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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만화를 읽다

빨간 풍선

by 똥이아빠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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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풍선

 

작가는 '빨간 풍선'이라고 써 놓고, 영어 제목은 'The Purple Balloon'이라고 썼다. 의도한 것일까? 이 작품집에 들어 있는 내용은 삶의 아이러니를 그리고 있고,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쉽게 잊어버리기는 어려운, 삶의 찌꺼기, 잔해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만화가는 소설가가 갖지 못한 위대한 장점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소설가는 글로만 자신의 상상을 표현하지만, 만화가는 소설가의 글솜씨와 그보다 더 멋진 그림으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구축하기 때문에, 내게 만화가는 소설가보다 더 위대한 존재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이유는, '만화'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표현하고, 공감을 얻는 창작을 하기 때문이다. 단지 소설만이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심심했을까. 물론 소설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와 세계가 충분히 있다는 건 알고 있고, 나 자신, 소설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소설보다 만화가 더 좋다고 고백을 하는 건 조금 굴욕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꺼이 '그래픽 노블'을 쓰고 그리는 만화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 만화는 한국의 많은 '만화작가'들 가운데 한 명인 김수박 작가의 작품집이다. 이 만화에 실려 있는 만화는 만화가게에서 무협지를 넘기듯 1초에 한 장씩 넘기는 그런 만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김수박 작가의 만화 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모든 '그래픽 노블' 작가들의 작품은 작품 전체를 아울러 깊이와 철학을 발견하는 재미로 천천히, 한컷 한컷 글과 그림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번째 작품인 '개변기'는 상황 자체가 끔찍하다. 이 만화는 개에 대한 극단적 혐오를 드러내고 있어서 동물보호단체나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본다면-그런데, 이 만화를 그런 사람들이 안 봤을 리 없을텐데,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것도 이상하다-결코 지나치지 않을 내용이다.

하지만, 이 만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를 혐오하는 나'가 아니라, '개와 같은 인간을 싫어하는 나'이기 때문에, 여기서 변기에 빠진 개는 우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복수는 그 '개와 같은 인간들'을 변기에 쓸어 넣고, 온갖 화학물질을 들이부어 잔인하게 없애버리는 것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화학물질을 투입해 막힌 변기가 뚫리는 날, 나는 친구들을 불러 떠들썩한 파티를 연다. 변기에 쓸려 내려간 개에 대해 일말의 연민도 없다는 점에서 '나'는 싸이코패스처럼 보이지만, '개같은 인간들'에게 동정이나 연민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 아니던가.

일곱번째 작품인 '첫사랑'은 사랑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역겨운 것인가를 잘 드러낸다. 모든 첫사랑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첫사랑의 풋풋하고 애틋한 감정이 시간이 지나 그것을 다시 마주했을 때, 예전의 시간에 갇혀 있던 '첫사랑'과 시간이 흘러 지금 많이 변한 내 모습에서 오는 심한 괴리감이 구토를 일으킬 정도가 된다.

여기서, 변한 것은 '첫사랑'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변한 것을 모르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첫사랑'과의 만남이 결국 '섹스'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의도했던, 생각하지 않았던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역겨운 현실이라는 것에 '나'는 자기환멸을 느낀다.

만화를 읽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다. 만화를 많이 좋아하는 나는 이런 '그래픽 노블'이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는 볼 만한 만화책이 없어서 고민이 아니라, 너무 많은데 사볼 돈이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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