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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2001년

2001년-안면도 자연휴양림

by 똥이아빠 201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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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자연휴양림에 갔다가 놀라운 걸 발견했다.
채광석 선생님의 시비가 그곳에 있었는데, 의외의 장소에 의외의 인물을 발견해서인지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채광석 선생의 고향이 안면도라는 걸 이때 알았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오마이뉴스에 관련 기사가 있었다.


 87년 여름 폭주하는 택시에 운명을 달리한 故 채광석 시인. 사후 13년이 지나서야 그의 시비(詩碑)가 고향인 충남 서산군 안면도 휴양림 안에 세워진다.

'시인 채광석 시비건립위원회'(공동위원장 신경림)는 오는 7월12일 오후 5시 안면읍 송언리 '충청남도휴양림'에서 시비 제막식을 갖고, 같은 날 저녁 7시부터는 태안군청 강당에서 '채광석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동료 문인들에겐 '희망과 용기를 싣고 새벽기관차처럼 어둠 속을 내 달리던 사람'으로, '시대정신으로 무장된 올곧은 지식인의 한 표상'으로 기억되는 채광석 시인.

1948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난 채 시인은 68년 서울대 사대에 입학하면서부터 학원민주화 투쟁과 반독재 운동에 적극 참여한 열혈청년이었다. 75년에는 유신반대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긴급조치 9호 위반)로 2년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82년에는 '시와경제' 동인으로 있으면서 박노해를 발굴하기도 했다. 

83년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라는 평론으로 3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한 그는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이라 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결성과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86년엔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창립,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87년엔 민통련 문화예술분과위원장을 맡아 민족.민중문화의 대중화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해 7월12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39살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뜬, 어느 노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오지랖 넓은 문인' 채광석. 

4년이라는 짧은 집필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글을 썼고, 그것들을 라면박스에 고스란히 보관하는 '문사적 기질'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 덕분에 비록 사후(死後)지만 그의 글들은 <밧줄을 타며>(풀빛), <민족문학의 흐름>(한마당), <물길처럼 불길처럼>(청년사),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형성사) 등의 책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번 '채광석 시비 건립'을 후원하는 (사)민족문학작가회의의 한 관계자는 "이번 행사는 시비 제막행사로는 전례가 드물게 300여명의 문인이 대거 참석할 것"이라며 이는 "채광석 선생의 살아생전 삶을 짐작케 해주는 일 아니냐"라고 덧붙였다.

'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를 쓴 시인 김준태 씨는 채광석 시인을 '자기의 온몸을 내보일 줄 아는 투박스러우나, 솔직한 사람'이라 고 평했다. 미사여구와 휘황한 관념어로 언어를 권력화의 수단으로 삼는 작가들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2000년 오늘. 그의 투박하지만 솔직한 시편들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은 몇몇 사람들만의 바램이 아닐 것이다.

시비에 새겨질 시는 채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기다림'이다.

시비 제막과 더불어 채광석 시인을 주제로 쓴 시편들을 한데 모아 엮은 책 <그 사람, 채광석>도 곧 출판될 예정이다. 



 채광석 선생님은 작가 이전에 나에게 번역가로 먼저 인식되었다.
그가 남긴 번역물 가운데 '쟝글'은 대단한 작품이었고, 그것을 번역한 사람의 이름도 잊을 수 없었다. 안면도 자연휴양림에서 채광석 선생님을 만난 것은 뜻하지 않은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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