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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루!/2003년

2003년-태백산 정암사

by 똥이아빠 2012.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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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두내약수탕을 거쳐 태백산 정암사에 들르다.
정암사에 관해서는 오마이뉴스에서 발견한 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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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17) - 태백산 정암사
아리랑고을 정선에 모셔진 부처님 진신사리
03.09.15 09:38 ㅣ최종 업데이트 03.09.15 18:20 임윤수 (zzzohmy)


▲ 민족의 정서이며 서민의 심경토로인 아리랑고을 정선에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5대 적멸보궁 중 한곳인 태백산정암사가 있다.
ⓒ 임윤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이며 감동의 노래다. 아리랑 속에는 충절의 혼이 숨어 있고 민족의 애환이 담겨있다. 아리랑엔 사랑이 배어있고 조혼한 여인네의 잠 못 이루는 뜨거운 갈망과 삶의 무상함이 있다. 그리고 이별의 서러움과 기다림의 애절함도 녹아있다.

이곳 저곳에서 불리는 지역별 몇몇 아리랑이 있지만 정선아이랑 만큼 민족의 가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서민의 혀끝에 똬리를 튼 아리랑도 흔치 않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인 조선초기부터 불리기 시작한 정선아리랑은 노랫말만도 15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로 넘기는 그 1500여 가지나 되는 노랫말 속에는 인간사 모든 것이 녹아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가냘픈 다리에 해진 모시적삼 위로 드러난 어깨에 산더미 같은 짐이 얹혀진 지게를 지고 휘청휘청 걷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아리랑고개마을 정선엘 가면 한국 5대 적멸보궁중의 하나인 정암사가 있다.

정선과 이웃한 태백은 탄광지역이다. 한 때는, 비록 막장에 목숨을 걸고 곡괭이 질에 손바닥에 두툼한 굳은살이 박히긴 하였지만 주막집 정도에선 흥청거릴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초 신군부의 출현과 함께 발생한 소위 '사북사태' 이후 태백의 경기는 줄곧 곤두박질이다.


▲ 좋은 산사엔 반드시 좋은 물이 있다. 적멸보궁과 진신사리가 봉안된 수마노탑을 가기 위해서는 이 계곡의 물을 건너야 한다. 속세의 근심걱정 다 씻겨줄 듯 맑은 물이 힘차게 흐른다.
ⓒ 임윤수
고등학생이었던 25년 전 태백에서 받았던 그 인상을 지금도 지우지 못한다. 태백선을 따라 찾아간 태백은 사북서부터 온통 석탄가루로 칠흑이다. 주변의 산과 길은 말할 것도 없고 지붕과 담벼락 그리고 흐르는 물조차 온통 검정색이었다. 태백이란 곳에 흰색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한 그런 상태였다. 

그런 태백에서 하얗다 못해 새하얀 뭔가를 보았다. 그때 태백에서 보았던, 등교길 여고생의 교복에 달려있는 흰색 카라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사방천지 까만 바탕에 백색 점 하나 찍어놓은 듯 그렇게 선명한 흰색을 태백에서 보았었다. 

그런 태백엘 25년만에 다시 찾았다. 산천이 두 번하고도 반쯤은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니 바뀐 것이 당연하겠지만 마음에 그리던 그런 모습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야트막한 지붕에 즐비했던 판자집들은 오간 데 없고 반듯반듯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에 밤이면 반짝거릴 간판들이 즐비하다.

이쯤에서 흉같은 고백을 해야 할 듯하다. 사람에 따라 목적지를 찾아가는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이를 두고 길눈이 밝다고 하거나 길눈이 어둡다고 한다. 그런데 아예 길맹이나 길치로 불리는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 필자가 여기에 속한다.

대전서 정암사를 가는 최적코스는 대전을 출발하여 충주와 제천 그리고 영월을 경유하여 찾아가는 방법으로 넉넉잡아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이번에 정암사를 찾아가며 필자는 대구 금호인터체인지를 거쳐 영주와 봉화 그리고 태백을 지나는 6시간의 헤매임 끝에 정암사엘 도착하였다.


▲ 수마노탑으로 가는 가파른 오름길은 갈지(之)자로 만들어 경사를 완만하게 하였고 바닦도 돌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 임윤수
준비 소홀인지 천부적인 길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태백엘 다시 들르게 되었고 25년 전 그 인상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태백에서 정암사까지 가는 38번 국도는 4차선으로 잘 포장되어 있다. 예전 같으면 꼬부랑꼬부랑 넘었어야 할 고개길도 뻥하니 터널로 뚫려있다.

사북쪽으로 향하는 도로 옆에는 한때 광부와 그 식솔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을 공동주택이 폐가상태로 을씨년스럽게 버티고 있다. 막장의 고단함과 가족들의 따스함이 함께 섞여 애환의 곡조 아리랑을 불렀을지도 모를 저 공간이 이젠 흉흉한 시대의 잔재로 남아있는 듯하다.

뻥 뚫린 터널을 빠져 나와 내리막길을 조금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그 삼거리에서 좌회전 해 철도 태백선과 나란한 414번 지방도로를 따라 오리쯤 들어서면 그곳에 정암사가 있다.

정암사는 경남 양산에 있는 영축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설악산에 있는 봉정암과 함께 자장율사께서 모셔온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5대 적멸보궁'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적멸(寂滅)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본래의 마음자리인 고요의 상태로 돌아감을 말한다고 한다. 법신인 부처의 세계에서 육신으로 인한 마지막 장애까지 훌훌 털어 버리고 영원한 진리 그 자체로 돌아가면 곧 적멸인 것이다. 적멸보궁이란 그 깨달음의 성인인 부처의 뼈에서 나온 사리를 모시는 보배로운 궁전이란 뜻이다.


▲ 칠보중의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은 탑으로 이 안에 부처님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칠보중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거만하지 않게 수수한 빛깔로 가슴에 와 닿는다. 바람이 불면 뗑그렁거릴 귀퉁이의 풍경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 임윤수
적멸보궁에는 이러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기에 별도의 불상을 두지 않는다. 예를 드릴 수 있는 공간과 제단은 준비되어 있으되 불상은 없고 시리가 봉안된 곳을 향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멸보궁 뒤쪽 어딘가에 사리탑이 있다고 보면 된다.

일주문을 들어서 좌측으로 한길이 훨씬 넘는 높이에 길다란 건물이 있고 정면 우측으로 범종각이 보인다. 범종각을 지나 극락교를 건너게 되면 정암사의 주전이라 할 수 있는 '적멸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건물을 끼고 좌측으로 돌게 되면 정면에 관음전이 있고 그 뒤쪽 언덕으로 휘굽어진 소나무와 함께 삼성각과 자장각이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정암사의 사리탑은 극락교 위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 비탈진 언덕길을 6∼7분쯤 올라야 한다. 부처님이 남기신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울창한 숲으로 시작되나 멀지 않게 시작되는 급경사의 오르막길은 지그재그 형태로 정돈되어 조금만 여유있는 마음으로 걷는다면 편안하게 오를 수 있게 되어있다. 오름길 내내 길을 만든 이의 정성이 눈에 띄도록 단정한 돌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져 고궁의 돌담길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그런 길이다.


▲ 이 주변 어딘가에 자장율사가 신통으로 감춰놓은 신물들이 있을 것이다. 불심을 깊게 하면 보일지도 모른다니 주변을 잘 둘러봐도 좋을듯하다. 아래쪽으로 진신사리를 모셔온 자장율사 영정이 모셔진 자장각이 보인다.
ⓒ 임윤수
정암사에는 적멸보궁 뒤쪽 언덕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수마노탑(水瑪瑙塔)이 있다. 마노석으로 탑을 쌓았기에 수마노탑이라 한다고 한다.

마노석이란 보석의 하나로 원석의 모양이 말의 뇌수를 닮았다 하여 '마노’라고 불리며 수정류와 같은 석영 광물로 전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은·유리·파리·산호·마노·진주'를 일곱 개의 보석 즉 칠보라고 하며 이 보석들은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칠보중의 하나를 몸에 지니면 재앙을 예방한다 하여 옛부터 장신구나 패물, 노리개로 세공되어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이런 칠보중의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아올린 정암사 수마노탑은 그 자체가 보물의 탑이며 정성의 결정체인 셈이다.

보석인 마노석으로 쌓아올린 탑에 '수(水)'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수마노탑은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하는데, 마노 앞의 수(水) 자는 자장의 불심에 감화된 서해 용왕이 마노석을 동해 울진포를 지나 이곳까지 무사히 실어다주었기에 ‘물길을 따라온 돌’이라 하여 덧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전란과 천재가 없는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불사리를 모시며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에 탑이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을 알려주는 설화가 있다.


▲ 극락교를 건너면 청색기와에 단아한 형태의 적멸보궁이 있다.
ⓒ 임윤수
자장율사께서 정암사 근처에 불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졌다고 한다. 이에 율사께서 간절히 기도하니 동지섣달 혹한 속에도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다 멈추어 서니 그곳이 각각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터라고 한다. 

그런 연유로 정암사를 한때는 갈래사(葛來寺=칡넝쿨에서 온 절)라 하였다고도 한다. 지금도 고한에는 갈래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 하갈래라는 지명이 있어 모든 것이 허구만은 아님을 예상케 한다.

본래 자장율사께서는 당나라에서 귀국하며 석가세존의 사리, 치아, 염주, 불장주(佛掌珠), 패엽경(貝葉經)등 석가의 신물(信物)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 신물들은 ‘세 줄기의 칡이 서린 곳’에 나누어 각각 금탑과 은탑 그리고 수마노탑에 모셨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후세 중생들의 탐욕을 우려해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는 금탑과 은탑을 볼 수 없게 신통을 부려 현재 금탑과 은탑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 한다. 정암사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으니 그간의 어디에 금탑과 은탑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부처님을 닮아 가면 자장율사께서 신통으로 감추어 놓은 모든 신물들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 여느 법당들과는 달리 적멸궁 안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황금색 방석만 놓여있고 뒤쪽의 수마노탑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듯 하다.
ⓒ 임윤수
수마노탑이 칠보중의 하나인 마노석으로 되어 있다하니 엄청 화려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다. 백색을 띤 수수한 색깔에 은은함이 아리랑에 담겨있는 이런저런 정겨움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 하여 정암사(淨岩寺)라는 이름이 붙였진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645년 선덕여왕 14년에 계곡 깊고 산이 높아 산세 웅장한 태백산 서쪽 기슭인 현재의 터에 창건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제4권 자장정율(慈藏定律)조에는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년(645), 이곳에 석남원을 세웠고, 그 석남원이 지금의 정암사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얽힌 설화가 실려있지만 언제 무었 때문에 정암사로 바뀌었는지 그 밖의 세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신라 28대 진덕여왕 때 대국통(大國統)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경주를 떠나 강릉에 수다사(水多寺:지금 평창에 빈터가 있음)를 세우고 살았다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내일 너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하였다.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니 문수보살이 다시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한다. 


▲ 적멸보궁이 있는 극락교 안쪽에서 바라본 정암사 전경은 정갈한 느낌이다. 왼쪽의 건물이 종무소겸 공양간이며 정면에 보이는 전각이 관음전이다. 그리고 언덕위로 좌측에 삼성각이 우측에 자장각이 보인다.
ⓒ 임윤수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石南院)을 짓게 된다.

자장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 들고와 '자장을 보러 왔다'고 하였다. 스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귀에 거슬렸던 자장의 시중이 호통을 치니,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했다. 

자장은 이 말을 전해 들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늙은이를 쫓아버리게 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아상(我相,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요' 하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곧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고 그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바로 그 늙은이가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그 뒤를 곧바로 쫓았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 가버린 뒤였다. 이후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달 뒤 다시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하고 당부하였다 한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라고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죽은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은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나의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정암사는 석가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기도 하지만 자장율사가 일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 극락교를 건너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목엔 자장율사가 사용하던 주장자를 꽂아놓았다는 주목이 한 그루 있다. 고목이 되어버린 외피의 주목은 천년쯤은 묵었을 자장율사의 손때처럼 고색이 완연하다. 그런 고목 속에 청년색 뚜렷히 자라는 신목의 가지들은 고목의 틈새를 헤집고 무성히 자라고 있지만 결코 고목의 세월무게를 감하려는 경솔함은 보이지 않는다.
ⓒ 임윤수
적멸궁 입구에는 '자장율사주장자'라 쓰여진 표지석이 있는 고목이 있다.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주목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라는데 범상치 않은 나무임에 틀림없다. 나무에서 세월이 느껴진다. 시각으로 느끼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촉감으로 만져질 듯하다. 검버섯 피어나듯 이끼 낀 외피 고목에 새로운 나무가 안쪽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고목이 되어버린 외피의 주목은 천년쯤은 묵었을 자장율사의 손때처럼 고색이 완연하다. 그런 고목 속에 청년색 뚜렷하며 그 굵기가 족히 서너 움큼이 될 신목이 자라고 있다. 신목의 가지들은 고목의 틈새를 헤집고 무성히 자라고 있지만 결코 고목의 세월무게를 감하려는 경솔함은 보이지 않는다.

나무의 꼭대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도사나 고승들이 짚고 다니던 전형적인 지팡이 끝 부분이다. 틀어지고 꼬였으며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그 주장자를 들고 금세 자장율사라도 출현할 듯하다.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590∼658)는 김씨의 성을 가졌으며 선종랑(善宗郞)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자장율사의 아버지 무림(茂林)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한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 초파일에 아들 자장을 낳았다고 하니 자장율사는 태생부터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듯하다. 

한국불교의 도입과 융성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자장율사의 마지막 숨결은 바로 태백산 정암사에 그가 모셔온 진신사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다.


▲ 자장율사 주장자 주목 근처에 자라고 있는 어린 주목들이 가을을 알리려는 듯 빨간 열매를 맺었다.
ⓒ 임윤수
점암사는 1717년 숙종 39년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다. 1770년과 1874년 그리고 지난 1972년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탑의 균열이 다시 발견되어 1995년 다시 보수공사를 시행한 바 있다.

정암사를 찾던 날도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종무소에서 주지스님을 찾으니 정광스님께선 추석 채비라도 하시는지 삼성각 주변에서 잡풀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하던 손길 기꺼이 멈추고 마당까지 내려오셨다. 그리곤 얼른 한 말씀하신다. 비가 오기 전에 얼른 사진이나 찍으라고. 그 말씀 한마디가 베풂이며 헤아림이었다.

등성을 올라 수마노탑을 참배하고 전각 이곳 저곳을 돌아 다시 주지스님을 찾으니 속가의 형님같은 미소를 건네주신다. 속인들에게 들려줄 말씀을 청하였으나 '나이도 어린데 무슨 할말이 있겠느냐' 하시면 그냥 웃고만 계신다.

스님께선 특별한 말씀을 해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속세의 예와 범절을 예우하시는 겸손함으로 묵언의 가르침을 주셨다. 빗길에 차 조심하라며 흔들어 주시던 스님의 손 인사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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