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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바통모글

[바통모] 나의 삶과 컴퓨터 통신

by 똥이아빠 2012.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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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과 컴퓨터 통신
-- 한 국어학도를 위한 변명 --



이야기를 아주 구체적인 현상으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정부의 어떤 정책에 대하여 책임있는 당국자들이  국민 정서를 고려한 불가피한 조처 였다고 말한다든가, 또는 이른바 운동권에서 내세우는 특정한 실천적 대안들에 대하여 그 실천의 당사자들이  대중의 정서를 감안한 대안 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러한 말들이 지칭하는 정책이나 대안들이 결코 원론적으로 말해서 최선은 아니라는 고백이 함축되어 있는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서, 이러한 방안들이 옳은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물론 대중의 정서를 고려하는 것은 아주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한 사람의 사회과학도로서 떠오르는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들이 말하는  정서 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고, 하나하나의 개인이 타고나는 기질적 요소라고 인정해 버리기에는, 우리가 공부해왔고 끊임없이 결단하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에 비추어 아쉬운 구석이 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적어도  이성 이나  의지 에 관하여 말할 때는 그것이 교육을 비롯한 사회화 과정 속에서 발전되는 것으로 곧잘 이해하면서도  정서 에 관한 한 전적으로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여지를 남겨놓곤 합니다.
한 개인의 정서를 결정하는 것이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요인인지, 아니면 심리학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인지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서 사회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생물학적 조건들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발전해 온 방향 역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의 한계를 사회적으로 극복해 온 과정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인간 정서의 근원이 무엇이냐 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이며, 또는 실증주의적인 문제 제기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의 정서의 근원에 생물학적인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또는 그것이 거의 결정적이라 할지라도, 역사 속에서 역사를 만드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정서를 형성하는데 있어서의 그 사회적 요인의 기능과 발전 가능성에 촛점이 주어질 것입니다.
개인의 정서, 더욱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심리 과정을 이미 사회적 요인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할 때, 그 개인 정서는 이미 사회적 보편성 아래 놓이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심리학 용어로뿐만 아니라 이미 사회학 용어로도 낯이 익은  사회심리 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개인의 심리 현상은 사회심리적 과정을 통과한다고 아무리 선언적으로 진술해 본들, 또는 사회심리는 사회의 물질적 토대에 의해 조건지워진다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인식론적 결단, 즉 말 그대로의  철학 의 근본 문제일 뿐, 사회과학의 전제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과학일 수는 없습니다. 사회과학은 정서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과정과 방법이 무엇인지를 답변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하나의 가설이 제시됩니다.  사회심리를 형성하는 매개는 사회적 소통이다.  소통이란 말그대로 정보를 주고 받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그것이 사회적인 한 다른 인간과의 사회적 관계를 전제하며, 또한 이 관계가 그 활동의 체계와 과정을 관통하는 기본틀을 구성합니다. 이것은 소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계급사회에서는 모든 사회적 관계는 계급 관계로 귀착합니다.
이 가설로써 우리는 어떻게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사회심리를 형성하는지, 즉 우리가 정서라고 말하고 있는 인간의 심리 현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또한 만일 이 가설이 옳다면 소통 체계와 과정의 변화가 사회심리와 사회심리의 보편성이 관철되는 개인 정서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명제를 도출합니다. 물론 이것이 문제의 끝이 아니라 아주 조그마한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학도인 제가 공부하려고 하는 분야입니다.

소통에는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자가 후자에 대하여 주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비언어적인 기호들은 언어적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기호로서 인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관하여는 1차 신호계와 2차 신호계에 관한 논의를 참고하십시오.) 따라서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소통의 역사는 언어적 소통을 중심으로 서술하겠습니다.
인간의 소통의 발생은 노동으로부터 기원합니다. (엥겔스가 쓴 {자연변증법}에 실려 있는 <원숭이의 인간화에 있어서의 노동의 역할>을 참조하십시오.) 그것은 지금 이순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통의 유일한 존재 근거는 바로 인간의 사회적 노동입니다. 처음에는 음성언어만이 소통의 매체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음성언어는 직접 대화를 나누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사회의 단위가 아주 작았으며, 노동은 단순 협업이었고, 사회 관계도 단순햇기 때문에 소통 또한 고전적인 의미에 충실하여 노동과정과 그에서 비롯된 공통정서를 형성하는 기능을 했습니다.
문자의 발생은 소통의 역사에서 하나의 혁명적 전기가 됩니다. 모든 문자의 발생은 계급사회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는 역사적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노동과정으로부터 곧바로 형성되어 왔던 정서는 소통체계의 왜곡과 함께 왜곡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자의 구실은 사회 전체의 소통 체계를 변화시킬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를 읽고 쓴다는 것 자체는 지배 계급의 표지였을 뿐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피지배계급에게는 여전히 음성언어만이 유일한 소통 매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로 표현된 지배 이데올로기는 문자언어의 속성, 즉 음성언어에 대하여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확장시키는 속성을 통하여 소통을 지배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음성언어가 가지는 시공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문자언어의 지배력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직접 들을 수 있는 한정된 내용보다는 자기가 읽을 수는 없더라도  여기에 그렇게 씌어 있다. 는 더 풍부한 내용의 정보가 훨씬 지배적으로 유통될 것입니다. 더구나 문자를 읽을 줄 아는 것이 지배계급의 특권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문자로 표현된 정보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실재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실제로 한자에 있어서나 로마자에 있어서나 문자가 종교적 배경 속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참작한다면 이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따라서 계급사회의 발생과 동시에 생산 대중은 소통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물론 소통이 그 자체로 노동과정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노동에서의 소외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입니다. 따라서 계급사회에서의 사회심리는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즉 지배계급에게 유리한 정서를 재생산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간혹 우리는 정서적인 합치가 최후의 가치인 양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의지나 이성이 정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서가 사회적으로 분명히 통제되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이 개입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역시 사회적 과정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인간의 궁극적 지향일 수 있을지요.
소통의 체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 더불어 또한번의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바로 대중 소통, 즉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생입니다. 그러면서 매체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단순한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는 그 옛날 음성언어가 문자언어에 대하여 주도권을 상실했듯이 대중 매체에 그 주도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대중 소통은 보통교육의 성립을 전제하는 동시에 이를 자극합니다. 즉 문맹률의 현저한 저하만이 대중 소통의 주도권을 보장해 줍니다. 영국에서 보통교육이 시행된지 단 3년만에 황색 신문이 등장했다는 역사적 에피소드는 대중 소통의 본질적 기능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대중 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대중 소통과 더불어 소통은 노동과정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됩니다. 이것을 노동자의 노동과정에서의 완전한 소외(마르크스가 언급했던  자유로운 노동자 )라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특징과 결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서 역시 구체적인 노동과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모습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히려 정서를 추상화하고 때로는 선험적으로 바라보게까지 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정서의 형성 근거가 구체성을 상실하면서 오히려 신비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대중 소통에 의한 고도의 통제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사회적 과정을 개인으로 분해해 버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서의 문제가 개인의 영역으로 한정되어 버리는 것도 같은 현상입니다. 조금은 다른 문제입니다만 결국 개인의 실존적 고민이라는 것도 동일한 사회심리적 맥락에 놓임을 놓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그 물질적 토대에서 모순을 가지는 만큼 그것을 반영하는 소통 체계에도 모순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바로 노동자 계급이 그 계급 스스로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이 것을 소통할 수 있는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서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대중 소통으로부터 파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글 맨처음에 제기되었던 의문에 한발짝 더 다가선 좀더 구체적인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현재 존재하는 대중 정서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새로운 정서를 창출하려는 노력과 병행되지 않을 때 그것이 어떠한 전망을 내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논의를 이렇게 하고보니 정부의 정책은 당연히 현존하는 정서를 유지하려 할테니까 논외로 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문제는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전화합니다.  과연 우리가 현재 존재하는 정서를 바탕으로 창출해 내어야 할 새로운 정서란 어떤 모습이며, 그 근거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물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이미 밝힌 바대로 소통 과정의 주도권 장악, 나아가서는 당파성에 입각한 소통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유뮬론자라면 정서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바로 소통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야만 하고, 여기에서 내용과 형식의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즉, 우리가 관념적으로 어떤 정서를 추상해 내고, 그것을 소통 속에 관철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가장 올바른 관계의 소통으로부터 형성되는 정서가 가장 올바른 정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해야 정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물론 80년대 노동운동의 비약적 발전 속에서 구체적인 실천들과 그로부터 나타나온 실마리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우리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정서의 실마리일 뿐입니다. 아직 노동 계급의 당파성이 철저하게 관통하는 지속적인 대중 소통의 체험이었다고 하기에는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소통의 체계가 또한번 변화하려는 조짐을 보이는 싯점에 서 있습니다. 바로 컴퓨터 통신이 그것입니다. 컴퓨터 통신은 대중 소통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소통의 체계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중 소통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대응이 옳다면 컴퓨터 통신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딜래머에 봉착합니다. 컴퓨터 통신이라는 소통 과정에서의 주도권으로 표현될 주체의 문제입니다. 이제 겨우 대중 소통에서 계급 정서를 창출할 실마리만이 보이는 상태에서 또다시 대중 소통보다 엄청난 지배력을 가진 소통 체계가 등장하게 될 때, 더구나 아직 이 소통 과정이 개인용 컴퓨터를 소유할 만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상태에서 과연 우리가 이 소통 과정에서 어떠한 관계의 형식으로 어떠한 정서를 어떻게 재생산해내야 하는가라는 점입니다.
컴퓨터 통신을 하는 우리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소통 속에서 형성되는 어떠한 관계도 우리 사회의 계급 관계를  완전히  반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산망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이용해서 소통을 하고, 소통을 하는 한은 일정한 정서를 사회심리적으로 재생산합니다. 문제는 분명해졌습니다.
문제는 이미 대중의 정서에 얼마나 합치하느냐가 아닙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이른바 여류 수필가들이 일기장에나 썼으면 좋았을  수필(?) 을 출판 자본의 힘으로 유통시킬 때 그 정서는 사회적으로 재생산됩니다. 거꾸로 대중정서에 합치하니까 많이 팔렸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어느 미친 출판업자가 책을 내겠느냐는 합리화 속에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만난 술자리에서 그런 씨나락까먹는 소리를 한다면 인생을 좀더 많이 살아본 경험에 대한 겸허함으로라도 들어줄 것입니다. 굳이 비판도 필요없을테니까요. 우리가 그것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 개인의 진솔한 정서가 불건강해서 가 아니라  개인적인 정서를 부당하게 유포시킴으로써 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진솔할지는 모르지만 그들과 다른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불건강한 정서를 재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해야겟습니다. 저는 소통을 공부하는 국어학도입니다. 그리고 소통에 대한 제 관심은 바로 정서의 형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 관심은 순수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소통 과정에의 참여라는 적극적 실천을 지향합니다. 이것은 컴퓨터 통신을 알기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제 삶의 기조입니다. 그리고 컴퓨터 통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통의 현장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한 국어학도가 (적어도 진보적이려고 노력하는 사회과학도가 말입니다) 첨단의 소통 매체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 태도가 그 동안 컴퓨터 통신을 하면서 만나게 된 많은 분들과는 조금은 다른 접근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스럽게도 아직 저와 같은 태도로 컴퓨터 통신에 접근하고 있는 분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접근 방법의 차이는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의 차이를 가져오고 더구나 아직까지는 우리가 정복하지 못한 정서적 괴리까지 한 몫을 거드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해도 있었던 것을 압니다. 제가 오늘 이런 장황하고 관심이 없으신 분께는 지루할 수도 있는 글을 올리는 까닭은 제 입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고, 이러한 제 입장으로 인해(그리고 그것이 명료하게 밝혀지지 않음으로 인해) 그 동안에 생겨났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책을 저를 아껴주시고 컴퓨터 통신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과 함께 고민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는 제 삻의 방식을 다른 어느 분께도 강요할 의사가 없으며, 어떤 단체(구체적으로는 바른 통신 모임)의 위상에 반영시킬 의도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제가 속한 단체와 그 구성원들에게, 구성원의 다양한 삶을 포괄한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제 태도가 너그럽게 이해될 수 있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제 입장이 구성원의 다양성으로 포괄될 수 있는 한계조차 벗어난 그러한 단체에, 제 오해와 불찰로 말미암아 잘못 들어온 것이라면 저 개인의 온갖 편리함(특히 저와 같은 입장을 가진 분들을 만날 가능성이라는 부분에서)을 양보해서라도 다른 많은 분들에게 끼치는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당연히 떠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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