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대표님
'특별 기자회견문' 잘 읽었습니다. 대표님하고는 같은 회사에서 일한 인연이 있어 가능한 모진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간 안철수'는 올바르고 선량하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기에, 몇 년 전, 정치를 하신다고 했을 때도 부디 원하시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안 대표님이 선택한 정치는 '혁신', '개혁', '진보', '민주'와는 거리가 있는 구태 정치, 낡은 정치여서 저는 몹시 실망했습니다. 기존의 부르주아 정당정치, 기득권 속에서 패를 나눠 파이를 더 가져가려는 패거리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안 대표님이 정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주변의 노회한 정치기술자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안 대표님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래서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하도록 표를 주었으며, 새정치연합,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다시 무소속으로, 그리고 '국민의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 행보에도 여전히 기대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 대표님이 정치에 입문한 이후 안 대표님이나 한국 정치에서 달라진 것이 있는지 묻습니다. 안 대표님이 그렇게 힘주어 말하는 정치개혁은 이루어졌나요? 아니, 정치개혁을 이루려는 노력은 있었나요? 안 대표님은 기존 기득권 정치세력의 벽이 두텁고 높아서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변명입니다.
그런 현실을 모르고 정치에 뛰어들었다면 현실 감각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고, 그런 현실을 알면서도 정치개혁에 게을렀다면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안 대표님이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전략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안 대표님 주변에 훌륭한 참모들이 많을 것이고, 뛰어난 전략을 제시할 인재가 많다고 생각해서 저같이 시골 변방에 사는 사람은 감히 조언할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제가 했던 생각은,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당시는 새정치연합, 새정치민주연합)보다 훨씬 진보적인 테제를 내걸고 정치의 패러다임을 주도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수구정당인 새누리당은 아예 제쳐놓고, 상대적으로 진보 정당인 민주당보다는 훨씬 진보적 정책을 내걸어야만 새로운 정당을 만들거나, 대통령 선거를 할 때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기본소득, 주4일 근무, IT기반의 농어촌 활성화, 지방도시의 활성화, 노인 인구의 능동적 활용, 저출산 문제의 적극적 해결 방안, 내수 시장의 확대 정책, 학력과 학벌 폐기, 기술 인력의 우대 등 안 대표님이 잘 알고 있고, 잘 할 수 있는 분야의 정책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그 어떤 정당에서도 내놓지 못한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정책들이어서 안 대표님의 리더십이 세상에 빠르게 알려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 대표님은 기존 정치인들의 숲에 싸여서 그들의 조언을 듣고, 그들의 방식대로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기존 정치체제의 내부에서 그들의 패러다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선되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는 7백만 표도 얻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1백만 표도 얻지 못해 참담한 결과였는데, 안 대표님은 언론에서 마치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안 대표님의 말과 행동은 정치인으로서 대단히 미숙하거나 어리석었습니다. 안 대표님이 아무리 부인하고, 믿고 싶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 대표님을 무조건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비판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겠지만,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안 대표님을 진정 생각하는 사람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나쁠 것은 없을 걸로 생각합니다.
이제 안 대표님은 '참신한' 정치인이 아니라, '구태'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안 대표님은 이번 '기자회견문'에서 이런 말도 했더군요.
첫째, 현 정권의 무능과 폭주를 막는 것입니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현 정권은 과거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경고를 보내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위기감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묻습니다. 현 문재인 정부가 '무능'하다는 증거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폭주'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폭주'했는지 역시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서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과거로 역주행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들이 과거로 역주행하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대서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묻는 내용에 합리적 설명과 근거가 제시되어, 제가 수긍한다면, 저는 안 대표님을 위해 총선이든, 대선이든 온몸을 다해 뛰어다니며 봉사하겠습니다.
저는 민주당 지지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민주당 앞잡이로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존경하는 분이지만, 인간 문재인과 대통령 문재인은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가 문재인 정부로 경도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의 근거를 제시해 주시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저는 안 대표님이 정치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부터 걱정했습니다. 정치는 안 대표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 대표님은 심사숙고한 결과,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그때부터 이제 약 8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안 대표님의 참신함은 사라졌고, 정치권을 개혁할 의지도, 명분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한 다음,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독일과 미국 등에서 생활하다 다시 돌아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주변 참모와 측근의 조언에 따른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안 대표님의 오기도 작용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물러설 수 없다는 결기는 훌륭하지만, 억지로 이룰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탑을 오르려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기만 합니다.
안 대표님처럼 재정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분이라면, 지금 만들어 놓은 동그라미 재단을 통해 사회에 더 유익한 일을 많이,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빌 게이츠도 말했습니다. '정치가는 절대 안 할 것이다. 재단의 일만으로도 정치가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정치가가 되어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뜻은 가상하지만,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정치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빌 게이츠처럼 직접 사회에 필요한 일, 직접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안 대표님에게도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번 총선에서 지역 후보는 내지 않고, 비례 후보만 내겠다는 것은 온전한 정당이 아니라 '기생 정당'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도 안 된 정당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기만하고 우습게 보는 것 아닐까요?
깔끔하고, 담백하게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금처럼 정치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흙탕물이 더 묻고, 허우적거리다 비참한 모습으로 퇴장하게 될 것을 염려합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는 것같은 지금의 '정치가' 안철수가 아닌, 편안하고 따뜻한 '인간' 안철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건승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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