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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유럽영화

퐁뇌프의 연인들

by 똥이아빠 2011.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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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네프의 연인들 CE - 10점
레오 까낙스 감독, 줄리엣 비노쉬 외 출연/이지컴퍼니


영화 ‘퐁뇌프의 연인들’을 보고

  아침 일찍 중앙극장으로 갔다. 바통모회원들의 단체관람이 있을 거라는 공고와 함께 영화가 퍽 잘되었다고 꼭 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오랫만에 바통모 회원들도 만날겸 중앙극장 앞으로 갔으나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분명 오기는 했으나 얼굴을 모르니 서로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몇 얼굴을 아는 사람들만 만나서 들어간듯 하다. 나는 혼자서 영화를 봤다.
  「퐁뇌프의 연인들」
  사람들은, 아니, 대중매체에서는 이 영화가 매우 훌륭한 영화라고 격찬을 했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로 이 영화는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아무런 메세지를 담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가 제작비만 많이 들이고 일류배우를 쓴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그렇게 자랑하는 엄청난 제작비는 그야말로 과소비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보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퐁뇌프 다리’는 오랜 전설을 간직해 오고 있다. 그것은 ‘퐁뇌프 다리’에서 만난 연인들의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전설인데, 이 영화도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 졌다.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절대 고운 눈길을 줄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며 해결방법도 그러하다. 근본을 알 수 없는 부랑아 ‘알렉스’와 부르조아 집안에서 태어나 첫사랑에 실패하고 심한 병으로 실명해가는 한 여성 ‘미셀’이 만나서 사랑을 이룬다는 것이 뼈대인 이 영화는 그러나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나라에 걸맞지 않는 자본주의적 해석과 논리의 관철로 보는 이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미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자신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그저 도움을 받는 정도의 친절에 지나지 않는다. 미셀이 떠나가면서 알렉스에게 남긴 낙서가 그것을 말해준다. ‘나는 단 한번도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대령의 딸로 태어나 미술을 전공한 부자집 딸이 근본도 알 수 없는 부랑아를 사랑한다는 것부터 모순이다. 물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 그런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어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식을 넘어서고 있는 발상이다. 게다가 미셀은 아버지가 자신의 눈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광고로 알리자 아무런 미련없이 알렉스를 떠나가버리고 만다.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쉬울 때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면 언제든지 훌쩍 떠나버리는 이런 부르조아적 사랑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셀에게 있어서 고통과 절망이란 첫사랑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내부에서 용암처럼 녹아내리는 처절한 고뇌도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된데서 온 절망을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지니던 총을 강에 던져버리자 - 실제로는 알렉스가 감추었다 - 첫사랑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고 만다.
  그런 면에서 알렉스의 사랑은 훨씬 진지하고 아름답다. 그는 사랑의 표현을 매우 거칠게 하지만 거짓없이 미셀을 사랑하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첼로를 켜는 남자를 내쫓고 미셀을 찾는 포스터를 불태우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는 등, 여려가지로 잘못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알렉스가 미셀을 향해 사랑한다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이며 진지하다. 하지만 그에게도 문제는 있다. 그는 언제나 퐁뇌프 다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거리에서 물건을 훔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인생을 조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그가 한 여성을 만나면서 삶의 변화를 이르키는데, 미셀이 떠나가고 나서 그는 더욱 사람다워진다. 그것은 알렉스가 포스터를 불태우다가 사람을 다치게 한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일으키는 변화이다. 실제로 그가 퐁뇌프의 다리에서 생활하던 것과 비교한다면 그는 오히려 감옥 안의 생활이 더 풍요하고 보람이 있는 듯하다. 깔끔한 외모와 기술을 배우는 모습들이 부랑자를 ‘교도’하는 매우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가 한 여성을 사랑함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물론 옳은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 바로 그런 곳에서 드러난다. 반드시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감독은 억지로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애매모호한 결말을 짓는다.
  삼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알렉스와 눈수술을 받아서 더욱 아름다와진 부르조아 미셀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퐁뇌프 다리에서 만난다. 그리고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미셀이 돌아간다고 말하고 알렉스는 가지 말라고 억지를 부린다. 이런 단편적인 흐름에도 무리가 있을 뿐더러 한번도 알렉스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훌쩍 떠나버린 미셀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만, 자꾸 떠오르는 생각때문에 감옥에 갖혀있는 알렉스를 이년만에 찾아왔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부르조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동정하고 연민의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기 위해 찾아온 것같은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그리고 끝마무리는 어떤가. 강에 뛰어든 두 사람은 두 노인부부가 모는 모래운반선에 구조되어 이상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 배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파라다이스’
  ‘우리도 함께 갈 수 있나요?’
  ‘그럼 물론이지’
  모래 운반선이 갑자기 파라다이스로 간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터무니 없고 황당한 대사들이 이 영화를 더욱 망치고 있다. 어차피 이 영화가 리얼리즘이라는 덕목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지만 끝으로 갈수록 황당해지는 것은 보는 이를 완전히 기만하는 것이다.
  영상미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영상미’인지 아니면 돈으로 치장한 세트의 아름다움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영화가 그런 면에서 전혀 온당한 방법으로 영상미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의 언어를 프랑스어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의 무지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번역하는 사람의 수준까지도 의심스러웠다. 대사가 그렇게 천박하고 유행에 따라야 하는 것인지 정말 이상하다. 본래 불란서 말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이 영화의 자막에 나오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속어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영화의 소재가 밑바닥 사람들을 그리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도 반드시 천박한 언어를 써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는 나름대로 진지하고 열심이었다는데 동의한다. 오랫만에 본 프랑스 영화에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퐁네프의 연인들
감독 레오 까락스 (1991 / 프랑스)
출연 줄리엣 비노쉬,드니 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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