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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의 역사적 변천

by 똥이아빠 201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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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의 역사적 변천

이상배(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목 차

1. 영조대의 정치적 변화와 치적

1) 즉위과정

2) 탕평책의 실시와 변화

3) 영조의 치적

2. 정조대의 생애와 업적

1) 정조의 즉위와 업적

2 규장각의 설치와 활용

3 경제적 개혁정치 추진

 

 

1. 영조의 생애와 업적

영조(16941776)는 조선 제21대 왕으로 17251776년까지 52년간 재위하였다. 이름은 금(),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의 세 아들(景宗·英祖·延齡君)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 즉위 과정

1699(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金昌集)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寧嬪) 김씨의 양자노릇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숙종 말년 왕위계승문제가 표면화되었을 때 그 이복형인 왕세자(후일의 경종)를 앞세우는 소론에 대립했던 노론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측은 앞서 숙종 말년에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독대에서 논의된 대로 연잉군이던 그를 경종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착수하였다.

정언 이정소의 세제책봉상소를 계기로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李健命영중추부사 이이명·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 이른바 노론4대신의 요구와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숙종의 제2계비인 人元王后)의 삼종혈맥(三宗血脈)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그는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삼종혈맥이란 효종·현종·숙종에 걸치는 3대의 혈통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숙종의 유교(遺敎)라고 하는데, 여기에 따르면, 임금인 경종 외에는 연잉군밖에 없는 셈이 된다(그의 이복동생인 연령군은 숙종 말에 죽었음).

유봉휘(柳鳳輝)로 대표되는 소론 일부의 반발과 다른 후사를 물색하던 경종비 어씨(魚氏)의 불만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가 왕세제로 책봉된 명분은 당당하였다. 그런데 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이 병환중이어서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휴양하도록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소론은 왕권을 침해하는 불충이라 해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결국 대리청정론은 취소되고 김일경 등 소론 내 강경론자의 공격으로 노론세력이 일시에 정계에서 축출되어 소론정권이 들어섰다.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또 그들에 의해 왕세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로서는 고립된 상태를 면할 수 없었으며, 뒤이어 노론이 경종에게 반역행위를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에 의한 이른바 임인삼수옥(壬寅三手獄)이 발생, 노론 4대신을 위시한 170여명의 노론계 신하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가는 사태가 벌어짐에 미처 그 역시 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처제인 서덕수(徐德壽)나 인척관계에 있는 백망(白望정인중(鄭麟重) 등이 고문 때문인지는 모르나 역모를 자백해 처형된데다 그 자신까지 피의자의 공초에 오르내리게 되어 역모에 관련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환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의 방해로 대궐출입이 막히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이에 그는 왕세제 자리의 사퇴를 걸고 이를 문제화해 결국 집권소론으로 하여금 적대행위를 일삼는 환관·궁녀들을 처형하도록 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이후 그를 보좌하는 동궁요속(東宮僚屬)이던 김동필(金東弼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박문수(朴文秀) 등과 대비 및 경종의 보호로 불안한 속에서도 세제의 자리를 지켜 1724년 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2) 영조의 탕평책 실시와 변화

왕위에 오른 직후 영조는 장차 탕평책 시행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붕당의 폐해를 들어 붕당타파를 천명하였다. 그가 탕평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세제로 책봉된 뒤일 것이다.

노소론 사이의 정쟁이야 숙종 때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그 때는 자신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는데, 왕세제책봉과 대리청정에서부터 노소론간의 당론이 충역론으로 확산되면서 자신이 바로 그 정치적 소용돌이의 핵심에 처하여 생명까지 위협받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위 직후 소론인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으로 영·좌의정을 삼고, 세제 책봉시 격렬하게 반대했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면서 한편으로는 앞서 임인삼수옥 당시 자신을 모해하고 죄인으로 몰려고 했던 김일경 등 소론과격파(急少)와 삼수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하였다.

이어 즉위 초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소론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지세력인 노론을 정계로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구성하면서 노론4대신을 위시하여 임인옥사에서 죽거나 처벌된 사람들의 죄를 모두 없애고 그 충절을 포상하는 을사처분(또는 乙巳換局)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했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 등의 노론당로자들이 을사처분과 환국에만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 소론에 대한 보복까지 요구하여 정국이 다시 노·소론 사이의 파쟁으로 흘러가자, 1727년 갑자기 노론을 일시에 축출하고 이광좌를 수상으로 하는 소론정권을 형성(이를 丁未換局이라 함)하면서 경종년간의 건저(建儲대리(代理)를 역적의 행위로 규정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은 1728년의 무신란(戊申亂, 혹은 李麟佐)을 겪고 나서였다. 애초에 영조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은 그가 왕세제로서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대체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으나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과격파(急少)들은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김일경이 처형되고 을사환국으로 노론정권이 들어서서 일반 소론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들이 숙종 20년의 갑술환국 때 노론에 의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몰려 정계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 일부(흔히 己巳餘孼이라 함)를 규합해 정변을 일으킨 것이 무신란이었다.

반란은 정미환국으로 집권하고 있던 이광좌·오명항(吳命恒) 등의 소론정권에 의해 조기에 진압되었으나 당쟁의 폐해로 변란까지 겪게 된 영조로서는, 붕당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란 명분 하에, ·소론에게 교대로 정권을 맡기는 환국형태가 아닌 탕평정국을 위한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그것이 조문명(趙文命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해 주장된, 권력구성에 노·소론을 안배해 함께 참여시킴으로서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조제(調劑)형태의 탕평책이었으며, 이를 구체화하는 방법이 분등설(分等說)과 양치양해(兩治兩解쌍거호대(雙擧互對)였다.

분등설은 노소론간의 충역시비를 양시쌍비(兩是雙非)논리에 의해 절충하여 양측 모두가 벼슬길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이며, 양치양해 역시 어느 한쪽을 죄주려면 반드시 다른 한쪽에 짝을 구하여 함께 벌함으로써 편파성을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쌍거호대란 인사정책으로, 예컨대 노론 홍치중(洪致中)으로 영의정을 삼으면 소론 이태좌(李台佐)로 좌의정을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金在魯)를 맡기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徐宗玉), 전랑에 노론 신만(申晩)으로 상대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에 의해 노·소론간에 충역시비가 상반되는 경종년간의 신축·임인옥사(흔히 辛壬獄事라 함)를 절충해 1729년의 이른바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리고 소론계의 조문명·현명, 송인명·서명균(徐明均) 등과 노론계의 홍치중·김재로·조도빈(趙道彬) 등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파를 주축으로 하여 노·소론간의 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정국이 실현되었으며 이 바탕 위에서 영조의 왕권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영조를 위하다가 역적으로 몰린 노론 피화자의 신원요구를 언제까지나 묵살하기는 곤란하였고, 무엇보다도 영조 자신까지 혐의를 받고 있는 임인삼수옥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유처분 이후 정권에 참여한 소론의 동의와 양보를 얻어 조금씩 노론 피화자를 신원시켜 갔으며, 마침내 1740(영조 16) 노론4대신에 대한 완전한 신원과 신임옥사가 소론과격파에 의해 조작된 무옥(誣獄)임을 판정하는 경신처분을 단행하고, 뒤이어 이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신유대훈(辛酉大訓)을 반포하였다.

이제 숙종-경종-영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은 물론 소론과 나라 전체 사람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영조는 종전의 노·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벗어나 노·소론은 물론 남·북인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을 표방하고, 쌍거호대 대신 유재시용(有才是用)의 인사정책을 취하여 오광운(吳光運채제공(蔡濟恭) 등의 남인과 남태제(南泰齊)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노론 명분 아래 추진되었으므로 흔히 노론 탕평이라 불리우는 이 시기의 탕평책 아래서 영조는 만년에 스스로 자신의 4대 사업으로 손꼽았던 이조낭관통청권(吏曹郎官通淸權)의 혁파, 한림회천법(翰林回薦法)의 회권법(會圈法)으로의 전환, 균역법·산림(山林)의 정치적 위상 격하(이상의 넷을 줄여서 吏郞·翰林·均役·山林이라 함)와 같은 개혁을 성사시켰으며, 이 외에도 서원철폐나 노비신공의 반감, 군비와 군제의 정비 및 치세 후반기까지 계속되는 서적의 간행과 같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런 노론탕평은 1755(영조 31)의 을해옥사로 소론내 과격파의 잔여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또 소론들 스스로 조태구·이광좌 등을 영조에 대한 불충이라 하여 죄안에 올리기를 청하면서 자기들 당론의 잘못을 뉘우치는 소를 올림으로써 노론 명분이 완전히 승리하며(이를 辛壬義理라 해서 향후 노론 집권의 기본명분이 된다.) 또 이를 천의소감 闡義昭鑑이란 책자로 반포함으로써, 한층 추진력을 갖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시기부터 집권세력 내부의 분열로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된다.

그 분열이란 노론 내에서 1749(영조 25)이래 대리청정을 해온 왕세자(후일의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표면화된 것으로, 세자가 신임의리에 투철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과 세자를 보호하려는 홍봉한 등의 외척사이의 갈등이었는데 곧, 동당(東黨남당·중당(中黨)의 명목으로 성립하였으며, 명성왕후가 죽어 정순왕후가 계비가 됨에 그 친정 아버지인 김한구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이런 분열에 가세하고, 다시 이에 더하여 소론과 남인 일부가 이런 틈새를 이용해 정치력을 신장하려 꾀함으로써 전날의 노·소 대립처럼 살벌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노론 탕평은 이미 속으로 곪고 있었다.

1762(영조38) 영조가 자신의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든 참변(壬午禍變)을 일으킨 것은 이런 갈등속에서였다. 신임의리의 붕괴를 우려하는 노론 일부의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서였건, 홍계희·김상로와 정순왕후 등의 궁중세력의 모함에 빠져서였건, 아니면 한중록의 서술처럼 이상성격으로 인해 임금이 되기에 부적절한 인품이어서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간에 영조 개인으로서는 정치에서 또 한번의 고통과 좌절을 받게 된 셈이다.

더구나 나라의 근본(國本)이라는 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한두 명의 동궁요속이 세자를 구원하려 했을 뿐, 어느 누구도 목숨을 내놓고 임금에게 충간해 신절(臣節)을 지킨 신하는 없었다.

이는 숙종 15(1689)의 민비 폐출 시 박태보·이세화의 죽음과 극히 대조적이다. 탕평이 사대부의 명절(名節)을 무너뜨린다는 지적대로 영조에게 왕권의 안정은 가져다주었으나 이제 군신관계는 이록(利祿)을 매개로 할 뿐 전날의 사림정치에서 보는 의리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속에서 영조의 왕권은 점차 왕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외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임오화변 이후의 정국은 탕평이 여전히 표방되었지만 실은 홍봉한과 김한구를 각기 대표로 하는 두 갈래 척신세력의 노론·소론·남인·북인이 이해를 좇아 이합집산하는 형국을 보였다.

대체로 보아 영조말기의 정국은 왕세손을 등에 업은 홍봉한 세력이 우세하였으나 외척에 비판적인 일부 관료가 청명당(淸明黨)을 형성하여 이를 견제하고 여기에 김한구계의 척신이 연결되었으며, 다시 왕세손(후일의 正祖)을 보호하는 세력과 이를 모해하려는 세력간의 암투가 벌어지는 속에 고령으로 이미 노쇠해 버린 영조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나마 승하하기 몇 달 전 홍인한 등 권세가의 방해를 물리치고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성사시킴으로써 세손의 즉위를 순조롭게 한 것이 영조의 마지막 영단이었다.

 

3) 영조의 치적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1725년 영조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형살(刑殺)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1774년 사문(私門)의 용형(用刑)도 엄금하였다. 그리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경제정책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서 1725년 각 도의 제언(堤堰)을 수축, 한재에 대비하게 하였고,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세하도록 하는 한편, 오가작통(五家作統) 및 이정(里定)의 법을 엄수하게 해 탈세방지에 힘썼다.

그리고 1760년에는 서울의 주민 15만명과 역부(役夫) 5만명을 동원해 2개월간에 걸쳐 개천(介川, 즉 오늘날의 청개천)을 준설하게 하고 이어 준천사(濬川司)를 설치, 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서울시민의 골칫거리였던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하였다.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均役法)이었다. 단순한 감필(減疋)이 아니라 모두 1필역(一疋役)으로 부담을 균일하게 함으로써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그리고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전(結錢)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양반이 위주인 지주층의 부담을 끌어내고,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피역자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란 명칭을 부여하여 군관포를 징수한 것이나, 어염세·은여결세 등 그 동안 국가세입에 들지 않던 세금을 국고로 환수하게 한 데서 보듯이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가 얽힌 양역문제 해결에서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한 것은, 1750년 친히 홍화문(弘化門)에 나가서 한성 시민을 만나서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는 의지를 보인 것과 함께 균역법이 갖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환곡분류법(還穀分類法)을 엄수하게 하는 등 환곡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1763년에는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한재 시에 기민을 위한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편, 신분에 따른 역()을 더욱 명백히 하고자 하여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균역법의 시행은 물론,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하여서 1730년에 양처(良妻) 소생은 모두 모역(母役)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여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하였고, 서얼차대(庶孼差待)로 인한 사회참여의 불균등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1772년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통청법을 제정해 서얼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었다.

영조는 그의 생전의 신념으로 이끌었던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서원·사우(祠宇)의 사건(私建) 또는 사향(私享)을 금지시키면서 1741년에는 이를 어긴 170여 개소의 서원·사우에 대한 훼철을 강행함으로써 서원남설에 철퇴를 가하였다. 숙종 때까지 매년 10여 개씩 늘던 남설의 경향이 일시에 그친 것은 그 과단성 있는 정책의 집행이 가져온 큰 효과였다.

, 1772년에는 과거시험도 탕평과(蕩平科)를 처음 시행하는 특례를 보였고, 같은 해에는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를 집집의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군비와 관련해서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며 1729년에는 숙종 때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火車)를 고치게 하고, 이듬해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조총(鳥銃)을 만들게 하여 군기(軍器)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1755년 조선 전기 이래 임금의 친위군으로 존속해오던 금군(禁軍)을 정비해 용호영(龍虎營)으로 독립시켰으며, 전라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統營) 및 각 도의 수영(水營)에서 만들도록 해 임진왜란 때 떨쳤던 해군력을 계승, 더욱 발전시키도록 하는 한편 북방 변방 및 요새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여 1727년 북관군병(北關軍兵)에게 총을 복습하게 하였고, 1733년에는 평양중성(平壤中城)을 구축하게 하며,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감란록 勘亂錄을 반사(頒賜)하고, 이듬해 숙묘보감 肅廟寶鑑을 편찬하게 했고, 1732년에는 이황(李滉)의 학문세계인 퇴도언행록 退陶言行錄을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수명(修明)시킴과 동시에 여성을 위한 여사서 女四書를 언역(諺譯)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1742년에 천문도 天文圖·오층륜도 五層輪圖를 모성(模成)시켰으며, 이듬해에는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 良役實總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하였고, 1754소학훈의 小學訓義·속오례의 續五禮儀를 편찬하게 하며, 경국대전을 수명한 뒤 새로이 제도적으로 바뀐 것을 반영해 속대전을 만들었다.

1747황단의궤 皇壇儀軌를 편찬한 뒤 이듬해에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법을 선용하라는 취지로 만든 관리들의 필독서 무원록 無寃錄을 필삭, 훈석을 가하게 하여 각 도에 반포하였고, 1749속병장도설 續兵將圖說, 1753누주통의 漏籌通義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영조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는 천의소감 闡義昭鑑을 이룩, 이를 내외에 반포하며, 1747년에는 삼국기지도 三國基址圖·팔도분도첩 八道分圖帖·계주윤음 戒酒綸音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1765해동악장 海東樂章을 만들고, 여지도서 輿地圖書를 인간(印刊)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읍지도 모으게 하였다. 한편, 1770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또한 영조는 스스로 여러 권의 책을 친히 만들기도 하였다. 악서(樂書)의 전범(典範)악학궤범의 서문과 스스로를 되돌아 본 어제자성편 御製自省編을 지었다. 그리고 1754년에는 무신들을 위해 위장필람 爲將必覽을 저술, 이를 무신들에게 인반(印頒)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어제경세문답 御製警世問答·어제경세편 御製警世編·백행원 白行源·어제소학지남 御製小學指南·팔순유곤록 八旬裕崑錄·어제조손동보 御製祖孫同譜·어제효제권유문 御製孝悌勸諭文등이 있다.

이 당시 재야에서 실학(實學)이 확대되면서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간행하도록 했는데, 1765년 북학파 홍대용(洪大容)연행록 燕行錄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柳馨遠)반계수록 磻溪隨錄이 간행되었다. 또한 신경준(申景濬)도로고 道路考1770년에 편찬되었다. 영조는 친히 호학하였기 때문에 신학풍에 대한 이해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3대 치적 가운데 탕평정치는 앞에서 논했으니 제외하고 나머지 청계천 준설과 균역법에 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 개천의 준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기는 영조 때이다. 1751(영조 27) 당시 홍봉한은 성 안의 개울이 거의 모두 막혀서 매번 여름 장마철을 당하면 개울가에 사는 백성들이 피난 갈 준비를 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더러는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발생하기도 하니 만일 경조((京兆)로 하여금 방민(坊民)과 삼군문(三軍門)을 출동시켜 힘을 합치게 한다면 막힌 것을 뚫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준설의 필요성을 한차례 주장하고, 2년 뒤에 또 다시 개천준설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있다.

이후 본격적인 준설작업은 1760(영조 36)에 이루어진다. 당시 한성판윤 홍계희(洪啓禧)와 호조판서 홍봉한 등의 주장에 따라 경중오부(京中五部)의 방민 연 15만명과 삯을 주고 채용한 인부 연 5만명을 동원하고 돈 35,000, 2,300석의 자금을 투자하여 218일부터 415일까지 57일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영조는 이 공사를 위해 영희전(永禧殿)에서 친히 제를 올리고 쌀 20석과 감곽(甘藿) 600근을 일에 종사하는 역군(役軍)에게 지급하는 등 관심을 기울였다. 영조는 준천작업이 한창 진행 중에 있던 316일 군신이 모인 자리에서 준천의 방책은 모착(模捉)하기 어려운 것이니 훗날에 그것을 쉽게 알게 하기 위하여 이번 준천의 두서를 기록한 책을 만들게 하였는데 책명은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 붙이기로 했다. 또 이 준천의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으면 이번에 고생한 경과가 헛되이 될까 두렵다. 제언사(堤堰司)를 두는 예에 따라 병조판서한성부판윤삼군대장 등으로 준천사제조를 겸하게 하고 삼군문의 참군으로 하여 준천랑(濬川郞)을 겸하게 하는 상설기관을 설치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여 4개월에 걸친 개천 준설공사가 끝남과 동시에 준설 상설기관인 준천사(濬川司)가 설치되었다. 이 기관은 도성 내의 하천 정리를 주업무로 하고 그 밖에 사산표내(四山標內)에서의 암매장행위, 지형을 파괴하는 등 산림 훼손행위의 감찰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삼정승을 도제조로, 병조판서한성부판윤삼군대장과 비변사당상 등 6인의 고관을 제조로, 삼군문 금송군(禁松軍)을 낭청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하천 준설의 실무는 삼군에게 분담시켜 매년 2월과 8월에 제조가 삼군을 인솔하여 성안의 사산과 대소의 천거를 정기 순시감독하였다. 하천의 준설과 정비에 필요한 기구류는 삼군이 보관하고 인부를 고용해야 할 경우의 인건비와 하천 수리를 위한 물자 구입 등의 비용은 모두 준천사에서 지급하도록 하였다.

준천사에서는 매년 목책으로 호안하여 둑의 붕괴를 예방하였는데 그 때문에 해마다 비용이 과다하게 지출되자 1773(영조 49)에는 관서에 보관중인 쌀 1만석을 삼군문에 나누어 주어 호안을 석축공사로 교체하였다.

다음으로 영조의 치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균역법의 시행이다. 양역이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역역(力役)을 법제적인 구별인 양·천인의 두 신분층 가운데서 양인에게 부담시킨 일종의 신역(身役)인데 처음에는 직접 역역을 징발하였으나 점차 옷베또는 곡식으로 대신하게 되어 조선 후기에는 국가 재정수입의 큰 몫을 차지하는 부세(賦稅)의 형태가 되었다. 이 양역이 제도 자체의 모순과 운영상의 결함 등으로 민폐를 야기함은 물론 사회의 동요까지 초래하게 되자 그 대책이 오랫동안 여러 면으로 논의(良役變通論이라 함)되어 왔는데 마침내 영조 26년 양역의 부담을 대폭 줄여서 포 1필로 균일화함과 동시에 그에 따른 재정결손의 보완책 마련에 착수, 1년여의 논의 끝에 마침내 영조 28년 어염세(魚鹽稅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은여결세(隱餘結稅결전(結錢) 등의 새로운 세금을 통해 보충하도록 하는 내용의 균역법으로 시행을 보게 되었다.

탕평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노·소론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거듭되던 정국이 1740(영조 16)의 경신처분과 뒤이은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노론 명분속에 소론이 참여하는 형세로 어느 정도 안정을 갖게 되자 여기에 양역문제의 해결을 통해 탕평의 가시적 성과를 드러내고자 하는 임금과 탕평파의 정치적 의도가 맞물리면서 그 동안 지지부진하던 양역논의는 마침내 균역법의 제정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1750(영조 26) 7월 영조는 전격적으로 양역의 부담을 반으로 줄여 1필로 균일하게 하는 내용의 감필을 단행하면서 균역법의 첫 단계가 시작되었다. 감필이 단행된 이상 그에 따른 재정결손을 보완할 대책의 마련이 시급해졌다. 이에 영의정 조현명을 책임자로 하여 균역절목청(均役節目廳)을 설치하고 감필에 따라 줄어든 만큼의 비용을 해당 관청에 보충(이를 給代라고 함)하는 급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당시 급대에 필요한 재원은 대략 100만 냥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빈약한 세정상황에서 이를 조달하기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우선 각 군영의 규모 축소와 군사 수의 감축·군사시설의 병합·각 관청의 재정지출 절약 등에 의해 급대할 상당량을 상쇄한 후, 나머지는 왕족이나 궁방(宮房)에 주어져서 세원(稅源)에서 제외되었던 어염세를 다시 국고로 환수하고, 양반이 아니면서도 양역의 부과대상에서 빠져 있는 피역자 내지 한유자(閑遊者)에게 일정한 비용을 징수하며(選武軍官布), 그 동안 관행적으로 지방 수령의 사용(私用)으로 묵인되어 오던 은결(隱結) 여결(餘結)에서의 수입을 국가로 돌리는 등의 새로운 세원(稅源) 포착에 의해 급대재원을 확보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고도 부족한 액수는 각 고을에 일정량을 할당하여 징수하는 분정(分定)의 방식을 취하기로 하는 방안이 일차적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궁방이나 한유자·수령 등 실리(失利)하게 된 쪽의 반발이 심하게 일어나고 불합리한 분정방식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어나자 분정을 폐지하는 대신, 기존의 토지 세금에 1결당 쌀 두 말씩을 부가하는 결미(結米) 조항을 신설하고, 처음에 마련된 어염세·선무군관포·은여결세 등의 급대재원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감필이 단행된 지 1년여 지난 17519월 균역사무를 담당할 관청으로서 균역청을 옛 수어청 자리에 설치하면서 비로소 균역법은 정식으로 시행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균역법의 실시가 조선 후기 사회의 현안문제였던 양역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척결하지는 못했다. 즉 당시의 군포징수가 매정단위(每丁單位)가 아니고 촌읍 단위(村邑單位)였으므로 실제 혜택이 얼마만큼 있었는지 의문이다. 균역법 실시 직후 바로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삼정(三政) 중의 하나로서 군정의 문란이 말기까지 그 폐단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은 균역법의 성과가 크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종래의 약간씩 차이가 나던 양역의 부담을 감필을 통해 1필로 균일화한 점, 선무군관을 통하여 피역자 들에게 양역을 부과하여 불균등한 부역부과를 시정한 점, 특히 결미의 실시로 일부이기는 하나 막연한 노동력을 단위로 했던 인두세(人頭稅)가 실질적인 생산력을 가진 토지로 전환됨으로써,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세금의 부과에 의하여 조세징수의 합리성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급대재정(給代財政)의 마련을 위하여 비로소 전국적인 양정수의 파악이 시도되었다는 점 등이 그 성과로 평가된다. 그리고 왕권과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관계가 얽힌 군역문제 해결에 있어서 지배층이 약간 양보하면서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영조의 치적 이외에도 1725년에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형살(刑殺)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1774년 사문(私門)의 용형(用刑)도 엄금하였다. 또한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영조는 그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함에서 오는 심적 갈등이 심한데다가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와 심지어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마침내는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신란까지 겪었다. 이런 환경 탓인지는 모르나 영조는 때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성격장애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자녀에 따라 극단적인 애증을 나타낸 것이 이를 말하며 이것이 결국 사도세자의 울화병을 유발하고 부자간의 갈등을 초래했다고도 말해진다. 조정의 인사문제에서도 자신의 감정기복에 따라 사소한 실언을 문제삼아 심지어는 삼상(三相)을 일시에 파직시켰다가 다음날 바로 복직시키는 경우가 흔하였고,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런 인간적 결점이 몇 가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역경을 딛고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탕평에 의한 정국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치세의 시기부터 현저해지는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의 해소를 통해 민심을 추스르며,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영주(英主)였다.

1776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2. 정조의 생애와 업적

 

1) 정조의 즉위와 업적

정조(1752~1800) 조선 제22대왕으로 17761800년까지 24년간 재위하였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에 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右文之治)’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참상(參上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곧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사서·삼경 등의 당판서적(唐版書籍)의 수입 금지 조처도 이와 같이 자기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 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 增補東國文獻備考·국조보감 國朝寶鑑·대전통편 大典通編·문원보불 文苑??·동문휘고 同文彙考·규장전운 奎章全韻·오륜행실 五倫行實등이 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해 뒷날 홍재전서 弘齋全書(184100)로 간행되도록 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匡正)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건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이자,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다고 이해된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했을 뿐 아니라 예론(禮論)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해 왕권 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지닌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해 그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검서관들의 신분은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해 서얼통청운동(庶蘖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 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해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갔다.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여기서 인왕산을 중심으로 경아전(京衙典)이 주축이 된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인(委巷人)들이 귀족문학으로 성립되어온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해 그들만의 옥계시사(玉溪詩社)’를 결성하고, 공동시집인 풍요속선 風謠續選을 발간하는 등 성관(盛觀)을 이루어 중인문화의 원동력이 되고 뒷날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의 효시를 보게도 되었다.

정조대의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조선중화의식(朝鮮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조선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禮治)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해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고유문화현상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의 제반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것이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일성록 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 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 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였던 서학(西學)에 대해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해 사면해야 하는 갈등을 겪었다.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고종 때 장조로 추존됨) 또한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가 다시 융릉(隆陵)으로 올렸고, 용주사(龍珠寺)를 세워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완수하였다.

옛 수원 관아가 있던 화산에 융륭을 조성하면서 대신 팔달산 기슭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어머니의 회갑연을 화성 행궁에서 열었다. 권신(權臣)들의 뿌리가 강고한 서울에서 벗어나 신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적 구상을 가진 것이었다.

왕의 말을 (: 가르침)’로 표현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왕은 통치자일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해 모범을 보여 큰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였다. 조선이 성리학이념을 채택하고 우문정치(右文政治)’로 표현되는 문화정치를 표방한 지 400년만에 명실 부합한 전형적인 학자군주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100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 弘齋全書로 간행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18006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융릉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2) 규장각의 설치와 활용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 1776(정조 즉위년) 3,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 갔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의 건의로 일시 설치되었으나 폐지되었다. 1694(숙종 20)에 세조가 친히 쓴 奎章閣(규장각)’이라는 액자를 종정시(宗正寺)의 환장각(煥章閣)에 봉안하고 역대 국왕의 어필·어제를 보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는 규장각의 설치를 유신들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면서 외척 및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설립되었다. 이를테면 단순한 서고의 구실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 정조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首建)하였다.”고 설각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창설한 뒤 우선 영조의 어필·어제를 봉안하는 각을 창덕궁 내에 세워 봉모당(奉謨堂)에 모시고, 사무 청사인 이문원(?文院) 등을 내각으로 하였다.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병합해 외각으로 했고, 활자를 새로이 만들어 관리를 맡는 일과 편서·간서를 내각에 맡겼다. 1781년에 청사를 모든 관청 중 가장 광활하다는 옛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으며,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를 신축해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서고(西庫 : 조선본 보관열고관(閱古觀 : 중국본 보관개유와(皆有窩 : 중국관 보관) 등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 보관하게 하였다.

장서는 청나라에서 구입한 1만여 권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포함, 8만여 권을 헤아렸다. 이것이 현재 총 3만여 권에 달하는 현재 규장각 도서의 원류이다. 규장각의 주합루(宙合樓)는 당조(當朝)의 어필(어진인장 등을 보관하며, 봉모당은 열조의 어필·어제 등을 봉안하였다. 열고관·개유와는 내각과 함께 서고로서, 이문원은 사무 청사의 구실을 하였다. 구교서관(舊校書館)은 외각과 열조의 어제·서적 등을 보관하는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구성되었다.

관원으로 제학 2, 직제학 2, 직각(直閣) 1, 대교(待敎) 1인 외에 검서관(檢書官) 4인이 있었다. 각신들은 삼사보다도 오히려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정되었다. 1품으로부터 참하관에 이르는 노소 6인과 실무담당으로 검서관 4인을 두었다. 내각에는 검서관 외에 사자관 8인 등이 있었고, 다시 이속으로 70인이 있었으며, 외각에도 이속 20여 인을 두었다. 규모도 1781년까지 계속 정비되어갔는데,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기도 하였다.

규장각의 기능은 점차 확대되어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근시(近侍)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특히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매월 두 차례씩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따라서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세력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규장각의 도서 출판의 기능을 위해 예조 소속의 출판 전단 관서이던 교서관을 규장각의 속사(屬司)로 삼고, 정유자(丁酉字, 1777), 한구자(韓構字, 1782), 생생자(生生字, 1792), 정리자(整理字, 1795) 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수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간행하였다. 많은 양의 국내외 도서가 수집·간행됨에 따라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화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첫 번째 분류 목록은 1781(정조 5) 3만여 권의 중국 책을 대상으로 서호수(徐浩修)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를 규장총목 奎章總目이라 하며 이것이 오늘날 규장각도서의 시원(始源)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 책들만을 분류한 것이 누판고 鏤板考群書標記 군서표기이다. 각신들의 권한으로 시신(侍臣)은 승지 이상으로 대우를 받아 당직을 하면 아침 저녁으로 왕에게 문안했으며, 신하와 왕이 대화할 때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특히, 1781년부터는 일기를 기록해 내각일력 內閣日曆)이라 했는데, 승정원일기이상으로 상세하였다. 또한, 2년 뒤부터는 각신이 매일의 정령형상(政令刑賞) 등을 기록, 왕이 친히 첨삭한 뒤에 등사하였다. 1779년에는 새로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서얼출신 임과(?)로 했는데, 국초 이래로 재주와 학문은 뛰어나도 입신의 길이 막혀 있었던 서얼들에게는 큰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 당하관의 소장관원 중 우수한 자로 뽑힌 초계문신(抄啓文臣)에게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치러 상벌을 내렸다. 각신은 초계문신 강제(講製)에 시관이 되어 일대의 문운을 좌우하였다. 또 실질적인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규장각에서 양성된 학자들은 정조대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차츰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된 것이다. 설립 이후 그대로 존속되어오던 규장각은 1868(고종 5)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창덕궁에서 이곳으로 옮겨지고 소장도서들도 이문원·집옥재(集玉齋시강원 등에 분산, 보관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궁내부에 두었다가 이듬 해 규장원으로 고쳐, 이때 한·중 두 나라의 도서와 각종 왕가 전보(傳寶)를 보관하였다. 그 뒤 1897(고종 34)에 다시 규장각으로 환원시켰다. 1908년에 근대적인 직제를 편성해 전모(典謨도서·기록·문서 등 4과가 사무를 집행하였다. 이 때 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 각 관서의 일기 및 등록과 정족(鼎足태백(太白오대(五臺적상(赤裳) 등의 사고 장서까지 관할하였다. 그 뒤 1910년에 이름이 없어지고 도서는 한 때 이왕직에 도서실을 두어 보관했으나, 이듬 해 조선총독부 취조국으로 넘어갔다. 이 때 넘어간 도서는 5,35310187, 각종 기록은 1730책에 달하였다. 그러나 1912년 총독부에 참사관실이 설치되어 도서 및 관련된 사무가 참사관실로 이관되었다. 1922년에 학무국으로, 이어 다시 1928년에서 1930년사이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는데, 이 때 15119권이 이 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일제가 규장각 도서를 보존한 것은 식민 통치를 위한 우리 나라 역사 연구에 이 자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창덕궁 안의 규장각 건물 가운데 서향각·주합루·부용정만 남기고, 그 밖의 열고관·개유와·서고·이문원·대유재(大酉齋소유재 등은 모두 헐리고 말았다. 이 책들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옛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건물)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규장각도서 중 국보급 자료 8,657책이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환도 후 서울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규장각 도서도 함께 옮겨졌다. 이 때 경복궁 회랑에 있던 교서관 소장 목판(木版) 17,800여 장이 함께 옮겨졌다. 그리고 도서관 안에 규장각 도서관리실을 따로 두어 규장각 도서의 관리를 맡게 했으며, 도서관 소속의 일반 고도서와 문고본 도서 등을 규장각도 서로 편입, 20만 권의 장서를 헤아리게 되었다. 1990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의 보존·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독립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에 규장각도서가 신축건물로 이전했고, 19923월에 서울대학교 설치령이 개정되어 서울대학교규장각이라는 독립된 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하였다. 이로써 서울대학교규장각은 자료연구부·자료관리실·행정실의 부서를 갖추고 자료 보존·열람 기능 뿐만 아니라 국학 연구 기관으로서의 기능도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

규장각은 정조 때 다른 어느 기구보다도 넓고 중요한 비중을 가진 정치적·문화적 기구였다. 설립 당시 노론의 벽파 등 반대파를 숙청하며, 혁신정치를 위한 중추기구 내지는 기획 연구기관의 구실을 하였다. 원래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것을 모아두는 제도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고사를 따른다는 명분에 힘입어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정치적·문화적 기구를 마련했던 것이다. 교양 없는 인물로 문화와는 거리가 있던 홍국영(洪國榮)의 제거를 계기로, 문화 기관으로 충실해졌고, 각신의 권한도 날로 커져갔다. 설립 시기에는 정적 소탕을 주임무로 했던 규장각이 정세의 안정과 더불어 정치의 연구 및 기획 기관이 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소속된 각신은 승지 이상으로 왕과 친밀하였다. 밖으로는, 청나라 건륭 문화(乾隆文化)의 영향을 받아 내외 서적의 수집·편서·간서에 구심적 역할을 했으며, 우리 문화재의 정리와 보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3) 경제적 개혁정치 추진

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로 시행된 통공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 : 시전상인들만의 특권 상행위를 비시전상인들에게도 허용한 정책). 조선 후기에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일반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禁亂廛權 : 일반 시전상인들만의 상행위 활동을 배타적으로 제한한 권한)을 폐지하여 비시전계(非市廛系) 상인들의 활동을 용인한 상업정책이다.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 과정에서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이 부여되어 이들이 상품의 전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 일부 난전상인을 비롯한 일반상인들도 새로운 시전을 조직, 금난전권을 부여받아 18세기 경 도시의 상업계는 특권적 금난전권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금난전권의 강화는 도시의 경제 질서를 경화시키는 한편, 물가 상승을 초래하여 영세상인 및 수공업자 그리고 도시빈민층의 생계에 위협을 주었다. 그리고 금난전권을 소유한 특권상인들은 노론계열의 벌열(閥閱 : 국가에 공로가 많거나 관작 경력이 많은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정계 벌열의 발호에 경제적 후원자역을 맡고 있었으므로, 금난전권의 유지는 탕평정책의 시행에 있어서 저지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도시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를 보호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과 동시에 노론 벌열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남인 집권층의 정치적 배려가 진행되었다.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던 논의는 1764(영조 40)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금난전권을 제한하려는 통공발매의 이론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통공발매론은 1787(정조 11)에 일부 시행된바, 이를 정미통공(丁未通共)이라 한다. 그러나 통공발매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791년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에 의해서였다. 노론벌열에 대항하며 정조의 측근에서 탕평책의 시행을 지지하고 있던 그에 의하여 시행된 이 상업정책을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 부른다. 이로써, 전통적인 육의전 상인을 제외한 일반 시전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금난전권은 혁파되었으며, 도시내의 일반상인들은 금난전권의 저촉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신해통공은 1794년에 실시된 갑인통공(甲寅通共)을 통해 재확인되었다. 통공정책이 실시된 이후 금난전권을 상실한 일반시전들은 금난전권을 다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거나, 아직도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는 육의전 속에 포함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세도정권 시기에 이르러 세도정권의 반동성에 편승해서 한때 금난전권을 다시 인정받은 사례도 있었지만, 통공발매 정책은 그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시전상인들이 통공발매 정책의 철폐를 요구한 것은 국가에서 그들에게 계속 각종 잡역의 부담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금난전권을 통한 특권적 이익의 확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해통공을 통하여 확인된 통공발매 정책의 시행으로 조선 후기 도시상업의 전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신해통공은 신흥상인자본이 시전제도와 같은 보수적·특권적·봉건적 상업조직의 구각을 타파하고, 당시 사회경제적 요구를 관철하여 상업 발전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는 봉건정부가 종래의 특권적 시전 체제로서는 새로운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사상인(私商人)의 활동을 더 이상 저지할 수 없는 한계에 달했음을 나타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는 준론(峻論 : 淸流를 자처하며 사대부의 의리와 명예 및 절개를 숭상하려는 노론계의 논리) 중심의 탕평책을 수행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 아래 진행된 경제개혁 정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을 통해 도시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가 보호받을 수 있었고, 상업의 발전이 촉진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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