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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출판/멋진문장들

이호철 선생님을 추모하며

by 똥이아빠 2016.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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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문구 선생님이 쓰신 글을 옮긴 것입니다.

 

이호철 선생은 옛날에 덕주 고을의 읍이었던 함경남도 원산시 현동의 한 전주이씨네 가문을 빌려서 이 세상에 왔다.

동네 사람들은 동네 이름 현동을 그전처럼 그저 전산리라고 이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전산리는 산을 보면서 사는 마을이란 뜻인 견산리의 와음일 뿐더러 견산리의 볼 견 자야말로 현동의 나타날 현 자이면서 보일 현자이기도 하니 둘러치나 메치나 장 그 말이 그 말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면 무슨 산을 보면서 사는 마을이었기에 전산리로 부르기를 그리 좋아하였던가.

, 지금에야 생각이 난다. 그날은 마가을비가 내렸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나는 저녁답에 혼자 비를 맞으며 돌아오고 있었다. 지금 아무리 머릿속을 짜내어도 무슨 이유로 그때 그렇게 혼자만 늦게 돌아오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확실한 사실은 학교에서 혼자 나올 때부터 이미 나는 '큰산'이 안 보일 것이라는 예상으로 쓸쓸해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 패연하게 비가 쏟아지는 날은 으레 '큰산'은 비에 깝북 가려진다.(......)

우리 마을 서쪽 멀리 청빛의 마식령 줄기가 가로 뻗어갔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큰산'이라고 불렀다. 내 경우 이 '큰산'은 그곳에 그 모습으로 그렇게 있다는 것만으로 항상 나의 존재의, 나를 둘러싼 모든 균형의 어떤 근원을 떠받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뒤 가장 먼저 익숙해진 것은 어머니의 젖가슴이었겠지만, 두번째로 익숙해진 것은 그 '큰산'이었을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우리 집에서 정면으로 건너다보이던 그 '큰산'. 문만 열면 서쪽 하늘 끝에 웅장하게 덩더룻이 솟아 있던 그 청빛 '큰산'. 그 큰산에서부터 산과 골짜기들이 곤두박질을 치듯이 내려오다가 골짜기 하나가 서서히 길게 뻗으면서 갑자기 흰 치맛자락 펴듯이 큰 내를 이루며 내려오는 가에 미루나무숲이 우거지고, 우리 마을이 앉아 있다.(......)

그러나 그 달구지꾼들과 헤어져 마을로 들어가는 한길로 혼자 꺾이면서, 비로소 나는 저녁답과 비를, 그리고 '큰산'이 안 보이는 쓸쓸함을 분명하게 의식했다. , 그때의 그 분명하던 의식! 그리고 그 쓸쓸함!

바람 한점 없이 패연하게 쏟아지는 빗속에, 온누리는 음산하고 오로지 싸늘할 뿐이었다. 천지에 들리는 것은 지척지척 비 내리는 소리 뿐이었다. , 그 아득함! 아득함! 그 비 내리는 소리도, 귀를 곤두세워 빗소리를 의식하면서 듣자고 해야, 밭 가운데 여기저기 세워놓은 수숫대 무더기에 비꼬치 듣는 소리로 구체적으로 들릴 뿐이지, 그냥 멍청한 귀에는 그 빗소리가 그저 그렇게 낮은 가락의 그 무슨 하늘과 땅의 둔탁한 울림 소리 같은 것으로, '큰산'을 잃어버린 허공 같은 소리로만 들리던 것이었다.

 

선생의 수많은 단편 가운데서도 나는 이 '큰산'을 늘 대표작으로 꼽고 있지만, '큰산'에 재생된 '큰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동네가 곧 '전산마을'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지명의 고개를 넘은 뒤에도 이 고향 마을을 못내 못 잊어 마침내 견산으로 자호하기에 이르렀다. 소인 묵객이 자기의 생장지에 있는 자연물에서 산, , , 곡 자를 따거나, 그 자연물에 곁들였던 공작물에서 당, , , 정 자를 가져와 스스로 호를 지었던 것은 아득히 오래된 그리고 아주 예사로운 풍속 가운데의 하나였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선생의 아호 견산은 전산마을에서 보였던 '큰산'이 여느 큰산이 아니었던 것과 한가지로 견산 또한 예사 아호가 아닐 것이었다. 앞에 길게 인용한 '큰산'의 일절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전산마을에서 보였던 '큰산'이야말로 실향 생활 40년 동안 선생의 혼과 삶과 글의 '근원을 떠받들어주고 있었던' 균형의 추임과 아울러, 어머니의 젖가슴에 이어서 두번째로 익숙해진 추상화된 부성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우리의 현대문학사와 그 열전에서 장이 다른 '큰산'이다. 큰산은 비탈지고 가파르고 위험한 산(험산)이 아니다. 어디서 우러러도 정면으로 보이는 높은 산(고산)이며, 다가갈수록 아득해 보이는 먼 산(운산)이며, 텃새와 철새가 함께 깃드는 깊은 산(심산)이며, 수목과 수원과 밀원이 넉넉한 청빛의 산(청산)인 것이다.

선생이 전산리에서 어머니의 젖가슴 다음으로 익숙했던 '큰산'을 그대로 둔 채 남하하고도 '큰산을 잃어버린 허공 같은 소리'에 가위눌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선생이 피난선에 의지하여 혈혈 단신으로 경황없이 원산항을 떠나면서 선친에게 받았던 것은, 그 무렵에 북한에서 황소 한 필이 오고갈 정도로 큰돈이었던 남한돈 5,000환짜리 한닢이었다. 비록 난리통이긴 했으나 선생의 선친은 어쩌면 지레 분재하는 셈치고 우선 살림 밑천으로 황소부터 한 필 장만해준 폭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황소 한 필 값은 어디까지나 38선 이북땅의 시세였을 뿐이었고, 선생이 상륙한 부산바닥에서는 겨우 젖뗀 강아지나 한 마리 살까말까 한 잔돈푼에 불과한 것이었다.

허망한 일이었다. 허망하면 속도 허해지는지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가다가 보니 거리에 먹을 것 장수가 보였다. 선생은 콩죽장수 옆의 팥죽장수 앞에 옹송그리고 앉아서 시장기를 에웠다. 이북에서는 송아지 한 마리 값이 다 되는 700환으로 팥죽 한 그릇 값을 치르고 일어나니, 이번에는 머릿속이 허해져서 거리를 걸어도 지금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고 있는 길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처없이 가노라니 거리에 나앉은 책장수 하나가 언뜻 눈에 띄었다. 선생은 4권짜리 체호프선집을 냉큼 집어들었다. 한 권의 값이 이북의 송아지 한 마리 값이었지만 선생은 부잣집 가운뎃자식처럼 선뜻 나머지를 털어서 그 4권을 샀다. 그리고 이틑날부터 아침은 점심 때까지 참고, 점심은 해가 짧으니 거르고, 저녁은 잘 테니까 그만두고, 하면서 이른바 삼팔따라지의 몰골을 착실히 모양내게 되었다.

선생이 목숨이나 다름없이 여기며 지녀온 선친의 분재를 남한땅에 상륙하던 날로 죄다 처분하고 말았던 것은, 남인수가 피난민을 겨냥하여 열창했던 '굳세어라 금순아' 소리에 힘을 얻어서가 아니라, 선친의 황소보다 덩치가 훨씬 큰 추상화된 부성으로서의 '큰산', 패연하게 비가 쏟아지는 날은 으레 깝북 가려지던 그 '큰산', '큰산' 뿐아니라 그 '큰산'이 깝북 가려져서 안 보일 때의 그 쓸쓸함, 그 아득함까지도 온전하게 상속하여 깊숙이 품고 내려 온 든든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그 '큰산'을 품고 있음으로 하여 '큰산을 잃어버린 허공 같은 소리'에 가위눌리지 않을 수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생은 1955년에 단편소설 '탈향'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곧 문단의 일원이 되었다.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룬 부산바닥에 상륙하여 생전 처음으로 커피를 마셔보고, 그것도 예사롭게 마신 것이 아니라, 다방에서 처음 만난 황순원 선생이 자기에게는 설탕 맛으로나 마실 수 있는 쓰디쓴 커피를 시켜주고, 황선생께서는 빛깔도 좋고 양도 많아서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밀크를 청하여 자시는 바람에 커피나 밀크나 값이 한가지인 줄도 모르고 공연히 속으로 섭섭하여 그렇잖아도 쓴 커피를 씁쓰름한 입맛으로 더 쓰게 마셨던 팥죽따라지로서는, 그야말로 불세출의 장거이거나 파천황의 쾌거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생으로 하여금 일찍이 문단의 중앙이 되도록 숨어서 익찬을 한 것은 선생이 생어장어한 전산마을을 떠나면서 부성으로 상속했던 '큰산'이었고 선생을 요지부동의 중앙으로 세상이 다 알게 호성을 한 것은 선생이 힘써 낳아놓은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였겠는가. 옛사람의 언급에 '해야 할 것은 해야 할 때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선생은 이를 아름답게 실천해온 것이었다.

선생은 그동안 겨레와 국토의 분단을 아우르는 민족문학의 복원에 남유달리 오로지하여 무량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렇지만 모이그릇이나 다름없는 식량 배급표를 무기화하여 인주(김일성 부자)의 먹이감으로 인간을 부리고 잡는 봉건체제에서 양친과 네 명의 동기가 하루 세 끼 옥수수죽도 어려울 것을 근심한 나머지, 선생 스스로 그 혈육의 볼모가 되어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소리로 거간에 들어본 적은 없었다. 때문에 시국문학을 중시하는 축에서는 이를 두고 입질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닐 터이나, 옛날의 대문장 최치원도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을 수도 있고 곰이 한고조를 놀랠 수도 있다고 하였으니, 무릇 남이 뒷전에서 하는 이야기란 그만큼 가벼운 것이었다.

선생이 이산의 볼모가 되는 것을 경계한 데에는 필경 선생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이었다. 짐작하건대 그 이유는 아마도 인주의 역사 착오적인 무단통치와 미신적인 개인숭배 풍속을 한 5년간 몸소 착실히 겪어보고 남하한 까닭에, 그 볼모 노릇의 부질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과 함께 남하하여 나를 둘러싼 모든 균형의 어떤 근원을 떠받들어주고 있었던큰산의 존재도 그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었다. 선생 자신이 큰산을 품은 큰산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산을 좋아한다. 물론 큰 산을 좋아한다. 그것도 전산마을에서처럼 바라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찾아가서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은 사람들 등쌀에 산도 웬만한 산은 정부에서 몇 해씩 휴식년을 주어야 배겨날 성싶은 지경으로 고단한 신세가 되었지만, 선생이 산행을 시작할 무렵에는 일삼아서 산에 오르는 사람이 그렇게 지천은 아니었다.

선생의 산행은 호젓하고 단출하여 때로는 인업과 같고 때로는 행업과도 같았으나, 차츰 기내의 점점산이 별업과 다름없고 기외의 첩첩산이 문업과 비스름해짐에 따라 어느덧 무리를 이루기에 이르렀으니, 처음에는 한남철 박태순 방영웅 김정남 제씨가 동행을 하고 나중에는 이돈명 변형윤 송건호 이영희 김영덕 박현채 백낙청 조태일 김정남 제씨로 일행을 하여 그 무리에 거시기 산우회라는 명칭까지 붙이게 된 것이었다.

예로부터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이른 말은 산행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고전으로 듣는 말이지만, 선생의 노장적 관인대도와 남풍 북풍의 바람꽃을 한몸으로 아울러 온 금도야말로 곧 큰산을 품은 큰산의 웅자였던 것이다. 나라의 모양새 없는 모양새와 서민들의 서글픔을 슬퍼하여 과거를 조상하고 현실을 질타하는청금의 서슬조차 우련한 청빛으로 눅어 보이는 인자요산의 상징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는가. 비록 천리 되는 강이 없고 백리 되는 들이 없는 나라라고 하지만 산은 이렇게 만리 되는 큰산이 있었음이니,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 큰산을 바라보되 청산은 백운 밖에서 푸르고 푸르르며 백운은 청산 속에서 희고 희어아름다운 이치를 저마다 느끼면서 바라보아 마땅할 것이다.(1988)

 

이호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문구 선생님이 쓰신 글을 올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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