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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1980년대23

1980년대-23 공장에서 해고된 후, 다시 몇 개월 동안 문화운동단체-지금의 '민예총'-에서 무크지를 만들었다. 지금도 그 잡지를 가지고 있는데, 노동자를 위한 문화운동잡지로, 내용을 쉽게 만들어 많은 노동자들이 재미있게 보면서도 노동법이나 자본주의의 폐해에 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나오는 '작은책'의 전신이라고 보면 되겠다. 무크지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하면서 두 어번을 만들고 나서 빠져나와 지역에서 만드는 월간지 창간에 뛰어들었다. 자본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노인이었다. 잡지를 만드는 멤버들이 모두 아는 친구들이어서 일은 재미있게 했다. 하지만, 지역 언론, 특히 잡지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겨우 서너번 나오고 나서 재정난에.. 2011. 11. 16.
1980년대-22 1989년의 몇 달 동안 구로공단에 있는 도금공장엘 다녔다. 더 오래 다니고 싶었지만, 중간에 문제가 생겨 해고당하고 말았다. 함께 산을 오른 공장 동료들은 대부분 후배들이었는데,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소모임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눈치를 챈 공장측에 의해 해고당했다. 이 사진은 모두들 친해진 다음, 친목을 위해 소요산 산행을 했을 때이다. 도금공장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임금도 형편없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나이어린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저임금 속에서 오랜 시간 일했고,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공장에 다니면서 소설을 썼고, 도금공장을 소재로 단편을 따로 쓰기도 했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목적을 두고 공장에 취직을 했지만, 또한 생존을 위한 밥벌이기도.. 2011. 11. 14.
1980년대-21 1988년이나 1989년 무렵의 사진. 한가하게 바닷가에 놀러간 듯한 사진이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중요한 일을 가지고 내려갔다. 함께 공부하던 선배가 비합법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그를 따라 지방에 있는 노동운동조직의 실무자들을 만나러 내려가는 길에 따라간 것이다. 주로 마산과 창원 쪽을 다녔고,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이후 그 선배는 안기부에 잡혀 2년동안 감옥에 있었고, 나는 이때 이후에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사실 지금이야 그때의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써클활동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활동까지도 비장하게 만든 것은 바로 독재정권이었다. 반정부 활동이라면 무조건 탄압하는 독재정권의 속성으로,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 2011. 11. 13.
1980년대-20 1988년과 1989년 사이에 찍은 사진. 이 사진을 찍을 무렵, 중편소설 '하루'를 쓰고 있었다. 목표는 '제1회 전태일문학상'. 이 무렵, 구로공단에 있는 도금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공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새로운 공부모임을 시작했다. 독서회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공부모임이었고, 다섯 명 정도가 모여 일주일에 한 번 집중적으로 토론을 했다. 일주일 내내 책을 읽어서 목표한 내용을 다 읽고 이해하고 가야 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책을 읽어갈 수는 있었지만 내용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주로 경제학 관련 책들이었는데, '서양경제학논고', '한국농업의 이해', '변증법의 이해' 등등... 저 사진 속 책들을 보면, 소설책은 거의 없고, 대부분 사회과학 책인 걸 볼 수 있다. 끈으로 묶인 책들은.. 2011. 11. 13.
1980년대-19 사진을 보면, 87년 2월이다. 독서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때였는데, 절정과 동시에 후퇴기였다. 사진은 설날을 맞아 김영록 선생님 댁을 방문해 신년인사를 드리는 자리였고, 이 사진 속에는 당시 내가 좋아하던 여성도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독서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들이었고, 나도 고참에 해당하는 연배였으므로 후배들이 눈에 많이 띈다. 후배라고는 해도 모두 실력들이 출중해서 선배노릇 할 내용이 거의 없었다. 독서회를 떠나게 된 건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독서회만으로는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서회는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기는 했지만 체제 비판과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고, 또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도 못했으므로, 또 다른 변화가 필요했다. 따라.. 2011. 11. 13.
1980년대-18 1986년 가을, 추석 전후로 기억한다. 우리는 양평 동무네 집에서 먹고 자며 함께 지냈다. 신경림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동무들이 골방에 모여 술마치고 화투치며 밤을 새우기도 하고, 벼도 베고, 콩도 묶으면서 사랑채에서 보름도 넘게 식객이 되었다. 마침 오늘(11-11-12)도 동무네 집에서 김장을 함께 했다. 변함없는 가족들과의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아내와 아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지난 시간을 그리 잘못 살아온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무가 농사 지은 쌀을 즉석에서 도정해 한 포대를 주었다. 그 마음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운 쌀이다. 2011. 11. 12.
1980년대-17 1985년 8월. 양평 용문사 계곡으로 놀러갔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휙 다녀올 수 있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전철타고, 기차타고, 버스타고 몇 시간씩 가는 먼 곳이었다. 지금은 용문사까지 겨우 30-40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용문사는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역시 늘 함께 다니는 동무들과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녀석은 만화 그리던 동무인데, 지금은 만화 그리는 건 포기하고 미얀마에 유학 가 있다. 미얀마의 불교대학은 전액 국고장학생이어서 외국학생들도 완전 무료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용문사의 천 년 넘은 은행나무는 이때도 여전했고, 지금도 여전하다. 사람은 변하고 바뀌어도 나무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으니, 지구에서 위대한 존재는 나무가 분명하다. 어쨌거.. 2011. 11. 3.
1980년대-16 김영록 선생님의 도움으로 잡지사에 취직을 했다. 월간 '현대해양'. 얼마 전에 폐간을 했다고 들었다. 안국동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면접을 보러 간 날 시험을 봤다. 이력서만 내고 면접을 보는 것으로 입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는 시험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시험은 글쓰기, 즉 논술이었다. '한국의 바다'를 주제로 원고지 10매를 쓰라고 했다. 즉석에서 원고지를 받아 글을 썼다. 글의 내용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막히지 않고 곧바로 써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고,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번듯한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월간 현대해양은 한국에서도 보기 드문 바다전문 잡지였다. 당시 바다 전문잡지라야 전체 잡지 가운데 딱 두 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나마도 내용이나 수준은 형편없었다. 삼.. 2011. 11. 3.
1980년대-15 양평 사는 동무와 지리산 종주를 떠났다. 결론은, 중간에서 돌아왔다. 저질 체력에 무리한 산행으로 무릎 인대가 늘어난 것이다. 중간에 텐트를 치고 이틀을 묵었지만 무릎이 쉽게 낫지 않았다. 결국 첫번째 지리산 종주는 실패했다. 동무에게 무척 미안한 일이었다. 80년대 카메라도 거의 없던 시기에 이런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 일회용 카메라를 구입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011. 11. 3.
1980년대-14 시흥동에 헌책방인 '씨앗글방'을 열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책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라 책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고, 종로도서관에서 장소를 옮긴 독서회를 기반으로 독서회원도 빠르게 늘었다. 그들은 대게 노동자들이었으며 파편화되어 있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노동조합 활동이나 단순한 모임을 갖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나마 독서회는 공개적으로 '순수한 모임'을 지향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독서회원 가운데 노동자 회원들은 노동현실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고, 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들이 너무 '무식'하다는데 있었다. 우리는 독서회와 별개로 '검정고시 모임'을 따로 운영했고, 그 과정을 통해 여러 명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 2011. 11. 3.
1980년대-13 행당동 동무의 집에서 찍은 사진. 셋이 항상 몰려다니며 질리지도 않고 놀았다. 먹고 사는 문제는 늘 목구멍까지 차 올라 있었지만, 그래도 청춘의 한 때를 마냥 억압하기에는 우리는 철이 없었고, 이렇게 동무들이 너무 좋았다. 우리는 여행도 다니고,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젊은 한 때를 보냈다. 가지 않아도 될 군대를 갔지만, 가장 큰 행운은 이 동무들을 얻은 것이다. 2011. 11. 3.
1980년대-12 전역을 하고, 우리는 계속 만났을 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무가 되었다. 어리석지만 내가 가진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인데,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여러번의 선택이 있었지만 그리 잘못되거나 후회하지 않은 걸 보면, 자부심을 가져도 될 듯 하다. 군대 있을 때, 나는 몇 명의 선배와 동기를 마음으로 선택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들과 계속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다 이뤄진 건 아니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는 전역하고 몇 년 살지 못하고 급성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주 만나던 동기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만남이 뜸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진 속 동무들과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가깝다. 우리는 날마다 만나는 것도 부족해서 친구의 집에서 먹고.. 2011. 11. 2.
1980년대-11 김영록 선생님의 모습. 84년 10월에 전역을 하고, 다시 독서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김영록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김영록 선생님은 당시 한양아파트에 살고 계셨고, 헌책방에 우연히 들렀다가 독서회가 있다는 말씀을 듣고, 또 선생님께서도 흥미를 갖고 계셔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서회에 참석하시기 시작하셨는데, 그때가 83년 후반이거나 84년 초인 걸로 알고 있다. 김영록 선생님을 만난 것은 여러가지로 큰 행운이었다. 그때는 선생님, 스승님으로 모실만한, 본배우고 가르침을 구할만한 어른이 주변에 없었는데, 김영록 선생님께서 우리의 스승님이 되어주셨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시고, 세계 곳곳을 여행한 경험, 일제 강점기에 이미 대학공부를 하셨을만큼 지식인이었던 선생님께서 독서회에 참석하시자 독서회는 마치 날.. 2011. 11. 1.
1980년대-10 휴가 나와서 들른 씨앗글방에서 동무들을 만나다. 1982년 12월. 휴가를 나와도, 부대에 있어도 20대 때는 삶이 무거웠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도 삶이 무겁고, 우울하고, 나를 둘러싼 상황이 암울했다. 게다가 어리석기까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책읽기였다. 하숙집에서도, 집에서도, 부대에서도 늘 책을 읽었다. 새책을 살 여유가 없었기에, 헌책방에서 가져오거나 구입한 책들을 쌓아두고 닥치는대로 읽었다.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현실을 잠시 떠날 수 있고,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의 거의 모든 것은 책에서 배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겠다. 이 당시-70,80년대-가장 대중적인 책은 '문고본'이었다. 삼중당 문고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을유문고며, 심지어 .. 2011. 11. 1.
1980년대-09 흔치 않은 훈련 사진. 팀스피리트인지 동계훈련인지...일병 말, 상병 초쯤 되지 않았을까. 우리 부대는 전방 바로 뒤에 있는 포병부대라 훈련이 많았다. 평균 두 달에 한 번 정도. 일주일에 한 번 비상훈련은 아예 치지 않고도, 대대적인 훈련이 두 달에 한 번씩이다. 훈련이 싫다기 보다는, 훈련을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귀찮고 힘든 것이 싫다. 훈련도 대충하는 것이 아니고, 상황이 발생하는 시간-싸이렌이 울린다-부터 전쟁이 발생한 것으로 실제 상황처럼 일처리를 하게 된다. 부대에서 보직에 따라 소각할 서류, 물품의 분류와 관리부터 시작해 완전군장 준비, 군수행정에 필요한 서류 준비, 각종 현황판, 지도, 비밀문건 등 확보...전쟁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두꺼운 나무상자에 서류를 넣고, 트럭에.. 2011. 11. 1.
1980년대-08 나에게는 귀하고 뜻깊은 사진이다. 병장을 달고 훈련을 나가서 찍은 사진인데, 왼쪽의 인물은 나와 같은날 입대한 동기이자 군번이 3번 차이가 나고, 훈련소부터 쭉 함께 있었던, 그뿐 아니라, 나의 대부이자, 빛과 같은 존재였으며, 여전히 그리운 동무이기도 하다. 의무대에 있던 동기는, 사람이 너무 선하고 밝아서 그를 보고 있으며 마치 밝은 빛이 뿜어져나오는 듯 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 속에서도 빛나고, 사람을 끌어들이고, 늘 따뜻함이 느껴지는 사람. 동무와 비교하면 나는 늘 어둡고 우울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내가 그를 발견했을 때, 그에게서 나와는 전혀 다른, 빛과 따뜻함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동갑에 동기였지만 그는 나의 롤모델이었으며,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2011. 11. 1.
1980년대-07 군대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건 운이 좋은 경우다. 그때가 1980년대임을 생각한다면. 취사장 뒤쪽 공터에서 동기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재경이, 나, 대욱이, 규정이, 종식이, 기영이, 그리고 9월군번 고참인 이경영. 뜬금없이 이경영이 쌀바가지를 들고 서 있는 게 이상할지 모르지만, 고참이었던 이경영은 우리들과 상당히 친했다. 고참 가운데 '좋은 사람'이었던 이경영은 재주도 많았고, 사람도 좋았다. 이 사진에는 빠졌지만, 다음 사진에 나올 인물이 동기인 용수. 재경이는 고향인 안중에서 유지가 되었고, 대욱이는 고향인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규정이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종식이는 경찰이 되어 지금은 꽤 계급이 높다고 들었다. 기영이는 양평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이장을.. 2011. 10. 31.
1980년대-06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사수가 전역을 했다. 졸지에 끈 떨어진 강아지가 되어 구박덩어리가 되었는데, 직속 고참(지금은 '선임'이라고 하나보다)이 없는 설움을 그때부터 당했다. 논산훈련소 23연대. 훈련을 마치고 후반기교육도 없이 곧바로 춘천101보로 왔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팔려가길 기다렸는데, 주특기가 좋은 놈들은 일찍 보직 좋은 곳으로 팔려나가고, 나처럼 주특기도 없는 훈련병들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결국 일주일을 꽉 채우고, 트럭에 실려 깊은 산길을 구불구불 넘어 자대에 도착했다. 이때까지도 여전히 주특기는 받지 못한 상태. 자대로 출발하면서 급하게 받은 주특기가 960. 군수행정병이었다. 처음 소집 통지서를 받아 모인 원광공전 운동장부터 함께 온 동기는 딱 한 명. 그 친구.. 2011. 10. 31.
1980년대-05 나들이 나와 도시락을 먹는 사진. 하지만 놀러 나온 건 아니고, 동식이 형 아버님 묘소를 찾아 간 길이었다. 내 머리가 짧은 걸 보면 휴가 때인듯도 하다. 그렇다면 1983-4년 사이가 된다. 장소는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진이 있어 그날을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한 때는 형제처럼 가깝던 사이였지만, 서로 가는 길이 달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이 정확히 맞았다. 지금도 서로 잘 살고 있는 줄은 알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서로 바쁘기도 하고,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도 하고. 동식이 형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도 찾아뵙지 못해 죄송했다. 물론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연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남남처럼 지내지만, 그건 이복형제들도 마찬가지니까. 2011. 10. 31.
1980년대-04 사진만 보면 어디 멋진 곳에 놀러간 걸로 알만하겠다. 날짜는 선명한데, 내 기억과는 맞지 않는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거겠지... (친형같은) 형과 함께 소록도에 갔다. 단 둘이. 무슨 목적으로 갔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형의 뒤만 따라다녔는데,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에서 내려 걸어들어갔다. 한센병 환자들도 양성환자와 음성환자는 따로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는 음성환자의 집과 교회를 방문했다. 작고 낡은 스레트 지붕의 그 집은 여느 가정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집앞에 펼쳐진 파랗게 아름다운 남해 바다가 있어, 마치 별장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내 마음이 그렇게 편하고 느긋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마음이 좀 불편했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 께름칙하기도 했다... 2011. 10. 31.
1980년대-03 (친형은 아니지만 친형이나 다름없는)형과 함께 운영하던 헌책방에서 찍었다. 사진의 연도가 1989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사진은 뭔가 이상하다. 아니면 내 기억이 이상하던가. 내가 헌책방에서 일을 한 것은 군대 가지 직전까지여서 분명 1982년 이전이어야 한다. 1989년이라면, 나중에 나오지만 구로공단의 한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일하러 다닐 때였다. 이 사진과 내 기억이 일치하지 않으니 퍽 기이하다. 이 사진을 찍은 기억은 난다. 왼쪽 인물은 후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 헌책방을 중심으로 시흥동 일대의 청년들이 많이 모였고, 독서회는 토요일, 일요일로 나뉘어 모일 정도로 참여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때문에 경찰의 정보과 형사가 늘 주시하고 있기도 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섞여 있.. 2011. 10. 27.
1980년대-02 군에 입대하기 전의 사진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1982년 이전이 되겠다. 이 비밀조직원 또는 독립군 같은 포즈는 뭘까? 저 손에 들린 걸 알아보는 사람은 나이가 있는 사람이다. 흔히 '가리방'이라고 부르던, 등사기에서 쓰던 기름종이다. 철필로 긁어 써야 해서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인데, 이 작업을 하면서 가운데 손가락 첫마디에 굵은 굳은살이 박혔다. 독서회 소식지를 만들었는데, 기획, 편집, 제작을 혼자 맡아서 하다보니 재미도 있고 좋은 경험도 했다. 기억으로는 7-8호 정도를 만든 것 같은데, 80년대 중반에 모두 태워버렸다. 그 당시에 군대에서 전역하고 새로운 형태의 공부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공부하던 선배들이 조직활동으로 수배당하곤 해서, 나까지 보안에 신경을 써야 했다. 결국, 날.. 2011. 10. 27.
1980년대-01 현충사 스무 살 무렵 현충사에서 찍은 사진. 나를 독서회로 이끌어 준 형과 함께 형의 고향인 온양으로 나들이를 했는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이 형과 신기한 인연의 고리가 연결된다. 아내의 고향도 온양 근처인데, 장인어른이 당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고 있을 때, 이 형이 장인어른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 무렵, 그러니까 1980년 5월 18일 이후, 내가 살던 서울의 변두리에서도 광주에 관한 '유언비어'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신문들은 검열에 걸려 일부분 백지로 나오곤 했는데, 입에서 입으로 떠다니는 소문이 오히려 정확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고, 아직 어렸던 나는 그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군인이 그런 짓을 .. 201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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