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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소설을 읽다

기린의 심장

by 똥이아빠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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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심장

-이상욱 소설집(교유서가)

 

첫번째 작품 '어느 시인의 죽음'을 읽으면서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SF 작품을 쓰는 작가인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뻔하고 식상한 이야기인데, 이걸 소재로 쓰는 작가라면, SF문학의 트랜드를 잘 모르는 작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두번째 작품 '라하이나의 눈'을 읽으면서, SF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잘 '동기화'했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가난한 노동자는 자본가, 부르주아의 욕망에 깔려-여기서는 살이 쪄-죽는다는 풍자다. 그러고 보니 첫번째 작품에서도 주인공 용천은 가난하고 평범한 학생이고, 그는 돈을 받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외계인의 제물이 된다. 그렇게 제물로 선택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제물로 바쳐지는 동안,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떵떵거리고 살아간다. 자신의 몸에 붙은 지방을 대신 운동하면서 빼주는 노동자들이 있는 것처럼.

세번째 작품 '기린의 심장'을 읽으면서 작가의 실력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느꼈다. 경찰관 K가 소설가인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한편의 꿈과 같은 이야기면서, 거대한 환타지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러브 크래프트의 상상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네번째 작품 '마왕의 변'에서는 환타지와 무협, 온라인 게임의 캐릭터와 스토리들이 뒤섞인 세계관이 등장한다. 마왕의 탄생과 그에 맞서는 용사, 탱커, 힐러 등은 명백히 게임 캐릭터들이고, 마왕의 전복적 태도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마왕은 스스로의 지위를 내려 놓고, 용사는 마왕이 된다. 이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면서 저주를 받는 '워크래프트'의 주인공 아서스가 떠오른다.

다섯번째 작품 '허물'을 읽으면서, 앞에서 읽었던 작품들은 그저 습작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뒤로 가면서 나오는 '하얀 바다', '경계', '연극의 시작', '25분' 모두에서 똑같이 느꼈으며, 이 작가가 이미 작가로 데뷔해 실력 있는 작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인터넷을 검색해도 '이성욱'이라는 작가(소설가)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이 작품집이 이성욱 작가의 데뷔작이라면, 심상치 않은 작가라고 생각했다.

작가에 관해 알 수 없는 이유는, 이 책을 출간한 '교유서가'에서 정식 출간한 책이 아닌, '가제본'을 보내주었기 때문이고, 이 가제본에는 작가에 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작가에 관해 아무런 정보 없이 '블라인드' 독서를 한 것인데, 작품집 앞의 네 편과 뒤의 다섯 편은 장르가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작가에게는 모든 작품이 자신의 상상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분할 이유가 없지만, 한 권의 작품집에서 작품의 장르와 세계관이 이렇게 확실하게 구분되는 현상을 보면서 독자는 조금 어리둥절할 수 있을 듯하다.

 

작품집의 뒷부분에 있는 작품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는다. 아들이 갑자기 사고(또는 병)로 죽고(허물), 6년만에 어렵게 임신한 아이를 유산하고(하얀 바다), 암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경계), 딸을 사고로 잃고(연극의 시작), 고양이 새끼들이 죽는다(25분).

즉,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또는 그것을 상징하는 동물을 잃게 되면서 오는 공허함과 외로움, 고독, 절망 등을 느낀다. 작가는 이들 인물들의 감정을 건조하게 드러내며, 별다른 설명 없이 인물의 상황만으로 그가 겪는 고통을 보여준다. 

'허물'에서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이 뱀으로 변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랑하고 결혼한다. 그리고 아들이 사고로 죽는다. 작품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아들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즉 단원고 학생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탁월한 장면은 두 사람(부부)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아들을 잃은 고통으로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아내는 자살하고, 자살한 아내 앞에서 주인공은 놀라운 발견을 한다.

 

아내를 내리기 위해 안아든 순간 묘한 위화감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가벼웠습니다. 땅에 내려놓자 시신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기묘한 형태로 구겨졌습니다. 선생님, 그것은 허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내는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처와 슬픔으로 채워진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신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때 제가 본 것은 아내의 껍질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30년 전 그 숲을 떠올렸습니다. 슬픔과 행복이 없는, 경이와 생명으로 넘쳐나던 그 세계를 말입니다. 제 가슴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충만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이가 죽은 뒤 처음으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사고로 아들을 잃고, 절망과 슬픔을 견디지 못한 엄마도 세상을 버리고, 뒤이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그 공허와 절대 고독이 느껴지면서 나도 주인공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의 슬픔과 동기화되는 이 느낌이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 개개인의 삶은 행복, 즐거움, 아름다움보다는 고통, 절망, 고독 등의 힘든 감정과 힘든 나날의 연속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인생에서 어느 쪽을 더 많이 경험하는가에 따라 그 삶이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겠지만, 삶은 그것을 견디는 힘에 있지 않을까. 이 작품집은 과거의 전통적 작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상상력과 작가의 세계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준다.

 

 

어느 시인의 죽음

외계종족 '가브'의 먹이가 되는 '인간' 이야기

대수는 먹이감을 고르는 사람, 용천은 평범한 학생으로 가브의 제물이 된다.

 

라하이나의 눈

다른 사람과 물리적 동기화-달리는 사람-다른 사람의 칼로리를 대신 빼주는 인물

 

기린의 심장

경찰관 K가 들려준 이야기. 마음이 지워진 사람들이 작은 언덕에 묻히는 이야기.

 

마왕의 변

환타지와 게임, 무협지가 뒤섞인 단편. 마왕의 죽음과 용사가 마왕이 되는 이야기.

 

허물

편지 형식. 유서. 한 남자의 삶, 아내, 아들.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자살. 자살한 아내의 몸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드러내는 뱀의 허물 같은 것.

 

하얀 바다

6년만에 임신한 아이를 유산한 아내. 아내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나. 나의 불륜. 

 

경계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수학선생 재인. 딸은 배우가 되겠다며 반대하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옛날 제자에게서 편지가 온다. 동성애자였다는. 딸을 데리러 간 촬영장에서 더러운 물을 뿌리는 현장을 보고 참지 못한 재인은 그 물을 마시고, 딸을 데리고 온다.

 

연극의 시작

불법 물건을 배달하는 영준. 어느 날 누군가에게 잡히고, 왜 잡혔는지 이유를 말하라는 노인을 본다. 지하철에 불을 지른 노숙자, 피해자 가운데 노인의 딸이 있었다.

 

25분

이시훈 중사는 장기복무 신청을 하고 기다리고 있다. 그는 나일을 사랑하지만 군대에서 행보관에게 밉보이고, 우연히 눈에 띈 고양이에게 먹이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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