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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소설을 읽다

카뮈의 '이방인'

by 똥이아빠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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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방인'

 

요즘 출판계에서 '이방인'을 둘러싼 번역 논쟁이 한창이다. 논쟁을 시작한 '새움'의 새로운 번역 '이방인'을 읽진 않았지만, 예전에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몇 번 읽은 것과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김예령 번역으로 다시 읽은 느낌은 이렇다.

오늘 읽은 '이방인' 이전에 읽은 기억이 벌써 십 수년 전이다. 10대, 20대, 30대에도 '이방인'을 읽었으니 적어도 서너 번은 읽은 셈이다. 이번에 읽은 '이방인'의 느낌이 예전에 읽었을 때와 거의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내가 그동안 읽었던 '이방인'에 관한 느낌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번역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당연하다. 김화영 번역본을 비판한 '새움'의 이정서라는 사람의 번역도 당연히 오류가 있을 것이다. 다만, 번역이 오역투성이라면 문제일 것이고, 원본을 과잉 해석하거나 의도적 왜곡을 하는 경우라면 충분히 문제 삼을 일이지만, '번역'에 충실한 결과에도 오류가 생긴 것이라면 수정본을 내면 된다.

 

카뮈는 말했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예전에 몰랐던 것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다. 까뮈는 문명사회라고 하는 프랑스에서도 '개인'의 감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 '개인'을 재단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드물지만 있다. 나도 그런 드문 사람에 속한다. 사람들은 슬픈 감정의 표현이 반드시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기분좋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로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태어나서 그 사이 불과 몇 년을 제외하고는 50년 이상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누구보다 어머니를 잘 알고, 또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사실만큼 살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의료행위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다. 그것은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따라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삶을 마치는 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장례를 치르고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야 어머니의 부재가 마음 한켠을 아리게 만들었고, 감정적으로도, 실존적으로도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늦게 생성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 곧바로 냉정하고 이기적인 자식새끼로 매도되어야 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개인'의 감정이란 이해나 용납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카뮈와 함께 프랑스의 지성으로 알려진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제목에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선언했다. 전후(제2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개인의 실존적 발견은 당시로서는 당연히 충격적 사건이었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과 2차대전의 사이에 근대의 물결이 일렁였으나 민주주의와 함께 파시즘이 대두되면서, '개인'을 발견하는 시간이 늦어지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의 허무함과 충격은 개인의 존재를 내면으로부터 발견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그 선두에 까뮈와 사르트르 같은 작가들이 나타나게 된다.

까뮈가 발견한 실존적 인간, 실존적 인물이 뫼르소로 대표되는데,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유럽의 근대적 인간 즉 '개인'과 '개인주의'를 만나지 못하게 되고, 근대 유럽의 민주주의의 이행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현대적 모델인 '개인주의자' 뫼르소가 근대적 사회분위기에 질식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까뮈는 뫼르소가 죽는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거짓말은 뫼르소를 둘러싼 상황이기도 하지만, 뫼르소가 가지고 있는 감정에 관한 것이 더 크다.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았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숨기거나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뫼르소의 태도와 표현에서 두려움을 느꼈고, 자신들과 다른 '이방인'이라는 것에 공포를 갖고 경계했으며, 결국 죽이게 되는 것이다.

뫼르소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해서까지도 자책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것이 바로 '실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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