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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소설을 읽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by 똥이아빠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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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공지영의 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읽었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책을 덮으면서 머리에 남는 것은 한마디로 한심하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잘못읽었다면 다행이겠다. 이 소설의 미덕과 뜻을 내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나를 윽박지를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승복을 하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부르조아의 소설을 능가하면 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다. 내가 언제 운동권 소설이라고 했느냐고 대들면 나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래도 이 소설을 운동권 소설이라고 알고, 믿고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나름대로의 미덕을 갖추기는 했다. 운동권, 특히 학생운동권의 각 개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운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받는 ‘인간적’인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 그 추악함까지도 아름답다면 아름답다.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운동이 소외(?)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운동이 어떤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활동의 총체적인 모습을 운동이라고 할 때, 그리고 그 운동이 특정한 계층,- 학생이라는 - 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운동하는 그들의 모습은 가장 더러운 부르조아의 행태보다도 더 추악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말을 하면 나에게 운동을 알지도 못하고 인간의 고통을 감싸안을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분노어린 비난을 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작가가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놓을 때는 적어도 사회적인 책임과 공적인 기능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름 석자의 유명세나 원고료 수입을 위해서만 글을 쓴다는 것은 - 물론 그런 것들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글을 쓰는 행위까지가 모두 ‘운동’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가장 기본적인 논리를 작가가 잊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 자기 몸을 파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랴.

 이 소설의 기둥은 적어도 많거나 적거나 지은이의 체험이 섞여 있으리라고 본다. 그 자신 후기에서 그렇게 쓰고 있으므로. 따라서 이 글이 수기는 아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학생운동권 내부의 문제를 일정부분 올바로 나타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내 기대에 어긋난다고 해서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역시 그정도로 관념론자는 아니니까.

 그러나 그것이 글로, 특히 창작물로, 그것도 소설이며 누구보다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잘 알고 있을 작가가 쓴 글로 나타났을 때, 그 내용을 따져 묻는 것이 그리 잘못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글을 읽고 느낀 몇 가지 문제점, 그러나 매우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 소설의 전체를 흐르는 분위기의 문제점이다. 이 분위기야 말로 작가가 의도한 대로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인간의 고뇌와 번민, 갈등의 격렬한 투쟁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미화이다.

 우울하고 공허한 분위기는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운동을 더 잘하기 위한 슬럼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쁘띠 부르조아들의 타락한 자본주의적 향락이 오물처럼 묻어나는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그들이 드나드는 곳이 어디이며 그들이 평소에 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까페, 레스토랑, 술집, 그리고 늘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담배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피워댄다. 강의실에 술이 취해서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토하는 것들이며 술에 취해서 함께 여관을 가고... 이런 것들이 모두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작가의 눈은 복사기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아마도 안기부에서 돈을 대주면서 쓰라고 해도 이보다 훌륭한 작품이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빈정거리기 딱 맞는 작품이다. 학생 운동권의 내부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는지 의심스러우며 학생운동의 현황이 정말 이 정도라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주 많이 죽어가는가. 소설의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주인공을 죽이는 것이다. 작가가 더 할말이 없을 때,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지 모를 때,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역량을 뛰어넘어 감당하기 힘들 때, 작가는 주인공을 죽인다. 이 소설 속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죽어간다.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죽어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살아남은 자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지만 그것은 읽는 사람이 ‘알아서 기는’이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 정도상의  <친구는 멀리 갔어도>를 보면 학생운동권 출신의 군인이 어떻게 죽어가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치열함, 그 펄떡거리는 생생함을 이 소설에서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다. 현장은 없고 주변만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중심은 없고 변죽만 울린다.

 처음부터 그렇게 구상을 하고 글을 썼다면 역시 할 말이 없지만 소설이 소설답다는 것은,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창작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소설의 주제와 묘사하는 방법이 보다 구체적이어야 하며 문제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본다.

 부자집 딸인 여주인공 민수, 몰락한 부자집 아들인 남자 주인공 지섭, 그 주변을 이루는 인경, 미혜, 현호, 치섭, 호석 등은 내가 아무리 좋게 이해할려고 해도 학생운동권의 핵심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운동을 잘해 볼려고 노력을 해도 그들은 운동을 잘할 수 있을 것같지도 않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인가.

 소설에 있어서 인물의 설정은 주제와 함께 그 주제를 엮어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전형’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전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이 말이 긍정된다는 전제 아래 이 소설의 인물을 살펴보면 전형에 해당하는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민수의 행동은 그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민수가 생각하는 ‘운동’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노동계급의 사상을 과연 얼마나 알고 있으며 현장으로 향하려는 그의 의지는 과연 어떻게 단련되며 결정된 것일까. 이 소설 속에서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가 설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당위의 문제로 이해될 뿐이다.

 앞날이 창창한 미래를 접어두고 노동자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가상한 꿈은 그가 골방에서 만들어낸 ‘이념’의 신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아니, 잠깐,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마치 학생운동권 전체를 매도하는듯 해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지금도 현장에서 모범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학출동지’들에게 이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장에서 싸우는 ‘학출동지’들은 이제 이미 ‘학출’이 아니다. 여기에 학출이니 노출이니 하는 분리의 개념은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것은 분파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민수의 태도는 조금만 운동의 물을 먹은 사람이라면 다 아는 행동이다. 민수의 행동이 ‘전형’이라고 보는 것은 -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 분명 잘못이다.

 그런 면에서 인경의 태도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도 인정하고 있거니와 운동하는 사람이 무슨 괴물이 아닌 바에야 인간적인 약점은 당연히 있을 것이며 그것을 갈등하고 극복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부르조아 소설이라면 문제가 아닐 것들이 이 소설 속에서는 속속 문제로 드러나고 있는데서 심각한 면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의 애정은 보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노력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진다. 즉, 부르조아들이 돈으로 여자를 사고 파는 행위나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는 행태가 인간의 본성이 아니듯 의식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은 그것을 올바르게 승화시키기 위하여 더 많은 고통을 요구한다. 민수와 지섭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은 보다 높은 이념을 이루기 위한 작은 노력으로 보여진다. ‘운동’과 ‘애정’이라는 비본질적 대립구조를 이끌면서 작가는 둘 가운데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주장한다. 운동은 사랑에 앞서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이며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들이 사랑한다면서 보여주는 태도는 어떤가.

 밝고 건강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밤, 어두움, 술, 담배, 구토, 눈물, 골목길, 여관, 어디를 봐도 부르조아들이 사랑하는 방법의 연장선이다. 기껏 민수가 지섭의 조카 재민에게 옷을 사주는 정도의 행위로 애정의 표현을 한다. 과연 운동권의 사랑은 이런가. 정말 이렇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뒷골목의 불량학생들이나 하는 퇴폐적인 행동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소설은 원론으로 말하면 이렇다. 있었던 얘기를 쓰는 것이고, 있는 얘기를 쓰는 것이며, 있을 수 있는 얘기를 쓰는 것이다. 이 말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는 이 소설이 어떤 면에서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너무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게 쓴 것이 우선 잘못이며 시각을 자신의 경험에 맞추고 그 범위 안에서 모든 문제를 이해했다는 것이 또한 잘못이다. 70년대에 나온 ‘무식한’노동자의 수기에서도 이런 개인주의는 극복되고 있다. 그런데 운동이 질적으로 발전했다는 90년대에 나온 소설이 모든 면에서 퇴보를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학생운동권 자체에 있다고 봐야겠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 소설은 싫으나 좋으나 현재의 학생운동의 현주소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그것이 매우 단편적이며 옳지 못한 부분으로 왜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부분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리고 작가가 이런 점을 의도적으로 썼다면 그는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학생운동권의 군데군데를 ‘문학적’으로 보이고 있으니 그런 것까지가 모두 진실과 이해의 차원에서 포용된다고 하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끝내 소설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 - 선전이니 선동이니 하는 말을 않더라도 - 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과 인간의 희망과 투쟁에 대한 전망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덮어두려는 ‘퇴폐성’을 경계하면서 작가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음을, 오히려 작가적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뱀의 다리로 달아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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