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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요소

by 똥이아빠 2021.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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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요소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장편 데뷔 작품. 영화감독의 데뷔작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가 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데뷔작이 곧 마지막 작품이 되는 감독이 많은 것도 영화만의 특이한 경우에 든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데뷔작은 흥행 여부보다는 작품성으로 평가받는 것이 감독에게는 더 유리한 경우가 많다. 물론 흥행과 작품성이 동시에 인정받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영화 제작은 많은 돈과 많은 인력이 필요한 '산업'이므로, 감독은 자기를 믿고 투자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데뷔작이다.

데뷔작이 성공했다고 해서 이후의 작품이 훌륭하다는 보장은 없고, 반대로 데뷔작이 흥행에 실패했어도 오히려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꾸준히 작품을 만드는 감독도 있다. 한국에서는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했지만, 이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봉준호 감독은 이제 한국은 물론, 세계 최고의 감독이 되었고, 그의 작품은 흥행과 작품성 모두 인정 받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지구를 지켜라'로 데뷔한 장준환 감독도 데뷔작이 흥행에 실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작품이 '저주받은 걸작'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고, 국제영화제에서는 상을 많이 받았다. 결국 '1987'로 흥행에 크게 성공하는 한편,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박찬욱 감독도 '달은...해가 꾸는 꿈'으로 데뷔했는데, 이 작품은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같은 작품으로 세계 최고 감독으로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데뷔작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건 매우 중요하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는 지금도 컬트무비의 시작이자 최고 작품으로 알려졌고, 이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작품은 자타가 인정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런 점에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범죄의 요소' 역시 매우 독특하고 놀라운 작품이어서, 이후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분위기나 이미지는 불안, 우울, 신경질, 몽환, 운명적 파탄 같은 세기말적 절망이다. 그의 작품 '멜랑꼴리아'는 제목부터 시작해 내용까지 극단의, 돌이킬 수 없는, 최종의 종말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우울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우울'이며, '우주적 우울'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극단적일 수 없다.

'범죄의 요소'는 감독의 데뷔작으로, 그의 영화언어의 원형이자 초기 발화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고고학적 자료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핵심 언어는 최면, 몽환, 살인, 소녀, 연쇄살인, 싸이코패스, 유럽, 추상성, 빗물 같은 것들인데, 이 작품은 프리츠 랑의 'M'에 대한 오마주이면서, 무엇보다 유럽 사회의 혼란과 고민, 사회문제, 유럽인들이 느끼는 존재론적 인식, 유럽 전후 불안과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갈등, 과거 식민지 국가들인 아프리카, 중동의 민중들이 밀려들어와 유럽 사회에 증폭되는 사회문제와 갈등, 역사적으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저지른 제3세계 민중에 대한 잔혹한 학살과 착취, 고고한 귀족처럼 행동하지만, 알고보면 싸이코패스였던 유럽의 모습 등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유럽'이라는 이미지를 영상 이미지로 구체화, 물질화해서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카프카의 작품에서 그리는 풍경과 매우 비슷하다. 카프카는 활자로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카프카의 풍경은 마치 짙은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윤곽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어슴프레하고 뿌연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활자(언어)로 독자의 의식 속에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영상보다 고도의 추상성을 갖는다. 문학작품에서 풍경을 묘사하는 것은 추상의 기호(활자)로 독자의 의식에 구체적 이미지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특성을 갖는다. 반면 영화는 영상 이미지를 직접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상의 이미지는 관객의 의식에서 재해석되어 새로운 이미지로 생성된다. 이 역시 활자로 이미지를 만드는 것 만큼 추상적이다.

이 작품 '범죄의 요소'가 일반적인 영화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인데, 거의 모든 영화는 영상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전달할 때, 관객이 눈으로 보는 이미지를 재해석해야 할 정도로 알레고리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감독이 의도해야 하는데, 대부분 그럴 필요가 없거나, 그렇게 영상 이미지에 알레고리를 만드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몇 감독은 영상 이미지를 만들 때, 자연스럽게 이미지의 알레고리가 생성된다. 이를테면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작품은 신과 인간의 갈등, 절대자에 대한 분노와 원한, 신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같은 알레고리를 작품에 담고 있고, 장면의 곳곳에 이런 은유를 심어 놓고 있다.

 

우리가 '좋은 영화'라고 말할 때, 그 영화는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알레고리가 풍부한 영화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범죄의 요소'는 좋은 영화의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이 감독의 재능이며, 감독의 세계관이자, 감독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철학적 태도임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작품을 들여다보자.

피셔는 형사다. 그는 유럽에서 돌아와 의사를 만난다. 그가 정신과 의사인지, 샤먼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피셔에게 최면을 걸고, 그가 겪었던 일을 모두 말해보라고 말한다. 피셔는 유럽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유럽에 살지 않고, 이집트의 카이로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피셔는 객관의 눈으로 유럽을 바라본다.

그가 추적하던 연쇄살인마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유럽으로 날아간다. 피셔가 유럽에 도착한 이후 비가 그치지 않는다. 진창과 수렁, 더럽고 지저분한 풍경인데 그 풍경조차도 뚜렷하지 않고 뭉게지고 모호하게 보인다. 더구나 영상 이미지는 밝은 노란색 한 가지로 보인다. 노란색은 불안과 초조, 두려움, 공포 같은 감정을 일으키거나 그것을 상징하고, 또한 몽환, 꿈, 악몽, 상상, 환상을 의미한다.

영화는 어느 정도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이야기' 즉 서사가 있어서 완전한 추상성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피셔가 따라가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은 뒤틀린다. 피셔는 연쇄살인범을 잡으려 스승 오스본을 찾아가고, 스승이 만든 범인의 추적 노트를 손에 넣지만, 그 노트가 바로 범인이 기록한 자신의 범행 기록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며, 그 노트의 내용을 따라 범인을 추적하던 피셔는 자신의 손으로 소녀를 살해한다. 

즉, 피셔가 잡으려는 살인범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피셔가 범인을 추적해서 발견한 것은 스승이 자살한 장면이고, 스승이 소녀 두 명을 살해했다는 증거 뿐이다. 그렇다면 스승이 연쇄살인마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연쇄살인마의 애인인 '킴'을 우연히(?) 만나지만, 그렇다고 연쇄살인마의 존재가 어딘가 있을 거라는 분명한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피셔가 찾는 살인마는 유럽 어딘가에 있지만, 그것이 자기의 경찰대학 스승인지, 아니면 바로 자기 자신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구분할 능력도 없게 되면서, 피셔는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에 놓인다.

 

관객은 피셔가 바라보는 풍경을 보게 된다. 노란색 하나로 보이는 사물과 풍경,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내리는 비, 수렁과 진창, 흘러내리는 빗물로 일그러져 왜곡되는 사물, 악몽을 꾸는 것 같은 불쾌하고 답답한 느낌을 피셔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객도 똑같이 느낀다.

이 기괴한 영상 이미지는 단지 클리셰로서의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기호'로 발화하고 있다. 즉, 카프카가 활자로 이미지를 생성하듯,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영상의 이미지를 '기호화'해서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영화는 사용하는 기호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동일한 '이미지'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회화적이다.

회화는 이미지로써 기호를 생성하는데, 가장 단적인 예로 미셸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들 수 있다.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활자(언어) 기호로 구조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의 회화 작품을 해체해 활자(언어 또는 사상)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이미지의 추상화 작업이다.

물론 회화는 활자(언어)로만 기호를 생성하지 않고, '이미지' 기호로도 재구성, 재생성할 수 있다. 문학작품이 활자(언어) 기호로 이미지를 생성할 뿐 아니라 활자 이미지로 재구성, 재생성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상 역시 활자 기호와 회화 이미지, 또 다른 영상 이미지로 재구성, 재생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지는 다른 기호의 '매개물'로 작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로도 기호로 작동하지만, 이미지는 다른 기호로 해석하는데 필요한 매개 수단으로도 훌륭한 기호인 것이다.

 

피셔는 자기가 연쇄살인마를 추적했던 지난 시간이 '현실'인지, '악몽'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비와 물의 이미지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리비도의 상징이다. 그는 꿈에서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고, 그가 발견한 것은 좁은 하수구에 갇혀 있는 떨고 있는 너구리였다. 너구리는 피셔의 상징이며, 오도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여전히 최면에서, 꿈에서,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피셔는 자신의 의식을 깨워줄 외부를 향해 말한다. '이제 깨어나고 싶소. 아직 거기 있는 거요.'라고.

피셔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풀지 못한 미제사건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고통을 느끼지만, 그가 바라보는 즉 유럽인이 아닌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유럽은 신성모독과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성이 사라지고 역겨운 리비도만 남아 있는 몰이성의 세계다. 그는 그곳에서 빠져나오고 싶지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괴롭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바라보는 당시의 유럽은 '범죄의 요소'에서 보이는 비 내리는 노란색 일그러진 풍경이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풍경 속에서 연쇄살인마(유럽)는 또 다시 희생자를 찾아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유럽의 시대정신을 영상 이미지라는 기호로 표현한 문제작이며, 감독의 데뷔작으로는 드물게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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