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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터미널

by 똥이아빠 202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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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이 영화도 내용은 단순하다. 동유럽으로 추정하는 작은 나라에서 미국 뉴욕공항-JFK-에 도착한 빅터 나보르스키는 입국 심사를 받는 시간에 자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비자가 취소되는 황당한 사건을 겪는다. 공항의 입국심사국에서는 이런 상황에 맞는 매뉴얼이 없어 범법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합법적 국가가 승인한 비자가 없는 상태여서 미국 입국을 승인하지 못한다. 결국 국제환승 터미널 라운지에서 머물도록 하는데, 여기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하게 발생한다. 

빅터는 언제든 바깥으로 나갈 수 있지만, 나가는 순간 범법자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캐스트 어웨이'에서는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터미널'에서는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으나 주인공이 탈출하지 않는다. 그것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여기서는 공항의 출입국을 책임진 국장-가 보여주는 야비한 모습임을 관객은 눈치챈다.

 

우연의 일치지만, 톰 행크스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와 이 영화는 같은 알레고리를 공유한다. 다만, 드러나는 형식은 전혀 반대의 상황일 뿐이다. '캐스트 어웨이'에서는 문명사회에서 무인도로, '사회 속의 관계'에서 '고립'으로 이행하지만, '터미널'에서는 그 반대로 진행한다. 문명사회에서 고립된 빅터는 오히려 국제환승 터미널 라운지 바깥으로 나가면 범법자가 되는 상황이다. 첨단의 문명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환승 터미널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세계 여러 나라,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환승 터미널에 '갇혀'있다는 것, 고립되어 있다는 것은 '캐스트 어웨이'에서 척 놀랜드가 놓여 있는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즉, 다중 속의 고독, 사회적 관계에서의 고립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전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외부 상황에 의해 고립된다는 점에서 척과 빅터 모두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존재다.

'캐스트 어웨이'에서는 내적(정신적) 고립 상태를 척이 스스로 선택했을 수 있다고 보여지지만, '터미널'에서의 고립은 공간적 고립과 언어적 고립이라는 두 개의 메타포가 작동하고 있다. 빅터는 자기 나라의 정치적 상황-쿠데타-으로 공항에 발이 묶인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생존해야 하는 건 무인도에서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이 영화가 '캐스트 어웨이'와 정확히 반대인 지점은 더 있다. 척은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고립된다. 그것이 척의 정신적인 문제라고 해도 그가 알던 애인, 친구들과 멀어지고, 결국 혼자 남는데 반해, '터미널'에서는 혼자 유폐된 빅터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친구들울 사귄다. 밀폐에서 개방으로, 고립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영화는 빅터의 삶 전체가 공간적, 정신적으로 확장하는 것을 보여준다.

 

무인도에서 척이 원시적 도구만으로 생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에서 빅터는 건축-인테리어-을 솜씨 있게 보여줌으로써, 그가 고립되기 전의 사회에서도 쓸모 있는 사람이었음을 증명한다. 무인도에서 나온 척은 자신이 생존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 유일한 택배를 스스로 배달하고 빈손이 된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가진 자동차가 남았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반면, 터미널에 고립된 빅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중하게 간직한 물건이 있다. 그 역시 고립과 고독을 견디는 힘이 바로 이 소중한 물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도, 쓸모도 없는 물건이지만, 빅터에게는 어떤 보물보다 소중한 유산임을 영화는 마지막에 보여준다.

또한, 척은 자신이 살던 공간, 친구, 애인과 결별하고 스스로 낯선 곳을 향해 떠나지만, 빅터는 낯선 곳에서 고립되었다가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말이 통하는 이웃과 무엇보다 그가 '사회적 존재'로서 답답함을 느꼈던 언어(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낯익은 곳과 사람에게서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캐스트 어웨이'와는 반대로, 낯선 곳에서의 고립을 끝내고 낯익은 곳으로 가는 '터미널'은 그래서 '캐스트 어웨이'와 이란성 쌍동이 같은 영화다. '캐스트 어웨이'와 '터미널' 모두 사회언어학으로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인간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만큼 사고할 수 있다는 이론도 있듯이, 무인도에 갇혀 대화할 대상이 없었던 척은 분신을 만든다. 배구공 '윌슨'에게 인격을 부여해 그를 상대로 대화하는 것이다. 언어를 잃어버리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역으로, 사회에서 고립되면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도 '캐스트 어웨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언어를 통한 사회화, 사회 속에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으며, 어떤 경우든 언어를 잃는다는 것-선천적 또는 사고로 언어를 잃는 것도 포함해서-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 소외되거나 고립될 확률이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터미널'에서 빅터가 낯선 언어들에 포위되고, 자기 언어를 발화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사회적 고립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빅터도 자기가 살던 나라에서는 어엿한 시민이고 건축기술자이며 그 방면으로 전문적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지만, 그가 언어를 발화하지 못하는 공간에 놓이는 순간, 사회적 미아, 보호받아야 할 미숙한 존재로 취급받게 된다. 그래서 빅터는 열심히 낯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소통하게 되면서 고립에서 서서히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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