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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1970년대

아버지

by 똥이아빠 201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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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아버지 사진이다. 1912년에 태어나 60여년의 인생을 살다 간 남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세 명의 이복형들은 아버지를 좀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직업은 인쇄소 문선공이었고, 그 뒤에는 침술사였다. 문선공에서 침술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상당히 불가해하지만, 그의 삶이 실패한 인생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에게 본받을 것은 '한자를 5만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5만자의 한자를 알고 있다는 것은 지금으로보면 대단한 학식일 수도 있지만, 구슬도 꿰야 보배라고, 알고 있는 지식을 '학문'의 수준으로 연장하지 못한 것은 그가 '기능공'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전해 듣기로, 아버지의 선대는 집안이 부자였다고 했다. 평북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도 살았다고 하는데, 식민지시대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가 식민지시대에 순사 앞잡이였다는 말도 있는데, 어떤 형태로든 일본놈들에게 협조하고, 동포를 괴롭혔다면 민족반역자임에 틀림없다. 대단한 벼슬을 살지 않았다 해도 그것이 용서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아버지는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악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무능력했지만 악당이나 파렴치한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부모들이 저지른 친일부역을 변명하는 것을 보면서 심하게 비난한다. 내 부모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부모의 잘못을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대단한 부모도 없고, 친일의 구체적 증거도 없는 터라 사죄할 일까지는 없지만,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것같지는 않다.
어쨌든,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은 성장기 소년에게 큰 핸디캡이다. 물론 훌륭한 롤모델이 아닐 바에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어린 남자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배워야 할 지식과 행동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청년이 되기 전까지는 함께 있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지식과 정보가 없어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자책에 심하게 시달릴 때면, 좋은 아버지의 존재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모든 어린이에게는 좋은 부모가 있어야 한다. 가난과 부를 떠나, 좋은 부모의 존재는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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