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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조용한 가족

by 똥이아빠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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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가족
 
시간이 흘러 다시 봐도, 가끔 다시 봐도 재미있는 영화, 잘 만든 영화다. 요즘 이런 웰메이드 코믹 잔혹극을 보기 어려운 건 왜 그럴까? 재능 있는 감독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극장 시스템, 영화 제작 시스템의 변화가 원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용한 가족' 만큼 잘 만든 가족 영화로는 '고령화 가족'이 있다. 두 영화는 장르가 다르지만, '가족'이 중심이고 주제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두 영화는 큰 웃음을 주는 재미가 있고, 연출, 연기 등 모든 면에서 고르게 훌륭하다. '조용한 가족'이 코믹 잔혹극이라면, '고령화 가족'은 코믹 막장극이다. 두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겹치지 않지만, 출연 배우들 면면히 한국 최고 배우들이어서, 그들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이 크다.
'조용한 가족'은 1998년에 개봉했는데,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이다. 시나리오는 제1회 '막둥이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작품을 김지운 감독이 연출했다. '막둥이 시나리오 공모전'은 이창동 감독 데뷔작인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막둥이' 역할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긴 한석규 배우가 기금을 출연해 만든 시나리오 공모전이다.
영화 속 시기는 1996년 무렵으로 보이는데, 영화에서 줄곧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보도가 나오고 있던 걸로 보아 시기를 알 수 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1996년 9월 18일부터 이들을 소탕한 1996년 11월 5일 사이를 말한다. '안개 산장'이 있는 지역은 영화에서도 지도에 '서종면'이 나오고, 엔딩 타이틀에서 장소 협조를 한 곳이 '서종파출소', '양수 삼성의료원', '고동산 농원' 등이 나오고 있어 양평군 서종면이 확실하다.
 
한 가족 여섯 명이 산장을 매입해 등산객을 상대로 숙박업과 식음료 장사를 시작한다. 이 가족은 가진 재산-아마도 아버지의 퇴직금-을 모두 산장 매입에 투자했는데, 산장 앞으로 도로가 생긴다는 이장의 말을 믿고 덥석 매입했다. 장사도 처음이라 어설프고 낯선데, 손님도 오지 않아 이들 가족은 초조하다.
영화는 산장을 매입하고, 숙박하러 왔다가 자살하는 손님 때문에 겪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이 가족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시각을 조금 옮겨 산장에서 자살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드러난다.
산장의 첫 손님이 하필 자살한다. 영화에서는 이름도 없지만, 유명한 연극배우 기주봉이 '자살남'으로 등장한다. 하필 첫 손님이 자살한 것도 기겁할 일인데, 산장의 주인인 강대구의 말대로 산장에서 자살했다는 소문이 나면 손님이 올 리 없으니, 이 가족이 자살한 남자를 암매장하는 행동은 법적으로 옳지 않아도, 당위가 있다. 이때 자살한 남자는 단역으로 등장해 죽는 것으로 간단히 지나가지만, '자살남'의 삶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많은 이야기가 나올 듯하다.
'자살남'은 이미 단단히 각오한 듯, 톱과 숫돌을 준비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톱과 숫돌을 준비하는 건 웃기면서 비통한 감정이 교차한다. '자살남'은 살면서 이미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고, 몸과 마음을 기댈 곳이 없어 막막한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 심정이었으리라.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은 죽음이었고, 외롭고 고독한 삶을 마감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두번째 손님은 젊은 남녀인데, 이들은 동반 자살을 계획하고 일부러 외떨어진 산장으로 온다. 이들은 격렬한 정사를 치르고 자살하는데, 산장 가족이 두 사람을 암매장하려는 순간, '동반남'이 깨어나고, 산장의 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살인을 한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는 일이 발생하면서,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려는 산장 가족의 행동은 끔찍하지만 어설퍼서 웃기는 상황으로 돌변한다.
'눈길남'(정웅인)의 죽음은 살해보다는 사고사에 가깝다. 산장의 큰딸 미수와 눈이 맞아 미수와 육체 관계를 가지려 시도하던 '눈길남'이 미수를 강제로 추행하는 장면에서 그의 오빠 영민(송강호)에게 틀키자 두 사람이 격투를 하는 과정에서 영민이 '눈길남'을 떠밀고, 가까스로 나무를 잡았지만,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산장에서 사람들이 실종되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이 산장에 잠복근무를 나오는데, 이날 하필이면 회장과 그의 딸이 도착하고, 이장은 재산을 노리고 회장과 이복 여동생을 살해하기로 산장 주인 강대구와 모의한다. 하지만 회장의 딸 은주를 흠모하는 창구(최민식)가 두 사람을 빼돌려 목숨을 살리고, 뒤늦게 도착한 킬러는 엉뚱한 방으로 들어가 잠복 근무하던 파출소 순경을 살해한다.
 
산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살인사건은 계획하지 않았고, 의도하지 않은 살인이라는 점에서 '코믹'하다. 재산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이복 남매의 암투가 등장하지만, 이들의 의도 역시 실패하고, 순진한 경찰은 '킬러'에게 죽임을 당하고, 킬러는 산장의 가족에게 맞아 죽고, 사건을 꾸민 이장 역시 산장의 가족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이건 모두 자신들이 저지르거나 행동한 행위의 결과이므로 필연이다. 다만, 정보를 캐러 온 순진한 경찰의 죽음이 유일하게 안타까울 뿐이다.
산장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이들의 사체가 산장 주변에 대충 묻히면서 산장의 가족들에게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것처럼 보이는데,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앞부분에서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산장의 현실로 끌어들여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산장에서 죽은 여러 명의 사체는 경찰과 군인들에게 발각되는데, 죽은 사람은 '강릉 무장공비'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판정된다. 이 장면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산장 가족의 장남 영민(송강호)이 병원 입원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미친 듯이 웃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기승전결을 마무리하는 '수법'으로써의 장면으로도 뛰어나지만, 그 시대를 희화화하는 의미를 갖고 있기에 더욱 놀랍고 뛰어나다.
즉, 산장에서 발생한 여러 건의 살인 사건은 개별적으로 수사하거나, 살인 사건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건 '강릉 무장공비 침투'라는 국가적 중대 사건 앞에서 '북괴 간첩'의 잔인함과 흉포함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하나의 클리셰로 쓰고자 하는 정권의 의도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산장 근처에서 사체를 발굴하는 장면은 텔레비전 뉴스로 보여주는데, 이 장면은 '산장 가족'의 사적인 사건이 사회적,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발전했다는 걸 뜻하며, 산장 가족이 저지른 살인이 '북괴 무장공비'의 짓으로 전가되면서, 국가가 나서서 이념과 체제 대결을 위해 살인 사건을 체제 홍보에 악용하고 있음을 조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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