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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유럽영화

[영화] 퍼스널 쇼퍼

by 똥이아빠 2017.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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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스널 쇼퍼

영화를 보고 든 첫 느낌은, 이 영화의 분위기가 카프카의 소설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불분명함, 불투명함, 몽환적인 분위기, 깨어 있는 것도 잠든 것도 아닌 상태, 현실과 환상이 뭉뚱그려져 뒤섞인 애매함 등등 영화 속 이미지는 그렇게 카프카적이었다.
주인공 모린은 미국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지만 자신을 영매라고 믿고 있고, 유명 인물의 패션을 도와주는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옷을 입어 볼 기회가 없는 가난한 노동자에 불과하다. 이렇게 명백히 다른 두 영역에 걸쳐 있는 모린의 자의식은 불안정하고 혼란하다. 여기에 이란성 쌍동이 오빠의 죽음으로 그가 받은 충격은 밖이 아닌, 자신의 내부에서 충격파가 되어 퍼져나가고 있다.

모린의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 것 역시 고립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린의 부모는 등장하지 않고,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언니는 친언니가 아니다. 단절된 인간관계는 현대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개별화, 고립화는 특히 산업사회가 발달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자본의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모린이 하는 '퍼스널 쇼퍼'라는 독특한 일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직업이다. 부르주아가 해야 할 사사로운 일을 대신 해주고 임금을 받는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파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단순 노동이라고 하기 어렵다. 모린을 고용한 모델은 자신과 체형이 거의 비슷한 사람을 '퍼스널 쇼퍼'로 고용해 자신이 입을 옷과 장신구를 미리 입어보고 착용해 느낌을 알 수 있도록 한다. 파리의 패션업체들은 지금 막 나온 신제품을 권하고, 그것을 입고 착용하는 사람은 유행을 선도하는 첨단의 패션 감각을 가진 사람임을 세상에 알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 그것도 돈이 많은 사람의 기호에 맞춰 패션 구색을 갖추도록 직접 개입하는 '퍼스널 쇼퍼'는 자신을 고용한 돈 많은 고용주의 패션과 욕망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할 위험을 안고 있다. 모린이 새 옷을 받아오고도 한 번도 입거나 착용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런 감정을 느끼고,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침내 모린은 새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본다. 

영화 곳곳에 귀신, 유령의 존재를 심어 놓았지만 이 영화는 정작 즉은 자와의 소통에는 관심이 없다. 스스로를 영매라고 생각하는 모린이지만, 그 역시 죽은 오빠의 영혼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은 반쯤이고, 반은 회의적이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등장하고, 그것은 공포보다는 슬픔 또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퍼스널 쇼퍼'로서의 존재, 영매로 믿는 자신의 정체성 등은 양가적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휘둘리는 모린의 내면의 복잡한 심경을 상징한다. 모린은 영화 속에서 거의 웃지 않는다. 웃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삶 자체가 고통스럽고, 혼란하며, 마음을 편하게 부려놓을 상황도, 여유도 없이 날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를 질주해야 하는 바쁜 삶은 모린의 내면이 황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명료하지 않고, 시작과 끝도 애매하고,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도 불분명하지만 잘 만든 영화다. 이 영화가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는 것을 두고 호평과 악평이 두루 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꽤 잘 만든 영화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영화가 끝나고, 곧바로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과 함께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명료하지 못한 영화가 모두 훌륭한 작품인 건 아니지만,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영화는 잘 만든 영화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 장면과 함께 이어지는 엔딩 타이틀의 음악이었다. 이 영화의 정체성, 특징, 감수성, 분위기, 주인공의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영화에서 엔딩 타이틀 음악은 매우 중요하고, 영화의 느낌을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하는데, 이 영화에서 엔딩 타이틀 음악은 마치 영화와 하나인 것처럼 매우 완벽했다.
마지막 장면의 그 충격적인 컷이 영화에서 모호했던 것들을 많은 부분 정리하고,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영화의 전반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안나 본 하우스볼프이고 노래 제목은 'Track of Time'이다. 이 영화를 통해 몰랐던 가수와 노래를 새로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스웨덴에서 태어난 안나는 이제 서른살이 막 넘은 젊은 가수임에도 그의 노래는 신비롭고 아름답다. 엔딩 타이틀인 'Track of Time'의 오리지널 뮤직비디오를 보면, 이 노래의 분위기가 '컬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곳곳에 배치한 컬트적 이미지와 상당히 닮아 있는데, 영화와 음악, 이 두 요소가 화학적으로 결합해 완성도를 확실하게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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