속되면서 남편들에게는 의무감과 책임감만 남았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소통'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나 하나가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는 극단적인 생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테니 말이다.


Posted by 똥이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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