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멋진 하루!/1990년대28

1999년-동기 송년회 오랜만에 군대 동기들이 모여 송년회를 했다. 동기라고는 해도, 같은 부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무들은 다섯 명이고 동기의 친구들이 함께 어울렸다. 그리고, 이 때를 정점으로 동기들과의 모임은 이후에 거의 없었다. 가까이 있는 몇몇 동무들과는 만났지만 여럿이 만나는 모임은 없었는데, 각자의 삶이 그런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고 결혼하기 전에는 비교적 자주 만났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동기들과 만나는 기회가 더 어려워지는 건, 단지 생활이 팍팍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대부분 힘들고 고생스러운 과정의 연속이었다. 저 사진 속 인물들 가운데 한 친구는 스스로 세상을 버렸고, 다른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이 먹을수록 삶이, 인생이 만만치 않음.. 2011. 11. 23.
1999년-덕수궁 1999년 초겨울에 친구 가족과 함께 덕수궁에 갔다. 불과 한 달 전에 덕수궁을 다녀왔는데, 사진을 보니,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지금은 덕수궁 내부의 건물을 복원한 게 달라졌고, 표지판과 안내문 등이 조금 더 자세하고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 건물은 그대로다. 당연한 일이다. 고궁은 의구한데 사람만 달라질 뿐이다. 저 사진 속의 아이가 청소년이 되었으니. 2011. 11. 23.
1999년-강원도 여행 1999년 가을에 동생네 가족,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 여행을 했다. 설악산, 낙산사 등을 돌아보았는데, 그때는 낙산사가 불에 타 사라지기 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동해 일출도 보았고, 내설악 쪽으로도 들어갔다. 강원도 여행은 여러 번 했지만 갈 때마다 좋다. 2011. 11. 23.
1999년-미국여행 똥이가 돐이 되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뵈러 미국엘 다녀왔다. 지난번 첫 미국여행에서는 처제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번에는 직접 차를 운전해 오하이오에서 뉴욕까지 왔다. 차로 운전해서 약 14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주로 고속도로만 달려서 다양한 구경을 하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자연풍경도 상당히 다채롭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뉴욕에 비하면 오하이오는 변방이고 시골이긴 하지만 어딜 가나 초대형 쇼핑몰이 있고, 넓은 도로와 다양한 종류의 차를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멀쩡하게 서 있었는데, 나중에 텔레비전에서 쌍둥이 빌딩으로 비행기가 돌진하고, 빌딩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걸 보면서 무척 놀랐다. 똥이를 데리고 쇼핑몰에 갔더니, 미국 아주머니들이 하나같이 똥이를 보며 '큐.. 2011. 11. 23.
1999년-돐잔치 1999년 7월에 안철수연구소에 입사했다. 우리는 똥이가 태어나고 운이 틔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지금보다는 '인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원도 적었지만, 그만큼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온정적 면이 있었다. 안철수 대표를 안 것은 훨씬 전이었지만, 내가 안철수연구소에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개발자도 아니었고, 컴퓨터는 어느 정도 했지만 이렇다할 경력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철수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좋은 기회였고, 몇 년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돌잔치는 무역센터 건물에 있는 '바이킹뷔페'에서 했는데, 마침 회사하고 가까워서 안철수 대표와 직원들이 모두 참석해서 축하해주었다. 아들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영광이었다. 안철수연구소에서 일하던 기억은 즐겁고 행복했.. 2011. 11. 22.
1998년-석모도 여행 갓난 아이를 데리고, 한겨울에 강화도 옆의 석모도엘 갔다. 날씨는 염려했던 것보다 춥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석모도는 이때 가보고는 지금껏 못 가봤으니, 꽤 오래되었다. 그나마 차를 가지고 다녀서, 움직일 때는 차 안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고보면, 아이가 태어나서도 여기저기 참 많이 다녔다. 아기가 그런 것을 알 리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다니면 무의식 중에라도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진을 보니, 그때 생각이 조금 난다. 역시 기록은 소중하다. 2011. 11. 22.
1998년-똥이 백일 똥이가 백일이 되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동영상을 보니, 조금 더 잘 놀아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든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지나고 보면 많이 부족하고 잘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만큼 성장한 것일까, 세상을 조금 넓게 볼 수 있어서일까. 부모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부모가 되려면, 부모가 되기 위한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느끼는 게 나만은 아니리라. 2011. 11. 22.
1998년-똥이 1998년 9월에 아들이 태어났다. 임신하고 직장 생활하며 입덧도 심하게 하고, 배가 불러오면서 허리며 꼬리뼈 부분이 아파서 쩔쩔 매던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아이가 태어날 때, 생명의 탄생에 대한 경이와 함께 아내의 고생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은 아내의 출산 앞에서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할 것이리니. 결혼과 출산은 인생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들이고, 그 소중함은 비교할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생활 방식과 기준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좋은 부모는 처음부터 없겠지만, 노력하는 부모는 아이와 함께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2011. 11. 22.
1997년-에버랜드 주말에 에버랜드에 가다. 이날 일기를 보자. 1997년 10월 25일 토요일 오후에 애버랜드에 놀러갔다. 면숙 씨와 함께 셋이 애버랜드에서 신나게 놀았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오후에 잠깐 비가 내려서 기온이 많이 내려가 추웠다. 마침 옷을 든든히 입고 있어서 춥지는 않았고 놀이기구를 타고 집에서 가져간 김밥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조용필 콘서트도 보았다. 조용필 콘서트를 봤다는 내용이 있어 기억을 해봤지만, 기억 속에는 없다. 역시 기억을 믿을 것이 못 된다. 2011. 11. 22.
1997년-강원도 여행 가을에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이때의 기록도 일기에 남아 있다. 1997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 설악산으로 휴가여행을 떠났다. 지난해 신혼여행으로 장인, 장모님과 함께 찾은 이후 일년만에 다시 여행을 가는 것이다. 8일 오전에 집에서 출발해 영동 고속도로로 강릉을 향했다. 여행을 가면서 염두에 둔 것은 지난해 교통사고 사건을 신고하는 것이었다. 일년이 가깝도록 해결이 되지 않고 있어 속을 썪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순찰대 제7지구대가 있는 진부에 들러 사고 신고를 했다. 경찰은 가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토요일(11일)에 양쪽이 모두 만나도록 약속을 했다. 우리는 다시 강릉을 지나 주문진에 들러 오징어 회를 조금 사 가지고 속초에 있는 한화콘도에 도착했다. 가을의 맑고 투명한 하늘과 짙어가는 가.. 2011. 11. 22.
1997년-제주도 여행 아내와 함께 제주도 여행. 몇 해 전 혼자 제주도에 왔다가 비 때문에 서둘러 떠난 이후, 정식으로 처음 오는 여행이다. 사진은 많지만, 사진만으로는 충분한 기록이 되지 못해서 일기를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일기가 있었다. 1997년 5월 1일 목요일 아침에 서둘러 일어나 준비를 했다. 동생이 차로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 비행기는 1시간 가량 늦게 제주도에 도착했다. 날씨는 매우 좋았다. 푸르고 맑은 하늘과 상쾌한 바람, 투명한 햇살이 서울과는 사뭇 다르다. 공항에서 여행사 사람이 나왔지만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 서귀포 가는 버스를 타고 신라호텔에서 내렸다. 중문단지 안에 있는 신라호텔은 국내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한다. 하루밤 자는 비용이 무려 27만원 정도라고 하니 엄청난 가격이다. 호텔에서 방.. 2011. 11. 22.
1997년-에버랜드 에버랜드에 가다. 결혼하고도 처음이지만, 태어나서 처음가는 에버랜드다.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고는 해마다 연간 회원권을 가족단위로 끊어서 다닐 만큼 몇 해 많이 다녔는데, 에버랜드가 좋아서라기 보다는-사실, 싫어한다-다닐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에버랜드는 발을 끊었다. 2011. 11. 22.
1997년-전북 여행 1997년 봄. 아내와 둘이 전라북도 일대를 여행했다. 백양사, 강천사, 회문산 지구 일대를 다녔는데,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지금처럼 디지털 카메라였다면 훨씬 많은 사진이 있었을텐데. 여행의 기록은 소중하다. 우리는 과거를 거의 잊고 살아가는데, 그나마 남는 것은 글이던 사진이던 기록일 뿐이다. 기록이 없다면, 우리의 기억도, 우리의 존재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일기를 찾아보니, 1997년 1월부터 3월까지의 일기가 사라졌다. 4월부터는 파일이 살아 있는데, 하드디스크를 여러 번 교체하는 과정에서 파일에 문제가 생긴 듯 하다. 하여간, 내 블로그도 그렇고, 내 인생도 그렇고, 삶의 전환점은 결혼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결혼식을 마치고 한 이 여행이 나의 첫 여행이 되겠다. 비록 자세한.. 2011. 11. 22.
1996년-신혼여행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미국에서 오신 장인, 장모님과 고모님을 모시고 갔다. 강남에서 오후에 출발해 대관령을 넘어갔는데, 대관령을 넘어가다 사고가 났다. 뒷차가 우리 차를 추월하려고 중앙선을 넘어가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는 바람에 우리 차의 왼쪽 옆부분을 들이받은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사고라. 경찰도 부르지 않고, 서로 합의를 하고 헤어졌는데, 무려 1년동안이나 고생을 했다. 그나마 차만 조금 부서지고 사람이 다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우리는 호텔과 콘도에 각각 여장을 풀었다. 우리는 속초와 설악산 일대를 구경하고,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요즘에는, 아니 우리가 결혼할 때도 신혼여행을 국내 여행으로 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을 듯 하다. 외국으로 신혼여행 가는 걸 당연하게 여.. 2011. 11. 22.
1996년-결혼식 결혼 한(또는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결혼은 인생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불투명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삶이었는데, 결혼을 하면서 그보다는 조금 안정이 되었다. 우리는 둘 다 만혼이었고, 부모님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의존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우리 둘이 결혼 준비를 했다. 내가 먼저 프로포즈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프로포즈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이러다 아내에게 혼나겠다.) 우리는 직접 청첩장을 만들고, 가구를 구입하러 다니고, 아파트를 계약하고,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결혼사진을 찍으러 덕수궁엘 가고, 잡다한 준비와 계약과 살림 장만을 했고, 강남의 어느 뷔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말하면 가슴아픈 사연들이 결혼.. 2011. 11. 22.
1990년대-미국여행 태어나서 처음, 우리나라를 벗어났다. 요즘은 어린 아이들도 해외에 자주 다니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나는 외국에 가보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살았다. 말로만 듣고, 영화,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서양, 그 가운데서도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라고 하는 미국엘 갔다. 80년대에 미국은 전두환 군부독재를 승인한 제국주의이자, 팍스아메리카나를 부르짖는 깡패국가였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미국 땅, 뉴욕에 발을 디뎠을 때, 가장 먼저 다르게 느낀 것은 독특한 냄새였다. 이국의 체취는 낯설었다. 그들이 이룩한 물질문명은 눈부셨고, 그 거대한 스케일에 위압당했다. 미국은, 다른나라에게는 제국주의 깡패였지만, 그들의 나라에서는 민주주의 국가였고, 문화 국가였다. 비록 가장 극적인 자본주의의 착취가 이루어지.. 2011. 11. 21.
1990년대-홀로서기모임 90년대 중반, 하이텔의 동호회 가운데 '홀로서기'라는 모임이 있었다. 공통점은 모두 미혼이라는 것과 대부분 30대라는 것. 단지 결혼하지 않은 30대라는 이유만으로 동호회가 구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긴 하지만, 이념이나 세계관과는 아무 관계없이 오직 친목을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들 외로웠을테고, 아닌 척 했지만 서로가 짝을 찾는 치열한 눈치싸움이 없었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저 사진 속에 미래에 아내가 될 사람도 함께 있는 걸 보면. 우연과 기회들이 모여 하나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 산행을 시작으로, 우리의 관계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2011. 11. 21.
1990년대-어머니 고희연 1994년 12월 3일. 어머니가 일흔살을 맞아 고희연을 했다. 가족들이 모였고, 친구들도 모였다. 누나 친구들이 많이 왔고, 내 동무들도 올 수 있는 동무들은 모두 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사진을 찍었다. 나는 아직 미혼이었고, 동생은 결혼을 했다. 어머니 친구들과 누나 친구들은 왜 아직 결혼을 안하냐고 성화였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내 동무들이 누나 친구들과 함께 놀아주어서 잔치 분위기가 좋았다. 이날 온 손님들은 모두 즐겁고 재미있게 놀다 간다고 했다. 동무들이 고맙다. 2011. 11. 20.
1990년대-한글과컴퓨터 나는 의 탄생을 알고 있는 소수에 속한다. 공병우 박사님이 계시던 '한글문화원' 건물 1층에 이찬진 씨와 그의 동료들이 '한글'을 열심히 개발하고 있을 때부터 드나들었으니 말이다. '한글'의 초기 베타버전부터 꾸준히 매번 베타버전을 테스트하고, 버그리포트를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사진 역시 '한글과 컴퓨터'가 잘 나가던 때의 사진이다. 그때 '한컴'은 '한글' 사용자들 가운데 고급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베타테스트와 버그리포트를 꾸준히 받아 관리하고 있었는데, 고급사용자들의 커뮤니티가 생기면서 '한컴'에서 지원을 해주었다. 이때는, '한글'을 비롯해 '훈민정음', '이야기' 등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사용자들의 노력이 상당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소프트웨어의 베타.. 2011. 11. 18.
1990년대-우예모임 91년부터 94년까지. 예전 독서회 친구들을 중심으로 '우예'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우예'는 '우리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문장에서 따왔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문화예술 공연을 보러 다녔다. 장르는 따로 없었고, 영화, 연극, 뮤지컬, 전시회 등을 다니며 문화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었고, 가끔 이렇게 산행도 하고, 놀이공원에도 다녔다. 이 모임은 하나같이 친구들이어서 나이, 성별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편하고, 자유로운 모임이었다. 살면서 어느 한 시기에 만난 좋은 친구들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 이 사진 속 인물들도 거의 연락이 끊겼고, 가운데 있는 동무 하나와 연락이 닿을 뿐이다. 모두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가난했지만, 우.. 2011. 11. 18.
1990년대-바른글 지리산종주 '바른글'에서 지리산 종주를 했다. 여성들이 많아 만만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나는 두 번째 지리산 종주였고, 첫 시도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8월 한여름이었지만 밤이 되면 덜덜 떨리만큼 지리산은 추웠다. 우리는 밤에 텐트를 치고 밥을 해먹으면서 2박 3일의 종주를 했는데, 정작 천왕봉까지 올라간 건 나 혼자였다. 천왕봉을 앞두고 모두들 바쁘다고 내려갔기 때문이다. 나는 천왕봉 아래에서 혼자 텐트를 치고 잠을 잤지만, 너무 추워서 새벽에 불을 피워놓고 아침을 맞았다. 혼자 천왕봉에 올라 아침해를 보고, 내려와 부산을 거쳐 제주도까지 혼자 갔다 왔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밤을 새워 아침에 도착한 제주는 우기여서 비가 많이 내렸다. 비 때문에 여행.. 2011. 11. 18.
1990년대-바른글 모임 1992년 무렵에 자유기고가로 일했다. 주로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매달 원고를 썼는데, 어떤 달에는 원고지로 800매 이상을 쓸 때도 있었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자유기고가들이 모여 '바른글을 위한 자유기고가 모임(바른글)'을 만들었는데,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명맥은 97년까지 이어졌지만, 회원 수는 많지 않았다. 이때 만난 동무들 가운데는 여전히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 둔 동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 동무 등 다양하다. 바른글 모임을 하면서 자극도 많이 받고, 배운 것도 많았다. 하지만 자유기고가로 사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원고료가 너무 낮았고, 먹고 살려면 극심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취재하고 글쓰는 일이 육체노동보다 쉬운 것 .. 2011. 11. 18.
1990년대-컴퓨터출판동호회 내가 컴퓨터를 처음 만진 때는 1989년이다. 우연한 기회에 컴퓨터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통신망에 접속할 수 있었다. 케텔에 이어 하이텔로 오면서, 몇 군데 동호회에서 활동을 했는데, 당시 가장 유명한 동호회는 OSC, 산사랑, 애니메이션, 바른통신모임, 컴퓨터출판동호회 등이었다. 이 가운데 컴퓨터출판동호회(DTP)는 창립 멤버와 운영진까지 했고, 내 직업과도 관련이 많아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참여했던 동호회였다. 당시에는 워드프로세서인 '한글'을 비롯해 '훈민정음' 등 전문 문서편집 프로그램이 나오던 때여서 문서편집에 관한 관심과 활동이 더욱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 우리는 국내 최초로 HP에서 수입한 레이저프린터와 스캐너 등을 공동구매하기도 했고, 세미나도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 무렵의 어.. 2011. 11. 17.
1990년대-출판사 91년 5월. 출판사 가족들과 야유회를 갔다. 출판사의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열심히, 최선을 다 했다. 일기를 쓰고 있어서 당시의 일기를 찾아보았다. 1991년 2월 19일 화요일 업무라고 할 것도 없는 나날이다. 긴장감이 없는 상태인데,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아침에 여민사와 학원에 들러 귀찮은(?) 일을 끝냈다. 책을 부담없이 만들어 낼 날이 언제쯤일까. 제작비에도 신경을 써야하고 광고도 못하는 형편이다. 그동안 내가 거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해왔는데, 경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나를 믿고 맡긴 형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투자한 돈도 상당한데, 내가 마치 실습비로 쓴 것같아서 더욱 미안하다. 이제는 조금 감각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는데, 여러가지로 상황이 어렵다. 일단 .. 2011. 11. 17.
1990년대-원덕개울 엊그제 김장을 함께 담근 양평 동무네 가족과 함께 개울로 천렵을 갔다. 사진처럼, 우리는 더운 여름날, 시원한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며 개도 잡고, 닭도 잡아서 맛있게 먹으며 더위를 잊고 있었다. 나는 내성적이고,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지만, 동무의 가족들과는 친형제처럼 지낸다. 내 마음만 그런지는 몰라도. 동무의 형제들도 나를 친동생이나 친형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어서 나는 동무네 집에 가는 길이 마치 시골의 내집에 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하지만, 이 사진은 우연히 남겨진 장면이지만, 이 사진 직후에 또 하나의 큰 슬픔이 밀려왔다. 김영록 선생님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동무의 집으로 온 것이다. 이때만 해도 휴대전화도 없고, 삐삐도 없어서 연락을 하려면 누군가의 집으로 해야 했다. 전화를 받고 황.. 2011. 11. 17.
1990년대-동무의 장례 그가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죽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병원에서 눈을 뜨지 못한 채, 뇌사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의 가족들도, 나도,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도 그의 죽음은 황망하고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갔다. 겨우 삼십 년을 살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일까. 그에게 삼십 년은 어떤 삶이었을까. 사람은 삼십 년을 살면 많은 것을 알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그때 나의 유일한 동무였으며,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무였다. 그는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주대학교 야간부를 다니고 있었다. 나처럼 그도 가난했고, 가난했지만 분명 희망은 있었다. 그는 똑똑했고,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외모도 출중했다. 그런 그가 죽었다. 사.. 2011. 11. 17.
1990년대-시민출판사 90년 봄 무렵. 용길이 형이 출판사를 시작했고, 나도 출근했다. 출판사의 구성원은 용길이 형의 지인들과 주로 독서회원들 가운데 용길이 형과 가깝거나, 문학 관련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날 개업식에도 김영록 선생님을 비롯해 독서회원들이 거의 다 참석했고, 용길이 형의 사업 관련 인물들도 참석했다. 원래 용길이형은 방산시장에서 옷감을 취급하는 장사를 했는데, 그 사업으로 상당히 성공했다. 하지만 용길이형은 문학에 깊이 마음을 두고 있었고, 세계일보사의 신춘문예에서 시가 당선되어 데뷔를 했다. 출판사는 작았다. 직원이라고 해야 나와 또 한 친구, 여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또 한 친구'는 시를 쓰고 몸이 불편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가 이른바 '순수시'를 쓴다는 것만으로 그를 싫어했다. 그 당시에 소위.. 2011. 11. 17.
1990년대-전등사 1980년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독서회, 책방, 군대, 잡지사, 공장, 노동조합, 문예운동, 소설, 단체활동 등을 80년대의 키워드로 꼽을 수 있겠다.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짧은 기간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도 일을 했다. 그때 '전국일용직노동자협의회'를 구성하고, 일용직 노동조합의 단일 조직을 만들기 위해 전국을 다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노가다'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고, 나름대로 논문도 써서 발표했다. 80년대가 지나고, 90년대가 되었어도 삶이 달라질리 없었다. 아니, 달라지긴 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90년대 역시 출판, 글쓰기, 인터넷 등을 중요 키워드로 쓸 수 있겠다. 90년에 강화도를 다녀 온.. 2011. 11. 1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