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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2001년27

2001년-창덕궁 2001년 12월 말에 동생네 가족, 친구네 가족과 함께 창덕궁에 가다. 겨울 고궁은 쓸쓸하면서 아름답다. 권력자들이 살았던 공간이 오늘에 남아 문화재가 되었지만, 이 공간을 만든 것은 당시의 백성, 민중들이었다. 권력자들은 다만 이 공간에 잠시 머물렀을 뿐, 백성들은 공간을 창조하고, 오늘까지 아름다움을 남기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민중의 아름다움 아닌가. 2011. 12. 18.
2001년-동기들 2001년 12월 중순. 동기들이 모였다. 규정이, 유덕이, 기영이, 요한이. 우리들은 군대 있을 때부터 가까운 사이로 지냈고, 이때까지도 가끔 만나서 우정을 돈독하게 했다. 모두 좋은 벗들이고, 개성이 뚜렷하며,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다만, 시절이 하 수상하고, 삶이 팍팍해서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어디에 살던, 자주 만나지 못해도 늘 좋은 동무로 살아갈 것이다. 2011. 12. 18.
2001년-속초 2001년 11월 말에 속초에 다녀오다. 강원도는 언제가도 좋다. 비교적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서해와는 다른, 호쾌한 바다가 거기 있고, 아직 망가지지 않은 자연이 있다. 이 땅의 산하가 급격히 망가지고 있는 지금, 보전해야 할 자연을 지키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바닷가 항구는 늘 신선하고, 신기하고, 인간의 노동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2011. 12. 18.
2001년-마라톤 똥이엄마 회사에서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가족들이 함께 참가해서 한강 옆을 달렸는데, 똥이도 함께 뛰었다. 가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상쾌하고, 운동하기 좋은 날이었다. 2011. 12. 18.
2001년-안면도 자연휴양림 안면도 자연휴양림에 갔다가 놀라운 걸 발견했다. 채광석 선생님의 시비가 그곳에 있었는데, 의외의 장소에 의외의 인물을 발견해서인지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채광석 선생의 고향이 안면도라는 걸 이때 알았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오마이뉴스에 관련 기사가 있었다. 87년 여름 폭주하는 택시에 운명을 달리한 故 채광석 시인. 사후 13년이 지나서야 그의 시비(詩碑)가 고향인 충남 서산군 안면도 휴양림 안에 세워진다. '시인 채광석 시비건립위원회'(공동위원장 신경림)는 오는 7월12일 오후 5시 안면읍 송언리 '충청남도휴양림'에서 시비 제막식을 갖고, 같은 날 저녁 7시부터는 태안군청 강당에서 '채광석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동료 문인들에겐 '희망과 용기를 싣고 새벽기관차처럼 어둠 속을 내 달리던.. 2011. 12. 17.
2011년-안면도 수덕사에서 안면도로 가다. 안면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니 섬이라고 하기라는 해도 다니기는 편하다. 안면도 가운데쯤 있는 방포수산에 들러 구경을 했다. 어느 곳에 가던, 먹을 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이곳도 안면도에서는 나름 이름이 있는 곳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작은 배들이 잇대어 섰고, 그 앞에는 갓잡아온 물고기를 파는 '회타운'이 있어서,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은 기분을 내서 '회 한접시'를 먹곤 한다. 2011. 12. 17.
2001년-수덕여관 수덕사에 가면, 이 집은 꼭 들러야 한다. 수덕여관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나혜석이 스님이 되고자 수덕사를 찾았다가 만공 스님에게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이 여관에 머물며 몇 년 동안 그림을 그렸고, 그런 나혜석을 찾았던 이응노가 나중에 이 집을 사서 한동안 기거했다. 집 앞 바위에는 이응노가 그리고 새긴 바위 작품이 그대로 있고, 오래된 추억처럼 초가지붕을 해마다 새것으로 갈아이던 집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역시 식당도 함께 운영해서,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던 수덕여관이 지금은 폐가가 되었다고 한다.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대체 이렇게 훌륭한 유산을 왜 이렇게 방치하고 있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때 찍은 사진이라도 있으니 다.. 2011. 12. 16.
2001년-수덕사 아산 고모님과 함께 수덕사에 가다. 어느 절을 가든, 절 이름을 따로 찍어놓거나 기록하지 않으면, 그 절이 어느 절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절은 비슷하기도 하다는 뜻이다. 특히 고찰들은 더욱 그런데, 고려, 신라, 조선으로 이어지는 건축 양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한 원인이 되지 않을까. 사실, 수덕사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수덕사 앞을 그렇게 분탕질을 해놓은 '자본'의 문제일 뿐. 나라 어디를 가도, 좀 유명하다는 절 앞은 온통 지저분한 상가와 음식점들이 점령했다. 또한 오래된 절도 경내에 새로운 건물을 자꾸 짓고 있어, 가보면 퍽 실망할 때가 많다. 수덕사도 예전에 갔을 때의 고즈넉함이 사라지고, 절앞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고, 경내도 새 건물을 짓느라 어수선했다. .. 2011. 12. 16.
2001년-현충사 처가집 근처에 있는 현충사에 갔다. 똥이는 태어나서 처음 가 보는 현충사다. 현충사는 너무 유명하고, 익숙해서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충무공이 박정희에 의해 과대포장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어쨌든 조선시대의 훌륭한 위인 가운데 한 분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별히 기억이 없는 걸로 보면, 나도 스무 살 때 가보고는 그후에 한 두번 정도 더 갔을 것이다. 내가 섰던 연못 다리 위에 아들이 선 사진을 보니, 지나간 시간이 새삼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이 사진도 벌써 10년 전 사진이 아니던가. 2011. 12. 15.
2001년-매형 생일 매형 생일을 맞아, 가족이 모두 모였다. 그래봐야 누나, 우리, 동생네 세 가족이다. 그래도 이렇게 모이면 마음이 든든하고 기쁘다. 가족의 중심은 아무래도 부모님인데, 우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그 중심이다. 부모가 있으면 가족이 모이기도 쉽고, 더 자주 모인다. 이때만 해도 가족들이 누구의 생일이면 다들 모여서 축하하고 점심도 함께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거의 모이지 않는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예전보다 살기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족의 소중함,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느낀다. 2011. 12. 15.
2001년-군대 모임 2001년 8월, 무더운 여름날, 양평에서 군대에 있을 때 인연을 맺었던 선임하사와 동기들이 모였다. 1984년에 전역했으니 이때만 해도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우리들 4월 군번은 다른 기수들과 다른 독특한 면이 있었다. 멀리까지 가자면, 우리 세대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다. 우리 나이대의 인구가 많다는 뜻이다. 결국, 군대에서도 우리는 '멘셰비키'가 되었고, 그 숫자만으로도 다른 기수를 압도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 부대에서, 우리 4월 군번은 중요한 보직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인사, 의무, 군수, 취사 등 권력을 쥔 자리에 있었고, 우리들끼리 단합도 잘 되는 편이어서, 어느 정도 고참이 되었을 때는, 우리 군번들만의 .. 2011. 12. 15.
2001년-큰처남 결혼식 2001년 8월에 큰처남이 결혼하다. 2011. 12. 12.
2001년-레프팅 2001년 7월. 회사 직원 전체가 강원도 동강으로 레프팅을 하러 갔다. 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진을 보니,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두들 재미있게 레프팅을 했던 기억이 난다. 2011. 12. 9.
2001년-회사에서 토요일에 회사를 찾아온 가족. 우리 회사의 좋은 점이, 이렇게 주말 근무를 할 때, 가족이 회사를 방문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나보다. 결국 이런 행동이 '근무태만'으로 찍혀서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데, 소위 '관리자'라는 사람이, 자신도 가족이 있으면서, 말도 안 되는 야비한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안철수연구소'에 다니는 것이 모멸스러웠다. 물론, 거의 모든 동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좋은 사람들로 만나고 있지만, '관리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문제는 '안철수연구소' 뿐만 아니라, 어느 회사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떤 기업이든,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자부심을 갖고, 가족을 회사로 불러 구경을 시켜.. 2011. 12. 9.
2001년-워크샵 회사에서 팀원들과 함께 산정호수에 있는 콘도로 워크샵을 갔다. 워크샵이니 업무의 연장이긴 하지만, 업무를 핑계로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바람을 쐬러 가도록 회사에서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워크샵을 가면, 직장에서 보던 동료들의 '사생활'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그들의 습관, 태도, 성격 등이 회사에서와는 또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술도 마시고, 유흥을 하게 되면 그런 모습은 좀 더 노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잠시 일탈을 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워크샵을 했다. 2011. 12. 6.
2001년-연세대 6월 초의 주말. 친구 가족과 함께 연세대학교에서 하는 공연을 구경하러 갔다. '통일음악회'로 되어 있는데,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제도권 밖에서 하는 이런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다. 민중가요도 많이 듣고, 여러 집회에도 참석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사회 참여에 동참하고자 노력했다. 아무도 알아주길 바라지 않지만,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1. 12. 6.
2001년-회사 6월 초의 사무실 책상 위. 무미건조한 사물들의 집합이지만, 이곳에서 7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고,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조직에서 어떤 사람은 나를 싫어했고, 어떤 사람은 나를 좋게 보았지만, 나 역시 그릇이 크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상당히 자유로운 조직의 성격 덕분에, 있는 동안에는 즐거운 직장생활을 했다. 2011. 12. 6.
2001년-창덕궁 6월 초에 창덕궁 다녀오다. 이렇게, 저렇게 서울에 있는 고궁은 그대로 다 몇 번씩은 다녀 본 것 같다. 갈 때마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그 모습 자체가 좋다. 오래된 건물을 보는 것도 좋고, 역사 속의 사건을 떠올리며 옛날을 상상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2011. 12. 6.
2001년-서울대병원 어머니를 모시고 혜화동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지병인 갑상선과 심장병의 정기검진이었고, 이때만 해도 건강하셨다. 모처럼 가족이 함께 한가로운 나들이를 했다. 삶이 고맙고 행복하다는 걸 느낄 때는 늘 시간이 많이 지나갔거나, 가까운 사람이 떠났을 때가 아닐까.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그런 깨달음이 많이 늦는다. 가족의 단란함을 즐기지 못하고, 뭔가 늘 초조하고, 불안한 심리상태로 시간을 헛되이 보낸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아이는 기다리지 않고 성장하고, 세월은 기다리지 않고 흘러간다. 2011. 12. 6.
2001년-둘째 처남 결혼식 2001년 5월 19일. 둘째 처남 결혼식. 선남선녀의 만남이다.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오랜만에 한국에 오셔서 고향도 방문하고, 고향의 지인들도 만나보셨다.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한 결혼식에는 처가댁 가족과 친지들, 우리 가족들이 참석해서 성황을 이뤘다. 물론 신부의 가족들도 많이 참석해서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2011. 11. 29.
2001년-오이도 2001년 5월. 동생 가족, 친구 가족과 함께 오이도에 가다. 따뜻한 봄날씨. 하늘도 화창하고 나들이 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바닷가 주변에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건물 모습은 단조롭고 지루했으며, 보기에 답답했다. 근처 음식점에서 꽃게탕을 먹었는데, 평범한 맛이었다. 2011. 11. 29.
2001년-부천 손가한정식 2001년 5월. 아내 후배와 함께 집 근처 한정식 집에서 식사. 요즘처럼 인터넷 블로그에 음식과 맛집 블로깅을 하는 사람이 많기 전이라, 음식점에 가서 사진 찍는 게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사진을 좀 많이 찍어둘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저 때만 해도 어머니가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을 하셨는데, 불과 10년만에 돌아가셨다. 더 잘 해드리지 못한 후회의 마음으로 늘 죄송하고, 마음이 아프다. 2011. 11. 29.
2001년-창덕궁(2/2) 화질이 낮은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는데, 화질은 좀 낮지만,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이 퍽 잘 했다는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 우리의 기억이 바래질 때도, 이렇게 사진으로 남은 기록은 우리의 기억도 되살리게 한다. 2011. 11. 28.
2001년-창덕궁(1/2) 2001년 5월, 창덕궁에 가다. 얼마 전, 2011년 가을에 다녀왔을 때와 비교하면 재미있을 듯. 역사에서 10년은 조족지혈도 안 되는 세월이다. 1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도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창덕궁 복원 공사로 건물이 몇 개 세워진 것이 새로워진 것일 뿐. 오래도록 이 자리에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1. 11. 28.
2001년-어린이날 어린이날, 집에서 가까운 부천중앙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어린이날이라고 행사를 했는데, 사람들이 꽤 많이 나왔다. 어디를 가든 어린이날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다녀서, 차를 가지고 바깥으로 나다니는 것이 고생이라, 집 근처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기들은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꼭 근사한 곳이 아니어도. 그래도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똥이가 좋아할 만한 이벤트를 찾아다녔는데, 부모로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는 증거겠다. 2011. 11. 28.
2001년-천안 나들이 2001년 4월에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중고로 구입했다. 지금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해상도도 낮고 기능도 거의 없는 단순한 디지털카메라지만, 필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혁명적인 변화였다. 그러고보니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한 지 10년이 넘었고, 그 사이에 디지털카메라의 발전은 대단했다. 이제 필름 카메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테고,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겠다. 디지털카메라는 앞으로도 발전할 가능성이 많은 기기이고, 사람들이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시간을 기록할테니, 그 정보의 양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안 나들이를 할 때 찍은 똥이 사진. 똥이는 자연스럽게 디지털 세대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2011. 11. 28.
2001년-에버랜드 겨울에는 나들이 하기 어려워 내내 집에서만 지내다 봄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깨졌던 똥이도 상처가 아물고, 4월에 봄나들이를 에버랜드로 갔다. 서너살부터 초등 4학년 정도까지는 에버랜드에 가면 아이가 즐거워한다. 늘 가는 에버랜드여서 새로운 감흥은 없지만, 아이가 즐거워하는 걸 보니 우리도 행복하다. 20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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