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기나긴 이별

모처럼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마치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소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와 인물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소설 뿐 아니라 인문학, 과학 책도 마찬가지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후기 장편소설 '기나긴 이별'은 그의 첫 장편 '빅 슬립'에 비해 훨씬 신파적이다. 필립 말로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만 한다. 그에게 있어 '긴 이별'은 좋아했던 친구일 수도, 좋아했던 여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가 살아왔던 쓸쓸하고 우울했던 과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은, 지극히 남성적이면서 미국적이다. 그가 영국에서 꽤 오래 살았다고는 해도 주인공 필립 말로가 살고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다. 게다가 이 작품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자적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그의 일대기를 이해하면 이 소설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필립 말로가 우연히 알게 된 한 사내는 갑부의 딸과 결혼했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말로는 그 사내와 가끔 바에서 술을 마시는 정도로 알고 지내다 어느 날, 그 사내의 부탁으로 멕시코 국경 너머로 태워다준다. 그리고 그 사내의 아내가 사체로 발견되고, 그 사내 역시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평범해 보이는 시작과 달리, 사건은 점차 미궁으로 빠지는 듯 보이면서, 감추어진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를 찾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자살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유명인, 부자들의 죽음이 발생하면서 삼류 언론의 먹잇감이 되지만, 진실은 십여년 전의 전쟁 당시(제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소설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거의 마지막 장편소설이기도 하고, 그의 작품 가운데서 '빅 슬립'과 함께 최고의 작품이기도 하다. 길고 긴 이야기지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힌다. 챈들러의 글쓰기는 독백, 만연체로 현대의 글쓰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이야기의 핍진함은 탁월하다. 그것은 주인공 필립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치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듯한 세부적인 묘사 덕분이다. 등장 인물들도 그 지역에서 실제 살고 있는 인물들처럼 등장과 퇴장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부르주아들의 추악한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그들 사이의 범죄가 많은 부분 돈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치정 살인이 주된 내용이지만 딸의 추잡한 사생활을 감추기 위해 보이지 않는 힘을 쓰는 것이 결국 돈의 힘이라는 것도, 지극히 미국적인 해결 방식이자 돈이 곧 권력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반전은 독자를 충격으로 몰고 간다. 주인공 필립 말로는 자신의 친구가 멕시코로 도주하고, 그의 아내가 살해당한 시점부터 꽤 오랜 기간 경찰과 폭력조직 사이에서 시달림을 당하며 고생을 하지만 오로지 혼자서 꿋꿋하게 견딘다.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두 사람이 더 죽고, 마침내 사건이 종결되고 자유의 몸이 된 필립 말로를 찾아온 낯선 사내. 독자는 그를 반갑게 맞이할까, 증오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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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똥이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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