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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죽음, 절대 고독의 상황

by 똥이아빠 2015.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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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절대 고독의 상황


삶과 죽음의 경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쉽게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고,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일상에서는 쉽게 죽음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최근 몇 년 동안 상황이 많이 나빠지고 있지만, 그래도 안전이나 치안과 관련해서는 낙제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이 놓인 상황에 따라 안전함을 느끼는 정도는 매우 다를 수 있고, 조금 더 본질적으로 생각하면, 한 사회의 '안전'은 매우 계급적 이해관계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다 알듯이 한국에서 강남은 강북보다 안전하고 치안이 잘 유지되고 있다. 전국의 어떤 지역보다 지역주민이 관련된 범죄율이 낮으며,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통계로만 보면 강남 일대는 서울의 다른 지역에 비해 범죄 발생률이 높지만,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안전체감도는 높은 편이다.

이것은, 범죄가 일어나는 경향이 강남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인구 사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강남 주민의 거주 형태는 대부분 아파트이고, 아파트에 대한 보안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 거주민의 범죄율을 줄이는 효과를 낳고 있다.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한 이유는, 평범한 사람이 죽음에 맞닥뜨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일상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론을 통해 거의 매일 교통사고를 비롯해 갖가지 사고 소식을 듣고, 그런 사고로 인해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보고 듣는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이다.

잔인한 말 같지만, 살아나지 못할 상황이라면, 고통을 길게 느끼며 죽는 것보다는 가능한 짧은 시간에 죽는 것이 다행일 수 있다. 이 논리를 조금 연장하면, 불치병을 오래 앓는 사람에게 '안락사'나 '존엄사'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특수한 상황, 특별한 장소에서 죽음의 경계를 보다 확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극한 직업'처럼,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물론 그렇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특수한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전쟁 상황이다. 

전쟁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고, 구분할 수 없는 물리적 공간과 상황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전쟁터에 있는 군사나 시민은 죽음의 그림자를 늘 보면서 생활한다. 한 발의 폭탄이나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 한 발에도 목숨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지 그들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옆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총과 포탄을 쏘는 적과 마주해서 죽음의 공포를 겪었기 때문에, 그들이 설령 전쟁터를 벗어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해도 전쟁터에서 받은 충격의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PTSD(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를 앓는 군인이 많다는 것은, 전쟁터의 스트레스가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정서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듯 생명이 초 단위로 바뀔 수 있는 전쟁터의 참혹함과 공포를 제외하고, 특수한 상황에 놓이는 사람들 가운데 우주인과 산악인을 꼽을 수 있다. 

최근에 본 영화들 가운데 '그래비티'와 '에베레스트'를 살펴보고, 영화에서 발생한 죽음의 순간을 조금 깊고 진지하게 들여다 보자. 우주를 비행하는 우주인의 상태는 마치 물방울 안에 갇혀 있는 작은 생물과도 같다. 물방울이 터지면 곧바로 죽게 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말이다. 즉, 우주선 바깥은 우주인의 생명에 적대적인 환경이다.

우주선에 작은 고장이라도 생기면 곧바로 우주인의 생명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조금 오래 전에 나온 애니메이션 가운데 '메모리즈'가 있는데, 세 편의 옴니버스로 만든 이 애니메이션에서 첫번째 에피소드인 '플라스틱 장미'의 경우, 우주인이 구조작업을 위해 인공 행성에 들어갔다가 결국 행성이 파괴되면서 주인공이 우주공간에 떠돌게 되는 상황으로 끝난다.

'그래비티'에서 맷 코왈스키도 여주인공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끈을 풀고 우주로 날아간다. '에베레스트'에서는 정상에 올랐다 하산하는 과정에서 더그가 스스로 고리를 풀고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죽음이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맞이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행복한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밀려오고, 그것에 압도되어 합리적 판단이나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위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이 분명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를 볼 때, 인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매우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것이 '나의 죽음'과 '다른 사람의 죽음'을 비교하고, 그 비교를 통해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며, 효율적인가를 판단하고, '이타적'인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분명 뛰어난 이성을 가진 동물임에 틀림없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제목처럼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 겪는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대해 깊이 있게 천착해 보자는 것이었다. 

죽음을 선택했으되, 곧바로 죽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음으로 가는 과정과 시간 동안 그가 느끼고, 생각하고, 겪어야 하는 심리적 변화는 어떨까. 

우주 공간을 떠도는 '메모리즈'의 주인공, '그래비티'의 맷 코왈스키는 우주복에 있는 산소를 다 소모하면 질식해 죽게 될 것이다. 그보다 빠른 죽음을 원한다면 우주복을 벗어버리면 거의 곧바로 죽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좀 더 빠른 죽음을 위해 우주복을 벗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어도, 삶에 대한 애착은 본능이기 때문에, 가능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있기를 희망할 것이다. 그렇게 살아 있는 동안 우주인이 바라보는 우주의 절대 암흑과 멀리서 빛나는 행성과 항성들의 별빛만이 유일하게 그의 눈에 들어 올 것이고, 그의 머리에서는 과거의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 가족, 아내, 아이들, 부모, 형제, 친구들과 함께 했던 행복했던 시간과 경험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막막한 우주 공간이지만, 그는 가능한 현실을 인식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추억과 기억을 떠올릴 확률이 매우 높다.

또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에 두고,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겠지만, 어느 순간 그런 감정조차 극복하는 차분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 속에서, 그가 느끼는 절대 고독은 사형대 앞에 선 사형수의 감정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사형수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형대에서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 사형수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명확히 알고 있는 우주인의 경우,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겠지만, 그보다는 훨씬 이성적으로 죽음을 기다릴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느끼게 되는 것이 절대 고독 속의 공포와 두려움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과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죽음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산에서 조난을 당해 동료를 살리려고 스스로 밧줄을 푸는 경우나 낙오되어 서서히 얼어죽는 경우, 인간은 '이타적 죽음'을 선택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잘 설명하고 있지만, 인간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는 자신의 유전자가 더 잘 보호되기를 바라는 상황일 때를 말한다. 즉 자식을 위험에서 보호할 때가 그렇고,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희생으로 다수 또는 정의로운 일에 투신할 때다.

조난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나보다는 살아날 확률이 높은 동료가 있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스스로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것 역시 '이타적 죽음'이다.

다만, '이타적 죽음'을 선택했더라도 죽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나의 심리적 변화는 우주인의 경우처럼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해도, 그것은 삶에서 죽음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 마치 빛이 우주를 빠르게 날아가는 것처럼, 짧지만 빠른 시간에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추억하게 할 것이다.


안락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우주로 튕겨나간 우주인이 놓여 있는 막막한 상황이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에서 조난을 당해 생존의 희망이 없는 산악인을 생각하면서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 가슴 아픈 감정을 갖게 된다.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살아 있지만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떨까. 그들은 죽음 직전까지 무엇을 생각할까. 그것은 실제로 자신에게 닥치거나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감정과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무려 300명이 넘는 학생과 어른들이,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느꼈을 감정과 생각들을. 그것은 영상으로도 기록되어 있고, 문자로도 남았다. 삶에 대한 집착과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과 고백을. 

죽음을 앞두고 느꼈을 절대 고독은 그래서 '절대로 고독하지 않은' 외침이자 눈물겨운 고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들의 외침에 답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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