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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만화를 읽다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by 똥이아빠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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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작가 : 김금숙

출판 : 서해문집

 

이 작품은 정철훈이 쓴 '소설 김알렉산드라'를 바탕으로 김금숙 작가가 창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남문화재단'과 '성남시'에서 지원하는 웹툰 작업의 하나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리즈를 '다음 웹툰'에 여러 작가가 연재하고 있다. 이 작품도 '다음 웹툰'에서 연재한 내용을 모두 볼 수 있다.

원작자인 정철훈은 1996년에 '김알렉산드라 평전(필담)'을 먼저 펴냈고, 이후 2009년 실천문학사에서 장편소설로도 발간했다.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는 특별한 존재로 알려졌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바롭스크 마르크스가 24번지에 있는 그의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 일하였다. 그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롭스키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하였다. 1918년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김알렉산드라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볼쉐비키였으며, 역시 한국인 최초로 레닌과 면담한 공산주의자이다.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시작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발발한 직후, 자생적-여기서 '자생적'이라는 단어는 온전히 독자적으로 조직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과 일본공산주의 활동의 영향을 조선의 진보지식인들도 알고 있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 으로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기로 보면,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기 전에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최초의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의 활동은 쏘련공산당에도 도움이 되었다.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는 조선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 하바롭스크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임시정부 그룹,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그룹,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그룹인데, 임시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와 결별해 민족주의의 길을 걷고, 만주 지역에서도 무장투쟁으로 나아간 그룹과 민족주의 계열로 갈라진다. 무장투쟁을 선택한 그룹은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공산주의와 협력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독립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반면 김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힘겹게 살아온 김알렉산드라의 아버지와 그녀 자신의 삶은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차별과 억울함을 당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조선의 독립은 물론, 인간 해방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된다.

김알렉산드라의 운명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닮았다. 로자 역시 유대인과 여성, 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로 활동했으며, 그의 이론과 의지는 레닌을 능가할 정도로 위대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두 여성 공산주의자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두 여성이 공산주의자로서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유능했고,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김알렉산드라가 나라를 잃은 조선의 가난한 노동자의 딸이었다면, 로자는 폴란드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김알렉산드라는 로자보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삶 자체가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이었고, 로자는 그가 의용대에게 암살당하기 전에 이미 세 권의 뛰어난 책을 쓸 정도로 훌륭한 지성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로 오래 활동하지 못했다. 김알렉산드라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기간이 불과 2년에 불과했고, 로자도 암살당할 때의 나이가 47세였다. 그럼에도 두 여성이 공산주의 역사에 남긴 족적과 의미는 훨씬 크다. 여성이 억압과 차별을 당하던 시기에,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고 유능하게 활동한 여성 공산주의자들이 많겠지만, 당시 한국에서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는 한국역사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기록해야 할 인물이다.

아래는 '시사저널'에 실린 내용으로, 김알렉산드라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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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인섭씨의 알렉산드라 김 전기 첫회로, 사형 장면과 유년 시절부터 10월혁명 전후 시기까지의 부분이다. 적 · 백군 내전 시기의 활동, 체포 및 재판 장면은 제217호에, 연해주 빨치산 조직표와 명단은 제218호에 싣는다<편집자>

 

 사형 1918년 9월(조선력으로 8월15일 추석) 피로 물든 것 같은 아무릎 강이 옆으로 흐르는 하바로프스크 공원. 높다란 모자를 쓰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입은 키 큰 칼므이크인들(칼뫼코브가 이끌던 코사크 부대의 부대원들)이 모인 가운데 백군 사형집행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지도자들로 소비에트 · 당 간부들, 그리고 우수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적군 병사들과 전에 이 공원에서 연주를 하였던 음악인들, 이만역 준투에 가담하였던 수십명의 소비에트 애국자들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였다. 칼므이크인 사형집행인들은 혁명가들의 눈을 흰헝겊 조각으로 가리고 절벽에서 총살한 후 아무르 강에다 집어던졌다. 그때 총살된 치쉰, 벨로우스, 네페로프 등 동지들 속에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동지도 있었다. 집행인이 알헥산드라의 눈을 가리자, 그는 눈에서 흰 천을 벗겨내고 선 다음과 같이 소리높여 이야기했다. “나는 35분간 연설할 권리가 있다. 나는 자기 조국을 훔치거나 배신한 자가 아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이며 조선의 혁명이다. 내 스스로 죽을 장소를 고르겠다.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라의 두 번째 남편 B.B. 오가이의 큰 딸 올가바실리예비치 오가이에 의해 알려졌다). 그는 천천히 todrr에 잠겨 열세 걸음을 걸었다. 무라비요프의 동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벽에 멈추어 서서 사형에 대한 공포의 기색도 없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몸을 돌렸다.

“존경하고 친애하는 동지들 남성들 여성들 노인과 젊은이들이여. 오늘 우리늬 적이 많은 우리의 애국자들과 나의 전우들과 그리고 나의 생명을 앗아가지만,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수행하던 과업은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의 후손들이여 ! 지금 내가 걸음은 바로 조선의 열세 개의 도입니다. 각각의 도에 공산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모든 장애 · 바람 · 폭풍을 극복하여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주며, 자본가들과 지주들에게는 죽음을 가져다 주는 기적의 꽃을 피워라. 조선 13도의 젊은이들이여, 그 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여라. 그것은 그대들의 자랑이 되리라. 여러분 모두는 우리의 후예들이 조선을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하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조선독립 만세 ! / 소비에트 만세 ! 볼셰비키당 만세 !/ 세계 혁명 만세 !”

 

총성이 울렸고,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의 시신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투쟁을 호소하던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아무르 강에 잠겼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의 대단함은 조선 청년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 대단함은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에게강한 인상을 주었고 우리의 적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칼므이크인 집행인 율리네스코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조선의 영웅이자 극동위원회의 위원이며 개화된 여성이었던 그는 죽었다. 전세계 근로자들의 자유를 위한 활동 때문에 사형집행인의 총 한방에 죽었다.”(선집《극동에서의 혁명》, 모스크바, 1923,160항 참조).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사, 소련공산당 고참당원, 우랄노동자동맹(1917)의 조직자, 재소 조선의 사회주의자 당원이었다.

 

유년시절 알렉산드라는 1888년 (3월1일께) 극동 연해주 수이푼의 포크롭스키 라이온(면)의 시넬니코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게 영리했고, 용감하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두 살 때인 1890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계모 밑에서 학대를 받다가, 다섯 살 때인 1893년 하얼빈의 아버지에게로 가 같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 페트로비치 김은 북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중국군사철도 건설 현장에서 한국어와 중국어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자이자 그들의 성공적인 투쟁의 지도자였다. 아버지 표트르 김은 사랑하는 딸 슈라(알렉산드라의 애칭)에게 늘 다음과 같이 얘기하곤 했다.“사랑하는 딸아, 네가 커서 일을 하게 될 때 나처럼 항상 노동자 편에 서서 일을 해야 한단다.”아홀살 때인 1897년 하얼빈 시에서 소학교에 다닐 때 그에게 커다란 슬픔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죽었던 것이다. 표트프 김이 죽자, 그를 존경하던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 수천의 노동자가 파업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버지가 죽은 뒤 알렉산드라는 폴안드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 스탄케배치의 집에서 살다가 열 살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오빠 추푸로프 페트로비치 김에게 갔다. 그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립 학교를 마쳤다. 그는 학교 도서과에서 체르니세프스키 · 게르첸 · 도브롤류보프 · 플레하노프 그리고 다른 혁명적 작가들의 저작을 공부하였다.

 

젊은 시절 열여섯살 때인 1904년 알렉산드라는 동창생인 폴란드인 마르크 아오시포비치 스탄케이비치에게 시집을 갔다. 이 일은 조선인 사회에 많은 소문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그가 외국인과 결혼한 최초의 조선인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는 무위도식에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인간이었다. 결국 스무살 때인 1908년 남편과 이론한 알렉산드라는 그 행에 태어난 아들 비야체슬라프 마르코비치를 데리고 하얼빈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스물한살 때인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러시아어 교사였던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오가이와 재혼했다. 1910년 두 번째 아들 보리스가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늘 혁명 활동을 꿈꾸었다. 남편 오가이는 아내를 가사에서 해방시켜 혁명 활동을 위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정치 활동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에 가담한 제정 러시아는 노동대중을 동원하였다. 도시와마을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 노인과 여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징집되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김병학이라는 비열한 청부업자가 있었다. 이 자는 선금으로 1만루블을 받고 조선인 노동자 1천여 명을 고용하여 우랄 지방의 나제즈진 벌목장으로 데려갔다. 하얼빈에서도 3천~4천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바로 이 나제즈진 벌목장에 동원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드라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고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판단한 것이다. 스물여섯살 때인 1914년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우랄 지역 노동자들의 통역을 자원해 벌목 현장으로 떠났다. 우랄 지역 노동자들은 아버지아 일했던 중국군사철도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도시 바깥으로 출입하거나서신 연락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중국인 용병 가운데서 뽑힌 경비병들이 노동자들을 감시했고, 파업이 일어날 경우 물자공급 중단, 심지어는 대량 학살까지 자행했다. 알렉산드라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사민당의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게 되어 그 당원이 되었다. 그는 볼셰비키파의 비합법적 저작물을 읽었으며, 그리하여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차를 체제타도 그리고 자본가와 지주 등 착취 계급을 박멸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수 있다고 더욱 굳게 확신했다. 알렉산드라는 일본의지배를 증오하는 젊은 조선인 애국자들이 볼셰비키 당원이 되기는 아직 이르지만, 그들로 일단의 정치 조직을 결성하는 일은 적적하다고 판단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때인 1917년 2월27일(신력으로 3월12일) 부르조아 민주혁명이 제정을 무너뜨렸다. 이 혁명의 결과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나타났다. 하나는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 확립을 지향하며 전쟁을 계속 수행하려는 멘셰비키와 사외혁명당이 이끄는 임시정부의 권력이었고, 또 하나는 전쟁을 중지하며‘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아래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을 일소하여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우랄을 비못한 각 지방에서도 2월혁명에 고무되어 대중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인 여성 알렉산드라는 1만여 명의 주민에게 계급투쟁과 민중해방운동을 호소하는 연설을 행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우리 5천 조선인 · 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늘부터 더 이상 제정러시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권력을 쥔 국가의 국민이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청부인들과 차르 권력 사이세 밎여진 불공정한 계약의 이행을 무조건 거부합니다. …” 그의 모든 말은 노동 대중의계급적 단결을 공고하게 하였고, 기업가들과 멘셰비키에 대한 적개심를 불러일으켰다. 이 날부터 전우랄에서 권력 쟁취를 위한 볼셰비키와 멘세비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서 가장 정력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많은 기업 · 공장 · 노동현장을 다니면서, 지하에 숨어 있었던 당의 사업을 합법화했고, 당세포들을 조직하였다.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을 권유하는 사업과 노동 조합에 당 세포를 조직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부행하였다. 1917년 3월게 볼셰비키 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는 중국인도 가입하여싸. 노동조합이나 지방 소비에트 회의, 볼세비키 지도자 선출을 위한 투표에서, 5천여 명이나 되는 조선인 · 중국인 노동자들읜 많은 투표권을 가졌으나, 러시아어를 몰랐기 때문에 항상 알렉산드라가 찬성표를 던지면 따라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우랄에서 알렉산드라 동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1917년 두 번이나 모스크바에 페테르부르그를 방문한였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무엇 때문에 그가 그곳을 다녀왔는지 관심 없었으나, 지금 추측컨대 그는 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여 레닌을 만났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또 누구를 만났으며, 어떠한 과제를 받았는지는 모른다. 1917년 7월에 알렉산드라는 옴스크로 가서 10일간 보냈다. 이 기간에 나는 그와 함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강령과 규약 그리고<동산당 선언>을 러시아어에서 조선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조선어로 불렀고 나는 받아 적었다. 알렉산드라는 우랄노동자동맹이라는 볼세비키 조직을 만들어내었고, 그후 극동으로 떠났다. 나는 그의 위임을 받아 당의 강령과 규약을 조선어로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시베리라의 여러 도시에서 사회주의 조직을 만들었다.

 

 10월혁명 전후의 활동 당시 조선인들사이에는 포크롭스키 라이노(면)출신 조선인 여성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청부인 김병학이 팔아넘긴 노동자들을 해방시켰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다. 모든 조신인들은 알렉산드라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반겼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이 조선인 마을에서 발행되던 조선인 신문 <조선인신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벌목자의 고통스러운 작업으로부터 수천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을 해방시킨 수에 우랄에서 돌아온 알겍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우리 편집국을 내방하였다. 조선인 볼세비키인 그는 남자들보다 더 용감했으며,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 나가도록 호소하고 있다.” 알렉산드라는 남편 오가이로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저명한 조선인 혁명가 이동휘가 자유 아무르 주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며, 사할린을 거쳐 일본으로 호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이동휘의 석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알렉산드라는 오성묵과 다른 이들과 함께, 러사아와 중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이민들과의 관계 설정에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는 볼세비키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활동하였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알겍산드라는 아무르 역(현재의 라조역)의 당조직가인 무라비요프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서, 1917년 10월18일(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지구(크라이) 당협의회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사회주의대혁명 승리 후에 하바로프스크에 극동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결성되자, 알렉산드라는 외교부장으로, 동시에 하바로프스크에 잇는 러시아사회주의노동당 한 조직의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 사실은 조선인 여성인 그가 러시아인 볼세비키들과 함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소비에트 극동 집행위훤회의 외교부장에 선출된 사실은, 극동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들에게는 대단한 기쁨이 되었으며, 또한 그들 사이에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드라는 조선인들에겍서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는데,이는 그가 그들을 솔직하게 대했개 때문이었으며, 그가 중국어를 자유로이 구사 할 수 있어 모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는 외교부장으로서 헝가리인 · 독일인 등 외국인에 대한 여권발급제도를 간소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그에게 고마워했다. 알렉산드라는 서른살 때인 1918년 2월(러시아의 구력으로는 3 · 1운동이 2월에 일어난 것으로 된다)에 일어난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따라 혁명가들의 회합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회합에는 이동휘 양기탁 모동열 이동녕 등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들과 조선과 중국과 극동에서 온 수십명의 혁명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회합에서는 조선 혁명운동의 정세와 장래 과제들을 토론하였다. 이 모임에서 알렉산드라는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입장에서 함렌파(이동휘, 김닙 혹은 김립), 평양그룹(유동렬, 양기탁) 그리고 경성그룹 (이동녕) 등 조선민족해방운동에 존재하는 파벌주의를 비판하였다. 그의 연설이 있은 후 사적인 간담회에서 모든 이들은 분파싸움을 중지하자고 약속하였다. 그 후 조선 민족해방운동 문제를 계속하여 토론하던 중 참석자들의 일부(이동녕과 그으 지지자)가 ‘정의당’이란ㄴ 이름의 민족해방조직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글나 다른 일부는 조선해방운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바꿀 것을 호소하였다. 3월28일 하바로프슼에서이동휘 유동열 이하녕 오성무(오성묵의 오기라고 여겨짐) 등이 한인사회당(조선인사회주의당)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조선혁명가들의 단결과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첫걸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은 알렉산드라가 민족해방투쟁에 관한 마르크스 이론에 얼마나 정통해 있었는가,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전환시키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실천적으로 훌륭하게 실현시켰는지 확고하게 말해 주고 있다.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비용를 할당받았다. 조직의 할동가 등은 현금 급룔ㄹ 받았고 <자유종>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였다. 군사학교가 설립되었다. 위훤회의 의장은 이동휘었다. 군사학교장 겸 군사부장은 유동렬, 부위원장은 오가이, 청년부 의장은 오성묵,<자유종>의 편집인은 김 립이었다. 나는 재정담당이었다.(계속)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이번 호 알렉산드라 김 전기 2부에는 적백내전 기간의 전투에서부터 체포되어 재판 받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소련당국에 알렉산드라 김의 전기를 제출하고 난 뒤, 이인섭씨는 당시 소련 정부 당국자로부터 주요 부분에 대한 보충 질의를 받게 된다. 이에 대한 이인섭씨의 답변 문서 가운데 특히 그가 알렉산드라 김과 관련한 자료를 추적하게 된 과정이 부속 기사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이인섭시 전기 이후 밝혀진 새로운 사실을 중심으로 알렉산드라 김의 가족과,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요인들을 작가 鄭棟柱씨가 분석했다. <편집자>

 

  시민전쟁 한인사회당 창설 1주일 뒤인 1918년 4월5일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국제 간섭군이 상륙했다 백위군이 봉기한 것이다. 시민전쟁이 시작됐다. 알렌산드라가 맨 먼저 무기를 들었다. 그는 영어·프랑스어·일본어·중국어·한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로 무장간섭군에 대한 정항을 호소하였다. 자국과 전세계 근로자들에 대한 호소와 계급 투쟁 호소, 그리고 조국을 수호하자고 외치는 전단을 썼다. 그는 선전 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였고, 각 지방으로 동지들을 파견하였는데, 중국인 순취우, 러시아인 벨로우스와B.골리온코 등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주민들을 적군으로 동원하는 일과, 사람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일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알렉산드라는 과?성이 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며 용감했다. 그는 시작한 모든 일을 끝까지 해내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고 동지들을 존중하였다. 항상 매우 열심히 일을 하여 동지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그들의 활동력을 끌어올렸다.

 

 한인사회당 당원들은 순서에 따라 의무적으로 전선으로 향하였다. 많은 노동자, 일용 농부, 어부들이 자원해서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전선으로 나아갔다. 조선 청년 1백명 이상이 우수리 전선에서 전사했으며, 조선인 적군 부대는 고립되어 싸운 게 아니라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싸웠다. 많은 조선인이 이만과 비야젬스키 역의 격렬한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 간섭군과 벌인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 중 반이상이 조선인이었다. 18년 9월초 빨치산 부대가 ‘붉은 강’의 후퇴선에 주둔했을 때 조선인들은 겨우 10명 남짓했다. 알렉산드라의 지휘아래 중국인 둥지 순취우는 중국인 독립부대를 조직하였고, 이 부대는 만주의 하오헤 지구와 비야젬스키 역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19년 9월 하바로프스크 시는 전면 포위되었다. 붉은 강까지 이르는 우수리 전선은 일본군·백위군·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 점령되었다. 일본군이 스바보드느이 시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르 시를 점령하고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메르쿨로프가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 군사철도와 하얼빈은 백위군 장군인 호르바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코사크 대장 세메노프는 치타를 지배하고 있었다.

 

 로프스크 시립공원 회의실에서 소비에트 및 당 활동가들의 회합이 열렸다. 이 회합에 소비에트의 아무르 주 집행위원회 의장인 무힌 동지가 참석하였다. 회의에서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전투 없이 철수할 것과 부대를 숲으로 이동해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하는 소비에트와 당 활동가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첫번째 그룹은 육로로 아무르 주와 보도이보를 거쳐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배로 아무르 주와 보도이보를 거쳐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배로 아무르 중와 몽고 증부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나가서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회합 참석자들 중 일부가 백군을 화약고로 유인하여 화약고를 폭파할 것과, 우리 부대가 아무르 철교를 건넌 후에 철교를 폭파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이 제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

 

“적을 죽이기 위해 주민에게 고통을 주면 안되다”

 알렉산드라는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말하는 동안 강당은 조용했고 사람들은 줄곧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지들, 우리는 시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철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에서 펄수한 뒤에 우리 적들이 거주하게 되겠지만 인민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만약 화약고를 우리가 폭파하면 적들은 죽이겠지만, 주민들에게 고통을 줄것이며, 건물로 부서지게 됩니다. 전투 없이 시에서 퇴각한다는 우리 의 의도는 무익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르 강의 철교는 극동의 장대한 건설물이자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것을 파괴하면 내일 우리가 다시 건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폭파해야 합니까.”

 

 알렉산드라의 제안에 따라 철교와 화약고는 파괴하지 않았다.  두번째 남편인 B.B. 오가이의 큰 딸 올가 바실리예브나의 말에 따르면, 오가이는 알렉산드라 김이 시를 떠나기 전에 아내에게 조선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가발로 조선 여자들의 머리 모양을 하여, 멀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에서 온 여자처럼 위장하라고 권하였다. 알렉산드라 김은 그 충고를 거절하였다. “소비에트 극동 집행위원회의 책임 간부로서 어떻게 그렇게 대중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알렌산드라 김은 오가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알렉산드라는 3백~4백명이나 되는 적국과 함께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하바로프스크를 떠났다. 이튿날 블라고베첸스크를 지나 거류지 예카테리노-니콜스크에 이르렀을 무렵 혁명을 배반한 아무르 소함대의 군함 두 척이 바론 코르프를 정지시키고 부장해제했다. 정박 통보가 없었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매수당한 바론 코르프흐 선장은 예카테리노-니콜스크측에 배를 넘기고 밤중에 도망하였다. 혁명의 배신자들에게 속은 승무원과 승객 들은 백군 코사크들에게 체포되었다.

 조선인들과 함께 체포된 알렉산드라는 학교 건물에 구금되었다. 내가 이 학교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체포된 조선인 중 한 사람이 내게 소리질렀다. “인섭아, 자네 어딜 가는가? 우리는 모두 여기 있네.” 이 말 때문에 나도 체포되었다. 나도 잡혀서 모두 함께 마당에 앉아 있었다. 김 립과 유돌렬이가 낙담하여 “우리는 보기 드문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알렉산드라는 “당신들은 정말 맹렬하게 일하지 않았는가. 직접 조선의 혁명을 보고 싶다. 괜찮지 않은가. 우리의 사업은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이룰 수 없다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이룰 것이며, 그들이 못해낸다면 손자 손녀들이 해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후손들의 힘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나, 인섭은 그 때 장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나는 연해주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나는 그것을 말릴 수 없지만, 당신에게 더 큰 규모의 일, 동반구에서의 넓은 활동 영역을 맡기겠다. …총알 하나는 단 한 사람을 죽이지만 한장의 삐라는 적의 모든 군사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 …나는 선전 삐라와 조선어로 번역한 정치문서를 조선으로 보내는 것이 훈련되지 못한 활동가들을 지휘하는 것보다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사흘간 우리들은 그와 함께 창고에 있으면서 파업을 하달받았다. 나는 그에게 맡겨준 일을 꼭 수행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체포된 지 나흘째 되던 날 알렉산드라는 다른 장소에 따로 구금되었다. 우리는 그 마음에 14일간 감금되어 있었다. 그 후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었다. 알렉산드라·타쉰·네페도프 등은 각각 따로 호송되었다. 우리를 호송해온 배는 3일간 하바로프스크 부두에 정박해 있었는데 그곳으로 주민 수천명이 몰려들었다. 부두는 일본군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체포된 러시아인 둥지들은 칼므이크인 백군 부대로 인도되어 시내로 호송되었다. 체포된 조선인 12명은 부두에 남았다. 코사크들은 우리 12명을 어떤 보상금이나 사례를 받고 일본군 손에 넘기려 하였다.

 

 이 12명 가운데 조선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싸우던 세 사람의 정치적 망명자가 있었다. 김 립, 이단열 그리고 나였는데 우리에게는 심각한 위험이 닥쳤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상 사태가 벌어졌다. 백군들이 일본군 소대장에게 우리 12명을 접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 때 일본군 소대장은 부두의 질서를 안정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에 바빠 백군의 제의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고 불쾌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는 여권을 검사해 일본이 발급한 것이 아니면 체포된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증명서를 제출하였다. 그것은 중국 여권이었다. 그러자 일본 소대장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지, 우리 여권을 발급받은 자가 어떻게 볼셰비키가 되겠는가.” 그리고 일본어로 백군들을 욕하였다. “바카 ! ” 백군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나는 일본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슬그머니 해안으로 내려가 중국인들 사이에 숨어버렸다. 남은 두 조선인은 러시아인 동지들이 감금된 곳으로 보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나중에 석방되었다.

 

 재판, 그리고 총살 백군들은 감옥에 격리수용되어 있던 알렉산드라 · 타쉰 · 네페도프 동지와, 당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다른 지도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알렉산드라는 법정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군사재판정을 공산주의 선전장으로, 적들을 고발하는 무대로 바꾸어 버렸다.

 군사재판장은 알렉산드라에게 “당신은 조선인이므로 러시아의 국사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을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당신을 석방하겠다”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분개하여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나는 조선인 혁명가로서, 만약 조선 인민이 러시아 불셰비키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달성한다면 조선 민족도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당신은 내가 조선 출신으로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으로 여기는가 본데, 나는 러시아 영내에서 태어나 자랐다. 적군 병사들과 함께 이 전쟁에 참가한 수백명의 조선인은 모두 노동자·농민, 조선 애국자들이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것이 조선 민족을 해방에 이르게 해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몇 달 후면 당신들은 만주에서, 조선에서, 극동 전역에서 손에 무기를 든 조선인들을 틀림없이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체포되었지만 내가 해온 혁명 사업은 어디서나 언제나 전개되고 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당신이 말하는 대로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나는 혁명을 배신하고 2천만 조선 민족 앞에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한 재판관이 “만약 여성으로서 당신이 재판관들에게 자기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하고 있다.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계급 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 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기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수 없다. …몇년 뒤에 극동에서 조선에서 중국에서 전세계에서 여성들이 남자들과 나란히 인간 사회의 모든 생활에 걸쳐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만약 이 세계의 억압받는 여성과 남성들이 자유를 위해서 봉기하여 승리를 거둔다면 전세계는 통일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그리고 사이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기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이다.”

 

 재판관들은 모두 알렉산드라가 인정하고 뉘우치도록 강요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짐승 같은 고문을 당하고 가슴과 얼굴에 흉측한 상처를 입었다. 사형 집행후 일본 영사 다쿠치는 사법기관에 알렉산드라의 총살에 관한 정보를 요청하였다. 이 일은, 적국인 일본 당국도 알렉산드라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의 활동에 대하여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사건 이후에 하바로프스크 주민들은 그 지역의 아무르 강에서 고기를 낚지 않았다고 한다(이 부분은 올가 바실리예비치 오가이가 이야기한 것임).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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