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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시장

희귀본 판매합니다.

by 똥이아빠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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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지고 있는 책 가운데 희귀본이라고 할만한 책을 판매합니다.

이 책들의 가치를 잘 아는 분이 소장하시면 좋겠습니다.

각 이미지 아래, 책의 내용과 특징을 가능한 자세하게 적어 놓겠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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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신 내용은 저의 메일 marupress@gmail.com 로 보내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

* 아래 인용한 자료는 네이버 블로그 [재봉틀의 국어방] https://blog.naver.com/kwank99 에서 빌려왔음을 밝힙니다.

여상현(呂尙玄.1914.2.9∼?)

시인.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동면 천덕리 샘골마을 출생. 본명 여상현(呂尙鉉), 필명 여성야(呂星野). 1935년 고창고보 졸업하고, 1939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연희전문 재학 중 산문시 <새벽> <좀 먹은 단층> 등을 발표하고, 1936년 11월 서정주ㆍ김동리ㆍ오장환ㆍ함형수ㆍ김광균 등과 함께 [시인부락]의 창간에 가담하여, <장(腸)> <호텔 앞 광장> <법원과 까마귀> <호흡>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광복 전에는 주로 일상적 삶의 편린들을 담은 시를 썼는데, 특히 1937년 2월 [풍림]에 발표한 <종로 168>은 종로 뒷거리 밤의 속악한 현실을 리얼하게 묘파한 작품이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서 서기로 지명받기도 했다. 이러한 변모와 함께 현실참여의식이 강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l946년 서울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 활동했고 1947년에 시집 <칠면조>를 간행했는데 당시 표지를 김기창 화백이 그려주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억압 받는 지식인의 고뇌와 좌절을 그려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노동자 및 농민들의 삶과 애환에 대해 주로 읊었다. 1947년 발간한 시집 <칠면조>에는 해방공간의 사회상을 풍자하고 있으며 광산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향수가 담겨있으며, 단조로운 정형률의 형태로 자기가 속한 세대의 의식을 추구했다.

1947년에 <슬픈 가락>을 [백민]에 발표한 이후 1950년 7월 6ㆍ25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에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에서 개최한 제1회 국민예술제전에도 참가하였다.

【시】<장(腸)>(시인부락 창간호.1936.11) <호텔 앞의 광장(廣場)>(시인부락 창간호.1936.11) <법원(法院)과 가마귀>(시인부락 2.1936.12) <옷고름을 맺다가>(조선일보.1942.12) <초춘재가수기(初春在家手記)>(신천지.1947.2) <영산강(榮山江)>(신천지.1947.10) <가정여묵(家庭餘墨)>(民聲.1948.8) <슬픈 가락>(백민.1949.1)

【시집】<칠면조(七面鳥)>(정음사.1947)

김기진(金基鎭.김팔봉.1903.6.29∼1985.5.8)

   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 충북 청원군 남이면(南二面) 팔봉리(八峰里) 생. 호 팔봉(八峰). 배재고보 졸업, 1923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학부 중퇴. 동 대학 수학 중 [개벽]에 평론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 단편 <붉은 쥐> 발표, 1922년 박승희(朴勝喜) 등과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했으며, 1923년 시대일보에 장편 <약혼>을 발표하고, [백조] 동인으로 <한갈래의 길>, <한개의 불빛>, <권태> 등 낭만적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곧 경향문학의 주창자가 되고, 프로문학의 선도자 역할을 했다.

1924년부터 1940년까지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中外日報) 등의 기자로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1945년 출판인쇄업 [애지사(愛智社)]를 창립하여 1950년까지 경영하였고 1960년 경향신문 주필을 거쳐 1972년 펜클럽ㆍ문협(文協)의 고문이 되었다. 주로 [개벽(開闢)]에 글을 발표했으며, 1925년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합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만들었으며, 기타 영화사 등에서 활약하였고 문학평론가로서의 집필도 많이 하였다.

1940년 무렵부터 수필ㆍ시ㆍ시조ㆍ평론 등 친일작품을 발표하였다. 1944년 조선문인부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에 선출되는 등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의 중추적 인사가 되기도 하였다.

평생 그는 프로문학 운동에 전념, 이념적 경향의 작품 세계를 지향(이념적 경향으로 한때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음). [개벽]에 비평문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 발표(최초의 프로문학이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로문학이 쇠퇴하자 그의 활동도 침체에 빠졌으며, 6ㆍ25후에는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6ㆍ25전쟁 때 공산치하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육군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문학평론가ㆍ소설가. 호 팔봉(八峰).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출생. 팔봉(八峰)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그밖에 여덟뫼ㆍ팔봉산인(八峰山人)ㆍ동초(東初)ㆍ구준의(具準儀) 등 여러 가지 호를 사용하였다.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1920년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영문학부 예과(豫科)를 거쳐 본과(本科)1년을 중퇴하였다. 1923년 매일신보(每日申報)ㆍ시대일보(時代日報)ㆍ중외일보(中外日報) 등에서 약 17년간 기자활동을 하는 등 언론계에 종사하였고, 1934년 [청년조선(靑年朝鮮_]을 주간할 당시 인쇄를 맡은 [애지사(愛知社)]라는 출판사를 광복 후에 운영하기도 하였다. 1944년 중국 남경(南京)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이광수(李光洙)와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하였다.

6ㆍ25남침 때에는 공산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0년에는 경향신문(京鄕新聞) 주필을, 1961년에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 회장을, 1967년에는 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장을, 1969년부터 1972년 사이에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 고문, 세계복지연맹 한국본부 이사를 거쳐 1972년에는 한국펜클럽과 한국문인협회의 고문을 각각 역임하였다. 사회적ㆍ문화적 업적으로 을지무공훈장(乙支武功勳章)ㆍ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친일 문학활동】

한편으로 박영희와 함께 프로문학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그는 1938년 7월 3일 시국대응 전선사상 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결성위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노선으로 전향하였다. 매일신보에 황도정신을 문예생활의 지표로 삼는다는 내용의 <문예시감(文藝時感)>(1940.2), <국민문학(國民文學)의 출발>(1942) 등의 평론, 징병 및 학도병의 출진을 권유하는 시 <신세계(新世界)의 첫 장(章)>(1942), <의기충천>(1944) 등과 시조 <대동아전송가(大東亞戰頌歌)>(1942)를 통하여 친일어용적인 태도를 표방하면서 부일문학(附日文學)의 오욕을 한국문학사에 남기기도 하였다.

【업적】

3ㆍ1운동 이후인 1922년 이적호ㆍ송영 등에 의해 ‘해방문화의 연구와 운동’을 슬로건으로 한 [염군사]가 조직되었고, 1923년에는 김팔봉과 박영희를 중심으로 [파스큘라]가 결성되었다. 이들 조직을 기반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이 본격화되는데, 이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팔봉 김기진이었다.

김팔봉은 초기 프로문학운동을 이끌면서 프로문학이 기본적인 꼴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박영희와의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주장했고, 문하그이 대중에 대한 역할을 극대치까지 몰고 나간 작가였다. 그는 문학의 논리 차원과 형상화 차ㅜ언을 동시에 포괄하고자 하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보였다.

김기진은 신경향파 문학이 기치를 들고 출발하던 1920년대의 논객으로서 치열한 논쟁에 추신하기도 하였고, 문학의 주도권을 n이한 싸움에서도 누구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했다. 그리고 비평가로서 당대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 주었으며, 자신 스스로 작품을 창작하여 언어적인 형상성을 추구하기도 했다.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약혼> <전도양양> <해조음> 등 장편소설을 발표하였고, 시ㆍ시조ㆍ수필 등 창작으로 문학적 실천을 보여왔다. 그러한 점에서 문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에 투신한 문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원 홈)

【유적지】

(1) 묘(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마명리 서릉공원 묘지)
(2) 생가, 문학비(충북 청원군 팔봉리 팔봉산 자락

【약력】

1916 배재고보 입학
1921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 입학
1922 박승희ㆍ이서구ㆍ김복진 등과 [토월회] 창립
1923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학부 중퇴
1923 [개벽]지에 <프로므나드 상티망탈>로 문단 데뷔
1923 [파스큘라] 결성 참여
1924 [매일신보] 기자
1925 [시대일보] 기자
1925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발기인
1926 [조선지광] 기자
1926 [중외일보] 기자
1926 박영희와 ‘내용과 형식 논쟁’
1929 임화(林和)와 ‘대중화 논쟁’
1030 [중외일보] 사회부장
1931 조선플로레타리아예술가동맹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 자술서 쓰고 석방
1934 [청년조선] 창간
1934 매일신보사 사회부장
1935 카프 검거사건으로 전북도경찰부에 구금
1938 친일단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결성 준비위원
1944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부 회장
1945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5 출판인쇄업 [애지사(愛智社)] 창립
1951 6ㆍ25 당시 육군 종군작가단 부단장
1955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1958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
1960 [경향신문] 주필
1961 재건국민운동 중앙화 회장
1972 펜클럽 고몬, 문협 고문

【상훈】금성화랑무공훈장(1952)

【평론】<Promenade Sentimental>(개벽.1923.7)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개벽.1923.9∼10) <떨어지는 조각 조각>(백조.1923.9) <또 다시 ‘클라르테’에 대하여>(개벽.1923.11) <마음의 폐허>(개벽.1923.12) <눈물의 순례>(개벽.1924.1)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개벽.1924.1) <금일(今日)의 문학, 명일(明日)의 문학>(개벽.1924.2) <환멸기의 조선을 넘어서>(개벽.1924.4) <너희의 양심에 고발한다>(개벽.1924.8) <이해(利害) 위에서>(조선일보.1924.10.20.) <당래(當來)의 조선문학>(매일신보.1924.11.16.) <‘본질’에 관하여>(매일신보.1924.11.23.) <조선어의 문학적 가치>(매일신보.1924.12.7.) <지식계급늬 임무와 신흥문학의 사명>(매일신보.1924.12.7.) <1월 창작계 총평>(개벽.1925.2) <평생소원-문단시평>(개벽.1925.2) <피투성이 된 ‘프로’혼의 표백-계급문학 시비론>(개벽.1925.2) <내가 본 염상섭씨>(생장.1925.2) <감각의 변혁>(생장.1925.2) <현 시단(詩壇)의 시인>(개벽.1925.3∼4) <미정고(未定稿)-처녀작 발표 당시의 감상>(조선문단.1925.3) <십자교(十字橋) 우에서>(개벽.1925.5) <신춘문단총관(新春文壇總觀)>(개벽.1925.5) <파인(巴人) 시집 ‘국경의 밤’에 대하야>(동아일보.1925.5.20.) <조선문단 합평 인상기>(개벽.1925.6) <문단 최근의 일(一) 경향>(개벽.1925.7) <관능적(官能的) 관계의 윤리적 의의(意義): 연애문제(戀愛問題) 소관(小觀)>(조선문단 10.1925.7) <시가의 음악적 방향>(조선문단.1925.8) <시가(詩歌)의 음악적 방면(方面)>(조선문단 11.1925.9) <정복자의 꿈>(조선문단.1925.10) <2월의 창작-두 사람의 작가>(시대일보.1926.2.1.) <4월 창작란>(조선문단.1925.10) <5월의 창작계-‘조문(朝文)’ 당선작(當選作) 기타>(시대일보.1926.5.26.) <5월의 창작계-‘개벽’지의 2편>(조선일보.1926.5.9.∼16) <월평적(月評的) 산문-문예시평>(조선지광.1926.11) <문예시평>(조선지광.1926.12) <병인 세모 문단 총평>(중외일보.1926.12.11.∼25) <문단 1년>(동광.1927.1) <문단사상과 사회사상>(조선문단.1927.1) <문단 침체의 사회적 의의와 신흥문예의 구도에 대하여>(조선지광.1927.1) <무산문예(無産文藝) 작품과 무산문예(無産文藝) 비평: 동무 회월(懷月)에게>(조선문단.1927.2) <문예시평-문단상 조선주의, ‘문예가협회’에 대하여>(조선지광.1927.2) <예술상의 사회성과 개성>(현대평론.1927.3) <내용과 표현>(조선문단.1927.3) <문예시평>(조선지광.1927.3) <예술상의 사회성과 개성>(현대평론.1927.3) <문단시평-4월 창작평>(조선지광.1927.5) <문단시평-4월의 창작>(현대평론.1927.5) <시감2편(詩感二篇)>(조선지광.1927.8) <도향(稻香)을 생각한다>(현대평론.1927.8) <문예시감 단편(斷片)>(조선지광.1927.11) <소비에트 문학 10년>(동아일보.1927.11.4.∼5) <감상을 그대로-약간의 문제에 대하여>(동아일보.1927.12.10.∼15) <사회의식 과정에 순응한 예술-현단계의 조선 사람은 어떠한 예술을 요구하는가?)조선지광.1928.1) <창작계 1년>(동아일보.1928.1.1.∼3) <정묘(丁卯) 문단 총관>(매일신보.1928.1.1.) <1년간의 평론>(조선일보.1928.1.1.∼3) <조선문학의 현단계>(한빛.1928.9) <노예의 문자>(조선일보.1928.10.2.∼11) <문예시사감(文藝時事感)>(동아일보.1928.10.27.∼11.1) <관념론적 예술관의 파탄>(조선지광.1928.11) <통속소설고>(조선일보.1928.11.9.∼20) <회고(回顧)와 전망>(조선지광.1929.1) <10년간 조선문예 변천 과정>(조선일보.1929.1.1.∼2.2) <변증적 사실주의-양식문제에 대한 초고>(동아일보.1929.2.25.∼3.7) <농민문학에 대한 초고>(조선농민.1929.3) <대중소설론>(동아일보.1929.4.14.∼30) <4월의 시가>(중외일보.1929.4.16.∼26)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문예공론.1929.5) <문예사상 문답-이광수⋅염상섭씨와 일문일답기>(문예공론.1929.5) <교육계 명사의 조선문단관>(문예공론.1929.5) <단편서사시의 길로>(조선문예.1929.5) <신춘 창작평>(衆聲.1929.5) <프로시가의 대중화>(문예공론.1929.6) <시평적(時評的) 수언(數言)>(조선지광.1929.6) <사실주의 문제>(조선일보.1929.6.13.∼25) <조선프로문예운동의 선구자: 영광의 조선 선구자들>(삼천리 2.1929.9) <예술운동에 대하여>(동아일보.1929.9.20.∼22) <문예적 평론의 평론-소위 춘추필법과 기타>(중외일보.1929.10.1.∼9) <1년간 창작계>(동아일보.1929.12.27.∼1930.1.4.) <1930년도 문단(文壇)에 대한 희망과 건의>(조선강단.1930.1) <예술운동의 1년간>(조선지광.1930.1) <예술의 대중화(大衆化)에 대하여>(조선일보.1930.1.1.∼14) <1929년 문예계 총관>(중외일보.1930.1.1.∼22) <문예시사감(文藝時事感)>(대조.1930.8) <朝鮮に於る フケレタリア 藝術運動の過去と現在>(사상월보.32.1) <조선문예사조론-선후평>(조선일보.1933.1.1.∼3) <나의 문학에 대한 태도, 기본적 견해>(동아일보.1933.10.8.) <1933년도 단편창작 76편>(신동아.1933.12) <조선문학의 현재 수준>(신동아.1934.1) <문예시평-박군은 무엇을 말했나>(동아일보.1934.1.27.∼2.6) <프로문학의 현재 수준>(신동아.1934.2) <금춘(今春)의 문단적 수확-신인 제씨(諸氏)의 창작에 대하여>(동아일보.1934.2.18.∼20) <신문 장편소설 시감(時感)>(삼천리.1934.8) <청년 조선의 출발>(청년조선.1934.10) <구각(舊殼)에서의 탈출-조선의 여류작가(女流作家) 제씨(諸氏)에게>(신가정.1935.1) <조선문학의 현단계>(신동아.1935.1) <작가와 현실에 대한 단상-문예시평>(삼천리.1938.5) <춘원(春園)의 ‘사랑’ 독후감>(매일신보.1938.11.16.) <춘원의 ‘사랑’>(박문.1938.12) <문예시감>(매일신보.1940.2.27.∼29) <조선문학 신(新) 전기(轉期)-현실을 솔직히 반영하라>(매일신보.1940.8.22.) <소설의 성격 묘사-조선작가의 역량 문제>(매일신보.1940.8.23.) <영웅, 시대, 문학-현대문학이 반성할 점>(매일신보.1940.8.24.) <시인과 시집-시집 남발의 현상>(매일신보.1940.8.26.) <시의 창조적-근년의 개념적 경향>(매일신보.1940.8.27.) <고(故) 김복진 반생기(半生期)>(춘추.1941.9) <국민문학의 출발>(매일신보.1942.1.9.∼14) <월탄의 ‘다정불심’-장편시평>(매일신보.1942.6.18.∼20) <朝鮮映畵の新出發>(춘추.1942.8) <시집 권환 저(著) ‘자화상’>(매일신보.1943.9.11.∼12) <朝鮮藝術償賞作品について>(국민문학.1944.4) <문학노트>(전선문학.1952.4) <전쟁문학의 방향>(전선문학.1953.2) <정신의 빈곤>(저ᇇ건문학.1953.4) <동란 3년간과 문화계의 족적<문화세계.1953.9) <나와 ‘토월회’ 시대-신문화의 남상기(濫觴記)>(신천지.1954.2) <신극운동 초창기의 회고>(신태양.1954.9) <문예시감>(사상계.1955.3∼9) <6⋅25동란과 한국문화>(종합민주공론.1955.8) <한국문단측면사>(사상계.1956.8∼12) <문인(文人)들은 상호비판하자>(새벽.1957.2) <무엇을 할 것인가?>(사상계..1957.12) <작가로서의 춘원>(사상계.1958.2) <우리가 걸어온 30년>(사상계.1958.8∼12) <한국신문 수난사>(사상계.1959.6∼8) <문학이란 재미있고 쉬운 학문이 아니다-문학하는 태도>(신문예.1959.9) <육당의 시-육당 최남선>(현대문학.1960.10) <팔봉(八峰), 내 아호(雅號)의 유래>(현대문학.1964.6) <초창기에 참가한 늦동이 나의 회고록>(세대.1964.7∼1966.1) <조각가(彫刻家) 김복진(金復鎭)>(공간.1973.1) <한국 현대문학의 재정리-회월 박영희의 카프문학과 회월의 인간>(문학사상.1973.8)

【시】<애련모사(愛戀慕思)>(개벽.1923.8) <한 갈래의 길>(백조.1923.9) <한 개의 불빛>(백조.1923.9) <권태>(백조.1923.9) <비 오는 날>(백조.1923.9) <연못에 서서>(백조.1923.9) <가슴의 별>(백조.1923.9) <백수(白手)의 탄식>(백조.1924.6) <화강암>(백조.1924.6) <A Protest 고대하는 마음>(생장.1925.3) <애욕시(愛慾詩) 3편>(생장.1925.4) <시조>(신동아.1935.1) <고대하는 마음>(예술.1935.1) <동부전선>(신천지.1953.4)

【소설】<붉은 쥐>(개벽 53.1924.11) <불이야 불이야>(개벽.1925.1) <젊은 이상주의의 사(死)>(개벽 60ㆍ61.1925.6~7) <Trick>(개벽 63.1925.11) <몰락>(개벽 65.1926.1) <본능의 복수>(문예운동 1.1926.1) <약혼(約婚)>(시대일보.1926.1.2.∼6.28) <삼등차표(三等車表)>(동아일보.1928.4.15.∼4.25) <미인(美人) 꼴불견>(조선일보.1929.3.6.) <여류음악가(女流音樂家)>(동아일보.1929.5.24.∼6.1) <황원행(荒原行)>(동아일보.1929.6.8.∼10.21) <전도양양(前途洋洋)>(중외일보.1929.9.27.∼1930.1.23.) <해조음(海潮音)>(조선일보.1930.1.25.∼7.25) <봄이 오기 전>(신가정 15.1934.3) <심야의 태양>(동아일보.1934.5.3.∼9.19) <장덕대>(개벽 속간 1.1934.11) <통일천하(統一天下)>(동아일보.1954.4∼1955.10) <군웅(群雄)>(서울신문.1955.11.1956.8) <날이 밝으면>(사상계 42∼47.1957.1∼6) <성군(星群)>(동아일보.1965)

【수필】<신록(新綠)>(개벽.1924.6) <불에 데인 살땡이>(개벽.1924.8) <통곡(痛哭)>(개벽.1924.12) <정복자의 꿈>(조선문단.1925.10) <Malheur>(개벽.1926.6) <신추잡감(新秋雜感)>(별건곤.1926.11) <통쾌한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별건곤.1927.8) <몽역난(夢亦難), 설역난(說亦難)>(별건곤.1929.6) <바람에 부치는 편지>(대조.1930.5) <노방(路傍)의 타인과 같이>(신동아.1934.7) <볼가 강 상(上)의 꿈>(신동아.1934.8) <나의 문학청년 시대 회고>(신동아.1934.9) <제야단상(除夜斷想)>(춘추.1941.2) <제1보충대 방문기>(전선문학.1953.5) <신년(新年) 인생론>(문화세계.1954.1) <절대(絶對)한 자신(自信)>(문학과예술.1954.4) <새것, 헌것>(팬.1954.10) <물>(신태양.1957.8) <기념>(문학예술.1957.10)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자유문학.1958.9∼1959.11) <일기(日記)>(자유문학.1958.12) <지행일치(知行一致)>(지성.1958.12)

【시집】<애련모사(愛戀慕思)>(박문서관.1924)

【소설집】<청년 김옥균(金玉均)>(한성도서.1936) <해조음(海潮音)>(박문서관.1938) <심야(深夜)의 태양(太陽)>(한성도서.1952) <최후의 심판>(세창서관.1953) <통일천하>(남향문화사.1956) <청년 김옥균>(삼중당.1967) <초한지(楚漢志)>(어문각.1984)

【수필집】<심두잡초(心頭雜草)>(영문사.1954) <김팔봉수필집>(경기문화사.1958)

【전집】<김팔봉문학전집>(전7권.문학과지성사.1988)

【번역서】<수호지(水滸誌)>(전4권.어문각.1984)

임화(林和.1908.10.13∼1953.8.6)

    시인ㆍ문학평론가. 본명 임인식(林仁植). 필명 청로(靑爐)ㆍ김철우(金鐵友)ㆍ쌍수대인(雙樹臺人)ㆍ성아(星兒)ㆍ임화(林華) 등. 서울 낙산 출생. 보성중학(普成中學) 중퇴, 잡지 [학예사(學藝社)] 주간을 거쳐 1926년 카프에 가입한 이래 조직 활동에서 줄곧 중추적 역할을 했다. 32년 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한 후 서기장이 되었으며, 35년에는 카프 해소파의 주류를 형성, 카프 해산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29년 무렵부터로, 이때 그는 <우리 오빠와 화로> <우산 받은 요코하마(橫濱)의 부두> <네거리의 순이>와 같은 단편 서사시 계열의 시를 발표, 경향시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카프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비평은, 조직론에서부터 창작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강력한 지도성을 발휘하였다.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정세악화로 카프가 해산되고 정치투쟁에의 길이 봉쇄되자, 그의 평론활동은 좀더 문학내적 방향으로 회귀하게 되고, 여기서 세태소설론ㆍ내성소설론ㆍ통속소설론ㆍ본격소설론 등 일련의 ‘소설론’이 제기된다. 이 가운데, 그는 성격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본격소설을 문학의 정도(正道)로 파악하고, 이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론을 전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문학사의 서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그의 <개설 신문학사>에서 체계적인 방법론을 갖춘 최초의 근대문학사가 시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8ㆍ15광복 이후에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그 후신인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후 이태준, 오장환, 임학수 등과 함께 월북하여 문학가동맹, 조소문화협회(朝蘇文化協會) 등에 관계하였으며, 1953년 남로당 숙청 때 이승엽 등과 함께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1929년 <네 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등 이른바 ‘단편서사시’를 발표하면서 일약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시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인 1931년경부터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1932년부터 카프가 해산되는 1935년까지 카프의 서기장직을 맡았다.

카프 해산을 전후하면서 기존의 계급문학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이론적 노력을 기울여, 리얼리즘론, 소설론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또한 우리 근대문학 발전과정의 합법칙성을 규명하려는 목적으로 신문학사 연구에도 착수, <개설 신문학사>(1939~1941)를 저술했으며, 그와 함께 우리 근대문학 발전의 특수성을 ‘이식을 통한 새로운 전통의 창조’로 이론화한 이른바 ‘이식문학사론’을 제출하기도 했다. 시에서도 초기의 ‘단편서사시’에서 벗어나,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가던 당대의 민족적 운명과 그 초극의 의지를 노래한 서정적 경향의 시를 많이 창작했다. 이 시기의 이론ㆍ비평적 성과는 평론집 <문학의 논리>(1940)에 수록되어 있으며, 시적 성과는 <현해탄>(1938)에 주로 수록되어 있다.

광복 직후 그는 계급문학론을 부정하고 반제 반봉건을 중요 이념으로 하는 민족문학론을 새롭게 제기했으며, 그에 입각하여 문학운동의 통일전선적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 지도해 나갔다. 또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문화부문 통일전선체인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그 부위원장을 맡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다.

1947년 제2시집 <찬가>를 간행하고, 같은 해 4월 <현해탄>의 재판인 <회상시집>을 내는 등 시작 활동도 계속했으나 좌익활동에 대한 탄압의 강화로 월북함으로써 남한에서의 활동은 마감했다. 북한에서도 해주 제일인쇄소에 근무하면서 남로당의 문화활동을 주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 와서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그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전선문고로 제3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8월 남로당 숙청과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으로 이승엽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작품세계】

임화는 80여편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남긴 현대시사와 비평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학의 예술성보다는 적극적인 현실성을 추구하여, 정치적 이념과 계급적 현실개혁에 문학을 복무시키고자 했다. 진보적 좌익의 이론 비평과 지도 비평에서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나, <우리 오빠와 화로> 등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시작(詩作)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진보적 문학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만큼 그는 근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시와 비평, 그리고 문학사 서술에서 그는 당대의 가장 문제적인 성과를 남겼다. 1929년부터 창작하기 시작한 이른바 단편서사시는 우리 시사에서 리얼리즘적 방향을 새롭게 개척한 성과로 평가되며, 1930년대 후반에 쓰여진 서정시들 역시 당대의 암담한 현실에서 진보적 지식인이 체험한 가장 전형적인 정신적 고양의 순간을 담고 있다. 그의 비평활동 역시 과학적인 문예이론의 수립이라는 점에서 한국근대문학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가 한국문학에서의 근대의 문제를 깊이있게 인식함으로써, 문학사 서술과 문학이론의 수립에 과학성과 역사성을 부여한 것은 가장 중요한 이론적 성취라 할 만하다.

【연보】

1908 : 10월 13일 서울에서 출생. 본명 인식(仁植).
1921 : 보성중학 입학
1925 : 졸업 직전 중학교 중퇴
1926 : 이기영, 한설야 등과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가동맹(KAPF)에 가입
1927 : 임화(林和)라는 필명 사용하기 시작
1928 : <유랑> <혼가> 등의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 카프 중앙위원으로 활동.
1929 : 박영희의 후원으로 동경으로 떠남. 동경에서 [무산자사(無産者社)]에서 활동. 극단 [신건설] 조직
1931 : 귀국. 카프1차 검거시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남.
1931 : 영화 <지하촌>에 주연으로 출연.
1932 : 카프 중앙위원 서기장. 기관지 [집단]의 편집책임.
1937 : [학예사] 대리경영. [사해공론] [인문평론] 편집에 참여
1938 : 시집 <현해탄> 발간
1939 : 학예사에서 <조선 민요선> <문학과 논리> 발간
1943 : [문인보국회] 참여
1943 : 조선영화문화연구소에 촉탁으로 있으면서 <조선영화연감> <조선영화발달사> 편집.
1945 : 8월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직, 서기장.
1946 : 2월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과 합쳐 조선문학가동맹 결성, 중앙집행위원.
1947 : 시집 <찬가> 발간
1947 : 11월 월북, 이후 조ㆍ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1953 : 8월 북한에서 ‘미제(美帝)의 간첩죄’로 이승엽(李承燁) 일파와 함께 처형됨

곡천 구석봉(具錫逢.1936.10.22.∼1988.1.4)

시인⋅소설가. 필명은 곡천(谷天). 아호 향산. 충북 영동읍 설계리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고등학교 시절 학원문학상에 시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가 당선되었으며, 1956년 3인시집 [흑인부락]을 내고 다음해인 1957년 대학 재학 중 [자유문학]에 시 <제목 붙이기 싫은 시>로 등단, 같은 해 개인시집 <피의 역사>를 발간하고, 1960년 [희망사] 역사소설 현상모집에 <아리랑> 당선, 1963년 [동아방송] 개국기념 현상모집에 <차령산맥>이 당선되었다. 그 후 1968년 MBC TV가 개국하면서 시ㆍ소설ㆍ라디오ㆍTV드라마 평론 등으로 활동한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처음으로 MBC 연속방송극으로 성사시키고, MBC의 ‘전설따라 삼천리’라는 프로그램을 당시 고무송 PD와 함께 만들기도 하였다.

개성이 강한 관념시를 발표했다. 시작활동(詩作活動) 이외에도 역사소설, 방송극 등에 손을 대었다. 1991년 영동문인협회와 시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 영동 송호리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작품세계】

구석봉(具錫奉)은 시ㆍ소설ㆍ방송극ㆍ전기 등 여러 장르에 걸쳐 1970∼80년대 한국 문단을 풍미했던 영동 설계리가 낳은 뛰어난 문필가다. 초등학교 때 시조 백선을 모두 외웠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 6ㆍ25의 아픔을 다룬 전쟁시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로 제3회 학원문학상을 받는다.

구석봉은 무엇보다도 고향을 사랑한 시인이다.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농촌지도자연합회를 만들고 가축 기르기에 몰두하였다. 이 때 영동의 특산물인 감나무를 도로에 심을 것은 제의하여 영동의 가로수길이 탄생하게 하였다. 가을마다 감나무가 도심의 한복판에 단아한 정취를 흔들어 놓으면 그야말로 어디 손댈 곳 하나 없는 아름다운 풍경화가 된다.

도시생활에 지쳐 점차 생래적 인간미를 잃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목가적 서정은 신혼부부 침방 같은 행복을 던져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영동을 떠나 외롭게 객지를 떠도는 사람들은 선술집에 모이면 고향 가을하늘의 홍시 얘기로 날새는 줄 모르는 일도 흔할 법하다.

【시】<제목 붙이기 싫은 시<(자유문학.1957) <친절무용지장(親切無用之章)>(자유문학.1959) <푸로페라소년>(자유문학.1959) <곡천군(谷天君)을 매장한다>(자유문학.1960) <설화시대(說話時代)>(월간문학.1969) <미친개>(월간문학.1971.1) <북한산칩거(北漢山蟄居)>(풀과별 9.1973.3) <광인(狂人)춤>(시문학 23.1973.6) <병중일기(病中日記)>(풀과별 24.1974.8) <화형(火刑)>(풀과별 28.1974.12) <흥국사(興國寺) 타령>(월간문학 85.1976.3)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며>(신동아 211.1982.3)

【소설】<미리랑>(희망사.1960) <팔만대장경>(한진출판사.1979)

【방송극】<차령산맥>(동아방송.1960) <제3의 음모>(MBC.1967) <나치독일의 흥망>(DBS.1968) <겟토에서 온 소년>(DBS.1969) <절망은 없다>(MBC.1971)

【시집】<피의 역사>(경향문화사.1957)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유고시집.햇빛출판사.1990)

【소설집】<팔만대장경>(한진출판사.1979)

【저서】<개화 백년의 여인산맥>(수상사출판부.1978)

함석헌(咸錫憲.1901.3.13∼1989.2.4)

종교인ㆍ민중운동가. 평안북도 용천 출생. 함석헌의 소년시절 충격적인 사건은 "일제강점"이었다. 소학교 시절 그는 [일심단]에 가입하였다. [일심단]은 큰 조직적인 저항 단체는 아니지만 뜻 있는 학생들이 모여 일본에게 강탈당한 우리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뜻을 하나로 모아 보자는 의지에 찬 모임이었다.

그 후 함석헌은 당숙 일형이 세운 삼천재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6세에 양시공립 보통학교로 진학하고, 졸업한 후 1916년, 의사가 되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당시 공립학교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함석헌이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면서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때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으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김교신·송두용·정상훈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신앙클럽을 결성하였으며,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에 참여하였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농사학원을 인수, 경영하였으나, 곧 계우회 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다시 1942년 [성서조선]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경찰서에서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해방 이후 1947년 3월에 단신 월남하여 YMCA에서 성서강해를 하였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서 사회평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958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는 자유당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1961년 5⋅16 정변 직후 <5⋅16을 어떻게 볼까>를 통하여 군부 집권 세력을 비판하기도 했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으며, 1963년 귀국한 뒤,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67년에는 장준하의 국회의원 옥중출마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와중에 1976년 명동사건, 1979년의 YWCA 위장결혼식 사건, 1980년 [씨알의 소리] 강제 폐간 사건에 연루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말년에는 평화사상과 비교권적 제도에 공감하여 퀘이커교도로 개종하였다.

1989년 2월 4일 생을 끝마칠 때까지 사회활동 있어서나 사상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전개하기 보다는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그의 종교적 신념, 역사의식, 씨알사상을 정리하였다. 1988년에 <함석헌전집>전 20권이 완간되었다.

함석헌은 1979년과 85년 2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으며, 87년 제1회 인촌상을 수상하였다. 사망 뒤인 2002년에는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함석헌은 종교인⋅사상가⋅재야운동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일생 동안 120여 편의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민중이 참여하는 민족문화창달을 위해 출발한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가 원효로 4가 70번지에 있다.

 
기독교 문필가ㆍ민중운동가. 평안북도 용천 출신. 당숙 일형(一亨)이 세운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德一學校)를 졸업하였다. 1916년 양시공립보통학교(楊市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 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였다.

그 때 안창호(安昌浩)ㆍ이승훈(李昇薰)ㆍ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ㆍ송두용(宋斗用)ㆍ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1947년 3월 월남하여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였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ㆍ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고,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면서 자유당정권에 도전하였다. 1961년 5ㆍ16군사정변 직후에는 ‘5ㆍ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Quaker敎)와의 친밀관계를 굳혔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종교인ㆍ사회운동가. 1916년 양시(楊市)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재학 중 3ㆍ1운동을 맞아 당시 숭덕학교 교사인 함석은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평양에 배포한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1921년 정주 오산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 이때 민족주의자인 안창호ㆍ조만식ㆍ이승훈 등의 영향을 받고 1928년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 1927년 도쿄에서 김교신ㆍ유석동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유학시절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金監三)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아 이후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1928년 귀국 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40년에 평양교회 송산리 농사학원장을 지냈고, 1942∼43년 고향인 용천에서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45년 평안북도 자치위 문교부장을 지냈고, 1947년부터 학교와 단체를 상대로 성서강론을 했다. 1958년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인한 필화사건은 자유당 시절의 대표적 필화사건이다. 5ㆍ16군사정변 이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61년 7월 [사상계]에 〈5ㆍ16을 어떻게 볼까>라는 5ㆍ16군사정변에 해한 한국에서의 첫 비판을 발표해 또다시 필화를 입기도 했다. 1960∼89년에는 퀘이커교 한국대표로 미국 국무부의 초청을 받았다.

1970년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10여 년간 발행인ㆍ편집인ㆍ주간으로 있으면서,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여기에 발표한 많은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을 폈다.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을 역임했고 1985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추천받았다. 제1회 인촌상을 받았다.

묘는 본랴 경ᄀᆘ도 연천군 전곡에 있었는데, 2002년 건국훈장이 추서됨에 따라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되었다.

【함석헌기념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 123길 33-6(쌍문동) 소재. 원래 함석헌이 오래 거주하였던 집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4가 70번지의 39.67㎡(12평) 짜리 작은 집이었다. [씨알의 소리] 탄생지이기도 한 그곳은 6⋅25 전쟁 이후 부산에서 돌아왔을 때 친지들이 마련해 주었다. 함석헌은 1980년대 초 어느 때에 서울 마포로 옮겨 온실의 화초를 가꾸며 살았던 듯하다. 그러던 1983년경 차남 함우용 내외가 살고 있던 도봉구 쌍문동 집에 합가(合家)하여 1989년 2월 타계할 때까지 거주하였다.

2011년 7월 도봉구는 기념관 건립 계획을 수립하였고, 2013년 2월 유족 및 함석헌 기념 사업회와 협약을 체결하였다. 2014년 9월 공사를 착공하여 2015년 9월 함석헌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함석헌 기념관은 연면적 248.67㎡로 지하 1층 ~ 지상 1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 1층은 세미나실, 게스트룸, 도서 열람실이 있고 지상 1층에는 전시실, 유리 온실, 앞마당 쉼터가 있다.

【경력】

1928년 오산학교 교사
1934년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연재(∼1935)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
1940년 평양 송산리 농사학원장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
1945년 평북 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
1957년 씨알농장 시작
1960년 퀘이커교 한국대표(∼1989)
1961년 <5ㆍ16을 어떻게 볼까> [사상계]에 발표
1970년 월간 [씨알의소리] 발행, 편집인 겸 주간
1973년 씨알농장을 정리하여 모산의 구화 고등 공민학교 시작
1974년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 시국선언
1979년 세계퀘이커구호기구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80년 [씨알의 소리] 계엄 당국으로부터 폐간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1989)
1985년 '민주제도 쟁취 국민운동대회' 김재준 목사와 공동대회장

시와 시론(시와 시론(제1집.1957년 년간시집)(김관식.김수영.설창수.박재삼.서정주(외)/한국시인협회/정양사,1958년(초판)/349쪽/하드커버)

박인환(朴寅煥.1926.8.15∼1956.3.20)

      시인. 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ㆍ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ㆍ이한직(李漢稷)ㆍ김수영(金洙暎)ㆍ김경린(金璟麟)ㆍ오장환(吳章煥)ㆍ김기림(金起林)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김병욱(金秉旭)ㆍ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ㆍ김규동(金奎東)ㆍ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ㆍ김경린ㆍ양병식(梁秉植)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未埋藏)>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30세로 요절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세형(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연보】

▶1926년 강원도 인제 출생
▶1944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 3년제 입학
▶1945년 광복 후 학교를 중단하고 상경.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를 개업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
▶1948년 입춘을 전후하여 [마리서사]를 폐업. 김경린, 양병식,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과 동인지 [신시론] 제1집을 발간. 자유신문사에 입사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5인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경향신문사에 입사. 동인 그룹 [후반기] 발족.
▶1951년 경향신문사 본사가 있는 부산과 대구를 왕래 종군 기자로 활동. [후반기] 동인 활동.
▶1952년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대한해운공사에 취직
▶1953년 환도 직전. 부산에서 [후반기]의 해산이 결정됨
▶1955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을 여행. 귀국 후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 대한해운공사 퇴사. <박인환선시집(選詩集)>간행
▶1956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

【유적지】

 (1) 생가터 : 강원도 인제군 남북리 303번지에서 살았다는 이야기(확인 불명)
 (2) 시비 : 군축령에 세워졌던 시비는 도로 확장 관계로 철거, 군청 창고에 보관

【시】<거리>(국제신문.1946.12) <남풍(南風)>(신천지.1947.7) <인천항>(신조선.1947.4.1) <군상(群像)>(1947)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1948)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신천지.1948.2) <지하실>(民聲.1948.3) <정신(精神)의 행방을 찾아>(民聲 33.1949.3) <열차>(개벽 81.1949.3) <종말>(신경향.1952) <눈을 뜨고도>(신천지.1954.3) <목마와 숙녀>(박인환시선집.1955) <세월이 가면>(박인환시선집.1955) <투명한 바라이티에>(현대문학.1955.11) <뇌호내해(瀨戶內海)>(문학예술.1956.4) <침울한 바다>(현대문학.1956.4) <죽은 아포롱>(동아일보.1956.4.17)

【평론】<아메리카 영화시론(映畵試論)>(신천지.1948.1)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신천지.1948.10) <‘기상도 전망’-김기림 장시집 서평>(신세대.1949.1) <전후(戰後) 미영(美英)의 인기배우들>(民聲 40.1949.11) <미(美)ㆍ영(英)ㆍ불(佛)에 있어 영화화된 문예작품>(民聲 43.1950.2) <한국영화의 현재와 장래: 무세(無稅)를 계기로 한 인상적인 전망>(신천지.1954.5) <현대시의 변모>(신태양.1955.2)

【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合唱)>(공저.도시문화사.1949) <박인환선시집>(산호장.1955.10) <목마와 숙녀>(근역서재.1976)

박거영(朴巨影.1916.4.9.∼  )

시인. 본명 박귀손(朴貴孫), 함경남도 원산 출생. 1943년 중국 상해국민대학 졸업. 상해에서 언론계에 투신, 기자로 있다가 [대한일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귀국, 양품점 ‘대지백화점’을 경영하는 한편, [시인의 집]을 운영하며 시낭독회와 연구회를 여러 번 개최하고 출판사 [인간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30년 [조선중앙일보]에 장시 <공장의 화구(火口)> 등 시 5편을 발표하면서 데뷔.

【작품세계】

주로 이념적 주제에 경사된 작품을 썼으며 자연 공간의 성격을 빌어 절망을 시화했다. 중기 이후부터는 장시를 발전시킨 서사시 <절정(絶頂)>을 발표하여 새롭게 평가되었다.

그의 시는 몽타쥬 방식을 이용해 작품세계의 입체화를 꾀한 것에 특징이 있다. 주로 장시를 많이 썼으며 서정적 시정신과 서사적 스토리를 융합하고자 노력했다

【시】<목단꽃 피었기에>(신천지 23.1948.2) <나의 위치로 가랴>(민성.1948.4) <기원(祈願)의 서(書)>(백민 15.1948.8) <동수(冬愁)>(자유신문.1949.1.18.) <창공에 부치는 노래>(신천지 33.1949.2) <태양 없는 지구 위에서>(민성 32.1949.3) <인간 옷도세이>(동아일보.1956.8.16.) <황초령(黃草嶺)><신천지 47.1950.6) <모르모트의 죽음>(현대문학 28.1957.4) <영원한 시간>(현대문학 40.1958.4) <유언(遺言)>(현대문학 42.1958.6) <쑥대밭에 서서>(현대문학 48.1958.12) <나부끼는 깃발이여>(사상계.1958.12) <생명과 인식(認識)을>(자유문학.1959.2) <나는 지구의 고아(孤兒)이다>(현대문학 69.1960.9) <바로 내 앞에서 불타고 있다>(현대문학 79.1961.7)

【소설】<절정(絶頂)>(인간사.1960)

【수필】<일요일 환상시>(현대문학 22.1956.10) <춘수(春愁)>(현대문학 29.1957.5)

【시집】<바다의 합창>(시문학사,1949) <악(惡)의 노래>(국제신보사,1951) <인간이 그립다>(인간사,1955) <장시악(長詩惡)의 노래>(인간사.1956) <고독한 반항자>(인간사,1958) <절정(絶頂)>(인간사,1960) <모르모트의 죽음>(1963) <인간적 환상>(인간사.1965) <나를 스쳐가는 것들>(인간사.1967)

【수필집】<나를 스쳐가는 것들: 체험적 명상록(冥想錄)>(인간사.1967) <말하고 가거라>(구민사.1986)

【저서】<한하운시감상(韓何雲詩感想)>(문창사.1971)

【번역서】<파리의 하늘>(시집.미누드루에 작.1956.인간사) <슬픔과 사랑의 철학: 현대인의 처세론>(쇼펜하우어 저.신조문화사.1964) <이별 없이 살았으면: 가엾은 여인의 수기>(田宮虎彦 저.오륜출판사.1972)

1944년 5월에 조선도서출판주식회사가 편찬하여 일어로 간행한 단편작품집인 [반도작가 단편집(半島作家 短篇集)](143P) 단책으로 정비석,정인택,이광수(香山光郞),조용만,高野在善,장덕조,유진오,이무영 등 대표적인 친일조선인 작가 8명의 작품이 실려 있다.상태 양호하다.
<크기> 12.8×18.3cm

설정식(薛貞植.1912.9.18.∼1953.8.30)

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생. 연희전문(延禧專門) 졸업. 미국 오하이오주 마운트유니언대학ㆍ컬럼비아대학 등에서 영문학을 연구했다.

그의 문학활동은 광복 후 1947-1948년에 발간된 3권의 시집 <종(鐘)> <포도(葡萄)> <제신(諸神)의 분노(憤怒)> 등으로 집약되는데, 여기서 그는 아무 것도 초월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관념으로서 민족의식을 배면에 깔고, 이를 형상화시키고 있다. 민족의식을 직설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습작기를 거쳐 <해바라기> 연작계열에서 천도(天道)로서의 태양과 새 역사 창조의 이념으로서의 태양을 밝음과 생명력의 근원으로 보고 이를 노래한다. 이것이 <종>의 세계로 오면, 한 단계 높은 상징성을 획득하여 심화된 민족의식의 발현으로 나타나며, 여기서 서정적 자아인 ‘나’를 역사 위에 스스로 내세운다.

그가 도달한 마지막 단계인 <제신의 분노>에서 그의 시는, 민족의 앞날에 대한 중후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지니게 된다. 광복 후,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을 지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고, 6ㆍ25전쟁 때 자진하여 인민군에 입대, 월북했다. 휴전회담에 북한 쪽 통역관으로 참가했고, 1953년 남조선노동당 숙청 때 간첩죄로 임화 등과 함께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력】

▶1912년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생
▶1929년 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사건에 가담한 이유로 퇴학
▶193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건너감
▶1932년 연희전문학교 입학
▶1936년 미국 오하이오주 마운트 유니온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이후 콜롬비아대학에서 2년간 연구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청 근무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외국문학부 위원장
▶1948년 [서울 타임즈]라는 영자(英字) 신문 편집자
▶1950년 월북하여 이후 숙청됨

【시】<거리에서 들려주는 노래>(동광.1932.2) <새 그릇에 담은 노래>(동광.1932.3) <물 긷는 저녁>(신동아.1932.8) <고향>(신동아.1932.8) <여름이 가나보다, 가을을 그리는 마음>(동광 38.1932.10) <가을>(조광.1937.10) <우화(寓話)>(자유신문.1946.1.14.) <피수레>(자유신문.1946.3.4.) <단조(短調): 끊어진 줄은 투기지 말라>(신세대 2.1946.5) <종(鐘)>(문학.1946.7) <사(死)>(문학가동맹주최 강연회.1946.7) <달(처녀 중에서)>(동아일보.1946.7.23.) <해바라기>(동아일보.1946.11.26.) <영혼>(자유신문.1947.1.5.) <스켓취>(民聲.1947.11) <태양도 천심(天心)에 머물러>(조선춘추.1947.12) <무제(無題)>(민주공론.1948.4) <붉은 아가위열매를>(조광.1948.6) <제신(諸神)의 분노(憤怒)>(문학.1948.7) <무(舞)>(개벽 79.1948.8) <만주국(滿洲國)>(신천지 30.1948.10) <새해에 바치는 노래>(조광.1948.12)

【소설】<단발>(조선일보.1932.4.27.) <청춘>(한성일보.1946.5) <프란시스 두셋>(동아일보.1946.12.13.∼22.전9회 연재) <척사(擲柶) 제조자>(민성.1948.1) <해방>(신세대.1948.1∼5) <한 화가의 최후>(문학 7.1948.4) <해방>(신세대.1948.12)

【희곡】<중국은 어디로>(현상당선작.중앙일보.1932.1.1.∼10.전9회 연재)

【평론】<현대미국소설>(조광 60.1940.10) <토마스 울프에 관한 노트>(인문평론.1941.2) <김기림(金起林) 시집 ‘바다와 나비’:서평>(자유신문.1946.5.6.) <‘백록담’을 읽고>(자유신문.1946.12.30.) <시와 장소>(중앙신문.1947.10.26.) <문학과 기교>(중앙신문.1947.10.26.) <여성과 문화>(신세대 22.1948.2) <시인 정지용을 방문하다>(신세대.1948.2) <시의 위치>(신인.1948.3)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시>(조선중앙일보.1948.6.29∼7.1) <햄릿에 관한 노트>(학풍.1950.5)

【시집】<종(鐘)>(백양당,1947) <포도(葡萄)>(정음사,1948) <제신(諸神)의 분노(憤怒)>(신학사,1948)

【소설집】<청춘>(민교사.1949)

【번역】<마(魔)의 민족>(토마스 만.문학 2.19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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