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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09] 중국정치사로 본 천(하늘)의 의의 - 김상기

by 똥이아빠 2011.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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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상기는 서울대 문리대학교 학장일 때 이 글을 썼다.

최근 '데일리 전북'에 실린 기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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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사학의 개척자 김상기(金庠基)


2009년 11월 07일 (토) 19:03:13 데일리전북  dailyjeonbuk.com

 

   
 
   
 
시대 : 현대 
출생지 : 전북 김제시 백산면 
출생일 : 1901년 11월 
사망일 : 1977년 
호 : 동빈(東濱) 
정보제공 : 김제시 문화관광과 063-540-3172 

소개 

한국 근세 정통사학의 개척자요 태두로 일컬어지는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그는 가장 한국적인 선비로서, 우리나라 역사학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특히 사학을 전공하는 후학들에게 뛰어난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깨끗한 몸가짐으로도 귀감이 되고 있다. 

김상기는 일제가 한반도의 강점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1901년 11월 김제시 백산면 하리 수각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한말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김연익(金然翊). 김연익은 이 일대에서 이름난 토박이로 학행(學行)과 행실이 남달랐으며 덕망과 신의를 갖추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집안이 청빈하면서도 비교적 농사에 여유가 있어 김상기는 어려서 구애없이 생활할수 있었다. 그는 6살때인 1907년부터 한학을 익혔다. 아버지로 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운 것이다. 그때 배운 동몽선습은 아버지가 가장 역점을 둔 과목으로 여기에 나오는 오륜(五倫)이나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세계(世系)가 자신의 흥미를 끌었다고 후에 술회한바 있다. 

이어 집에 글방을 마련하여 소학에서 대학, 논어 까지 6년 동안 섭렵하였다. 그리고 1913년 12살 나이에 김석종의 차녀 김기(金基)와 결혼했다. 결혼 이듬해인 1914년 최보열(崔輔烈 1847-1922) 문하에 들어가 2년간 한문수업을 받았다. 최보열은 만경출신으로 이름있는 유학자요 진보적 실학자였다. 

1917년 다시 전주로 나가 최학자로 유명한 최병심(崔秉心 1874-1957) 문하에서 3년을 보냈다. 최병심은 전주에 한벽당을 짓고 만년을 보낸 최담의 후손으로 전주 최씨 5백년의 유맥을 이은 큰 선비였다. 이 13년 동안 그는 한학에 대한 탄탄한 토대를 다져, 훗날 동양사 연구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이처럼 한학에 조예를 쌓은 김상기는 일제의 침략이 우리 민족의 무식한 소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신학문을 노크했다. 훌륭한 지식을 연마해 일제에 대항해야 하는데 한학만으로는 그 세계가 너무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 

이같은 뜻을 굳힌 김상기는 1921년, 20살이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협성(協成)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1년 과정을 마치고 동광(東光)학교 2학년에 들어가 다시 1년 과정을 마쳤다. 이어 1923년 보성(普成)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보성 고보 시절 그는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렸다. 신학문에 목말라 있던 그로서는 역사와 지리등 모든 학과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졸업할 때 까지 한번도 수석자리를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보성고보는 뜻있는 조선인 교사들이 많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그도 그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이때 “비록 일제에 의해 겨레와 강토가 짓밟히고 있지만 민족은 영원하다. 언젠가 되찾을 겨레와 강토를 위해 보다 많은 지식을 쌓고 그 토대 위에서 우리 민족의 영생을 다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1926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早稻田) 제2고등학원에 들어갔다. 예과 격인 이곳에서 2년 동안 발군의 실력을 보인 그는 1928년 와세다대 사학과에 합격했다. 

이 무렵 그는 외국 역사학자들의 저서나 논문을 섭렵했고 특히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동양사 전반에 걸친 학문적 이론이나 연구에도 심혈을 쏟았다. 

이와 함께 그는 학문적 탐구 못지않게 많은 문학지를 읽으며 시와 수필, 소설 등 문학분야에도 심취했다. 같은 고향 이웃마을 친구인 윤제술(尹濟述 1904-1986)등 조선인 유학생들과 문학동우회지인 동성지(同聲誌)를 함께 펴내기도 했다.

윤제술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 무렵 동빈과 매일 만났으며 일요일에는 긴 시간을 함께 술을 같이 들며 인생과 철학, 그리고 기울어 가는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김상기는 이때 이 잡지에 일찍 여읜 어머니를 그리는 ‘어머니 묘를 찾아서’라는 시를 발표했다. 

와세다 대학에 다니던 1930년 그는 슬픈 소식을 접해야 했다. 다름 아닌 아내의 죽음이었다. 상처(喪妻)의 아픔이 아물지 않은 1931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평소에 품고 있던 역사전수의 소명을 후학들에게 전하기로 했다. 그는 “자기 민족의 버젓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발양(發揚) 못하는 민족은 역사민족의 자질이 없으며 그것을 깨우치고 그 긴한 역사성을 애국과 애족에 결부시킴으로써 우리는 잃었던 나라를 찾을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1년 서울의 중앙기독청년학교 교사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이 학교에서 교사생활 1년만에 정화숙(鄭和淑)과 재혼했다. 장인되는 정춘수(鄭春洙)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철저한 신앙인이자 애국지사였다. 

1933년 10월 그는 사학 명문으로 꼽히는 중앙고보로 자리를 옮겼다. 

이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그는 우리나라 역사학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에 깊숙히 관여했다. 1934년 5월 조직된 이 학회는 당시 일본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 언어 문학등 식민사관을 불식하고 우리 역사를 우리 손으로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발기인은 고유섭 김두헌 김상기 김윤경 문일평 백낙준 손진태 신석호 이병기 이병도 이상백 이선근 이윤재 이은상 이희승 조윤제 최현배 등 24명으로 당시 국학관련 명사들이 망라되었다.

김상기는 이 학회에서 발행하는 진단학보에 1934년과 1935년 ‘외방(外方)에 끼친 선인들의 발자취’와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주로 하여’등 10여편의 논문을 발표, 역사학자로서의 위치를 다져 나갔다. 

그의 실력이 점차 알려지면서 1939년부터 3년간 이화여전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그의 명강의에 학생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그해 10월 그는 경성대학(京城大學·현 서울대) 예과 동양사 강사를 맡았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서지학회(書誌學會)를 조직했다. 이 학회는 역사의 실증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문헌을 중시, 흩어진 우리나라 역사문헌들을 집대성하고 문헌사학이 학문적 뿌리를 내리는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후 그는 1962년 1월 정년퇴직시 까지 서울대학에 몸담으며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47-1953년 6년 동안 박물관장, 1949-1960년 11년 동안 고등고시위원, 1952-1957년 문리대 학장을 역임했다.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 1955년 국사편찬위원, 1957년 교수요목제정심의위원및 도서번역심의위원, 1958년 교수자격 심의위원, 1961년 문화재보존위원회 부위원장및 독립기념사업회 전문위원 등을 맡았다. 

정년퇴직후에도 서울대 명예교수와 성균관대 동아대 건국대 초빙교수로 정력적인 연구활동을 계속했다. 또한 한국중국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1962년 학술원상 수상과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서울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에는 역사관련 종합학회로 백산학회를 창립, 초대회장으로 학회를 이끌었다. 1967년에는 자유중국 중화학술원으로 부터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67-1970년 한국고고학협회 회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접었다.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해온 그는 1977년 3월, 76살을 일기로 영면했다. 

*동빈의 학문세계와 제자들 

동빈 김상기는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1896-1991), 남창(南倉) 손진태(孫晉泰 1900-?) 등과 함께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1세대로 친다. 

그러면 그가 학계에 끼친 영향과 학문적 업적은 무엇일까. 

동빈은 그 이전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등이 암울한 일제시대에 항거해, 민족사학으로 민족정신을 불러 일으켜 나라의 독립을 강조하던 것과 달리 실증문헌사학을 강조했다. 그래서 과학적 사관 입장에서 정통사학의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민족사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해서 신민족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후학들, 특히 서울대 출신 학자들은 동빈이 일제때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지낸 이병도의 정치적 역량에 밀린 점이 없지 않으나 학계에 끼친 학문적 영향과 존경심은 훨씬 컸다고 입을 모은다. 

전북대 사학과 박천식·강길원 교수 등에 따르면 백제사와 고려사 그리고 동학연구에 있어 그의 학문적 혜안은 독보적이었다는 것. 

첫째 백제의 영역이 중국의 산동지방에 까지 펼쳐졌다는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은 당시 학계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학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 

둘째 고려시대에 풍수지리사상이 아주 중요했다는 주장은 오늘날 고려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테마중 하나라는 것이다. 특히 그의 고려사 연구는 다루고 있는 규모의 방대성이나 중국 역대 사서(史書)의 충실한 검토 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세째‘동학과 동학란(1947년 대성출판사)’에 대한 연구는 동학혁명을 학술적으로 연구한 우리나라 최초의 명저로 오늘날 동학연구의 디딤돌로 손꼽히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동학란을 동학혁명이라 정리했고 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을 ‘장군’이 아닌 ‘선생’이라 칭했다. 전통적으로 문민성(文民性)이 우리의 바탕이고 그가 사상과 이념을 겸비한 선비였기 때문에 선생이라는 호칭이 적절하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빈의 한문강독은 충실하고 정확해 그를 덮을 학자가 없었다는데 모두가 동의한다. 

또한 그의 강의는 명강의로 꼽히면서도 학문적 자세가 꼿꼿해, 1분의 에누리가 없었고 농담도 별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흠이라면 남에게 바른 소리를 잘했고, 한번 틀리면 사람으로 알지를 않고 붙여주지를 않는 학같은 개결(介潔)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東學과 東學亂(1947) ’中國古代史綱要(1948) ‘東方文化交流史論攷(1948)’ ‘東洋史槪要(1951)’ ‘中國先史時代의 文化(1954)’ ‘高麗時代史(1961)’ ‘東方論叢(1974·1984 重刊)’ ‘東方文化史論攷(1976)’등 8권의 저서와 50여편의 탁월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 전주 완산공원에 세워진 海鶴 이기(李沂)의 추모비등 명비문(銘碑文) 20여점과 40여 책의 서문을 남겼다. 

그는 작고하기 전까지 변변한 집한칸 없이 살았으면서도 애써 모은 장서 1만여권을 서울대 도서관에 기증했다. 

그의 제자로는 ‘한국통사’를 쓴 한우근(韓우劤·前서울대 교수·작고) 을 비롯 ‘한국 고활자연구’의 손보기(孫寶基·연세대·현 단국대 석좌교수), 서양사의 차하순(車河淳·서강대 명예교수), ‘한국사신론’의 이기백(李基白·한림대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경력 

▲1907-1920년 한문수학 
▲1921년 협성학교 입학 
▲1923년 보성고보 편입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 입학 
▲1931년 중앙기독청년학교 교사 
▲1933-1945년 중앙고보 교사 
▲1934년 진단학회 조직 
▲1939-1941년 이화여전 강사 
▲1945-1961년 서울대학교 교수 
▲1947-1953년 서울대 박물관장 
▲1949-1960년 고등고시위원 
▲1952-1957년 서울대 문리대 학장 
▲1954년 학술원 회원 
▲1955년 국사편찬위원 
▲1961년 문화재보존위원회 부위원장 
▲1962-1969년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1962-1964년 한국중국학회 회장 
▲1962년 학술원상, 문화훈장(대한민국장) 수상 
▲1966년 백산학회 회장 
▲1967-1970년 한국고고학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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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9월호에 실린 글은 비교적 짧은 글이다. 본문의 일부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상고 한족 사이에 행하던 천(하늘)에 대한 관념은 다른 원시민족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인격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중략)

풍우 연사의 농흉, 전쟁의 승패 내지 읍성봉책에 대한 길흉 등은 모두 천(하늘) 즉 제(황제) - 애초에는 천을 제라하였는데 뒤에 왕이 된 자가 하늘에 아뢰게 됨을 따라 제의 명칭이 왕에게도 붙게 되고 천과 왕을 구별키 위하여 천을 상제라고 일컫기에 이르렀음 - 의 상재하는 바로 되었다. 그리고 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희로의 감정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제천까지 흠향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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