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28 동무들과 함께
<서울> 왕십리에서
내가 처음 김흥국의 '호랑나비'를 들은 곳은 버스 안이었다. 그 버스는 왕십리를 지나고 있었고, 나는 어떤 문고본을 읽으면서 그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노래가 좀 웃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김흥국은 이 노래로 유명가수가 되었고, 지금도 이 노래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그가 나중에 부른 '59년 왕십리'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 노래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나는 '호랑나비'보다 더 좋아한다. 김흥국은 되지도 않게 정몽준 뒤를 쫓아다니며 축구협회니, 정치니 따위를 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었지만, 그가 부른 노래는 남았으니, 그도 나름 성공한 인물이긴 하다.
그가 '59년 왕십리'라는 노래를 부른 것만으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으니, 좋든 싫든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왕십리'는 나의 20대에서 짧지만 중요한 시기에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 왕십리에서 군대동기들과 저녁을 먹었다. 오래된 왕십리의 기억과 30년이 된 군대동기들과의 만남은 마치 빛바랜 추억 속 사진처럼 낡았지만 정겹다.
군대에서 전역을 하고, 동기였던 우리 셋은 거의 날마다 붙어다녔다. 왕십리가 고향인 동무의 집에서, 또 왕십리에 인쇄소를 열었던 동무의 가게에서 며칠씩 또는 하루가 멀다하고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밤새워 술내기 화투를 치면서 젊은 시간은 보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우리가 만났을 때의 나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우리는 왕십리에 모여 그 시절을 추억했다.
왕십리는 서울의 변두리였지만, 이제는 5개의 노선이 지나가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양평으로 가는 중앙선이 왕십리에서 서고, 2호선과 5호선, 분당선도 왕십리를 경유한다. 춘천가는 ITX도 서는 곳이니 철도교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왕십리는 예전에 미나리밭으로 유명했지만, 그 전부터 조선의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수도를 만들려는 무학대사가 왕십리에 와서 농부에게 길을 물었더니 '왕십리'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즉, '10리는 더 가라'는 뜻이었다. 왕십리에서 10리(4km)를 더 가면 정말 신기하게도 '종묘'가 된다. '종묘'는 조선의 건국인물을 모신 곳이니, '왕십리'의 뜻이 한편으로는 놀랍다.
조해일도 그의 1974년 작품 '왕십리'에서 전차의 종점이었던 왕십리를 추억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나도 어렸을 때, '마포 종점'을 기억하는 걸 보면 한국근대화의 끝자락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이제 불혹을 지나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 다시 만난 전우들은 여전히 군대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두들 건강하고 무탈한 것을 축하했다.
세월이 더 지나도, 왕십리의 추억은 잊혀지지 않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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