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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국내여행을 하다

길동무 문학예술 산책_01_서촌

by 똥이아빠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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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천문화재단길동무'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학, 예술가의 생가를 둘러보고, 그곳이 서울에서 어느 위치인지, 지금은 어떻게 변했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이다.

초여름 날씨라 약간 더웠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서울 나들이를 한 것도 퍽 오랜만이라 기분이 새롭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아주 드물게 서울에 잠깐 들렀고, 최근 몇 달은 집과 지역의 시민단체만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아침 일찍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철을 타고 서울에 왔다. 시간이 조금 여유 있어서 안국역에서 내려 걸었다. 안국역 앞에 중년의 사람들이 등산복을 입구 모여 있는데, 이런 모습은 걸으면서 경복궁역 앞에서도 볼 수 있었다. 토요일 아침이라 가까운 산인 인왕산에 가려는 사람들로 보였다.

우리 모임은 사직단 대문 앞에서 모여 출발했다.

사직단(社稷壇)은 조선 시대, 국가에서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21호, 서울사직단으로 지정되었다가,[1] 2011년 7월 28일 사직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

사직단은 두 겹의 담장 안에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의 사방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단(社壇)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배치했으며, 단의 형태는 '하늘을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의해 네모난 방형(方形)으로 만들었다. 단의 둘레에는 3층의 돌계단을 사방으로 둘렀으며, 단 위에는 각 방위에 따라 황색, 청색, 백색, 적색, 흑색 등 다섯 가지 빛깔의 흙을 덮었다.

처음 조성 시 단 주변에 동ㆍ서ㆍ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신실 등은 모두 소실되었다. 선조 말년에서야 수복되고 역대에 걸쳐 수리가 계속되었다. 신문(神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있다.

일제(日帝)가 시민 공원으로 삼으면서 제단 원형이 훼손되었고, 대한민국 수립 이후 도시 계획 등을 거치면서 면적이 축소되었다. 특히 종로구와 서대문구를 잇는 사직터널과 사직로가 개통되며 사직문이 이전되었다. 이후 사직공원은 사직동과 효자동 등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또 부지 측면에는 서울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종로도서관(구 경성도서관), 한국 최초의 어린이도서관인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등이 들어서며 50여년 간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1980년대 말에 사직단 정비 사업이 추진되어 조선시대 제단과 그 주변이 일부 복원되었다.

문화재 보호시설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직접 출입이나 왕래는 할 수 없고 대신 사직단 홍살문이나 돌담 너머를 통해서 제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출처 : 위키백과)

오늘의 프로그램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직공원(강의1)-염상섭-이상-박노수-윤동주-수성동 계곡(강의2)-점심/ 청운문학도서관-윤동주문학관(강의3)-창의문-작소거(강의4)-효자동 산원-진명여고

 

오늘 걸었던 경로를 지도에서 표시했다. 약 4시간 정도를 걷다 쉬다 했고, 약 15,000걸음을 걸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횡보 염상섭의 생가 자리. 지금은 빌라가 서 있고, 아무런 표시가 없다. 아래 신문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있어 인용한다.

한국문학유산사업추진단의 고영직 문학평론가, 이민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오창은 중앙대 교수 등이 기초 자료 조사 및 두 차례 답사로 얻은 정보를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서울 고지도와 비교해 횡보의 생가터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체부동 106의 1번지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정우영 단장은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사실”이라며 “오늘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곳에는 빌라가 들어서 있다.
염상섭은 11세 때 관립 사범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친일적인 학풍에 반발해 2년 만에 자퇴하고 보성소학교로 전학한다. 이곳을 졸업하고 보성중학교로 진학했다. 염상섭이 교토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다녔던 보성중은 현재 조계사(서울 종로구 견지동) 내 불교중앙박물관 자리다. 기행단은 이곳을 거쳐 삼청공원 동상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한 뒤 서울 중구 소공동으로 이동했다.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옆 골목은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염상섭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공간이다. 그가 일하던 시절 경향신문 사옥은 일제 말 조선은행 지폐를 인쇄하던 근택인쇄소의 후신인 조선정판사 건물이었다. 1946년 5월 정판사가 조선공산당 위폐 사건에 휘말려 문을 닫은 뒤, 그해 10월 천주교 서울교구가 경향신문을 발행하면서부터 경향신문 사옥으로 사용됐다. 이 건물은 1974년 경향신문이 중구 정동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한일은행 사옥으로 사용되다 1980년 주변 일대가 서울시 재개발사업지구에 편입되면서 철거됐다. 염상섭은 해방 후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시기에 정파성을 지양하는 중도 노선과 공명정대한 사실보도를 강조했다.
이 시기 횡보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살았다. 고영직 평론가는 “해방 후 극심한 주택난으로 사대문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돈암초등학교 앞 동소문동 주택가다. 이곳을 거쳐 문학기행은 오후 5시쯤 염상섭의 묘가 있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서 마무리됐다. 염상섭은 1963년 3월14일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염상섭은 수주 변영로(1897~1961), 공초 오상순(1894~1963) 등과 함께 당대 문단의 ‘주선(酒仙)’으로 불릴 만큼 술을 좋아했다. 죽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도 아내가 숟가락에 떠준 소주를 받아 마신 것이었다. 소설가 전영택(1894~1968)은 당시 장례식에서 읽은 조사에서 “비록 만년이나마 너무 가난에 시달리지 않고 어느 정도 안락한 생활을 하시도록 했어야 할 것인데 불행히 그의 숙환의 몸을 늦게야 메디컬센터로 옮기며 치료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작고하셨다는 점은 참으로 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의 생가터는 이번에야 밝혀졌고, 돈암동 집터는 위치조차 불명확하다. 1996년 만들어져 2009년 삼청공원으로 옮겨진 염상섭 동상 표지석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터 부근에 이 상을 세운다”고 했으나 엉뚱한 자리에 있다. 평론가 임헌영씨(72)는 “횡보의 장남(작고)과 함께 언론사 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다”면서 “염상섭 선생님이 더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 1960년대 한국문단이 그렇게 어용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2013.10.20일자 경향신문) 

두번째 방문한 곳은 횡보 염상섭 생가 자리에서 가까운 '이상의 집'. 이 집은 이상이 태어난 곳으로 잘못 알려졌다. 이 집은 이상의 큰아버지 집이며, 이상은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가 아기 때부터 청년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이상이 태어난 곳은 '사직단'에서 길 건너편에 있는, '광화문 스페이스본 오피스텔' 자리다.

다음 들른 곳은 '박노수 가옥'이자 종로구립미술관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종로문화재단' 홈페이지 내용을 인용했다.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은 서울시 1종 등록미술관으로 박노수 화백의 기증작품과 컬렉션(고미술품, 수석, 고가구) 등 총 천여점의 풍부한 예술품을 바탕으로 2013년 9월에 설립되었습니다.
박노수미술관 건축물은 주로 한식으로 지어졌으며 1층 은 온돌과 마루, 2층 은 마루방 구조이고, 3개의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관은 벽돌 포치로 아늑한 느낌을 주며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어 장식적인 요소와 단순함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1973년 박노수 화백이 소유한 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1991년)로 등록되었습니다.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17~2013.2.25)는 충남 연기군(세종시) 충생으로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청전 이상범, 근원 김용준, 월전 장우성을 사사하였으며 1953년 대한민국 국무총리상, 1955년 대통령상을 수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5.16 민족상, 3.1 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 등을 수훈하였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1956~62년)와 서울대학교 (1962~82년)에서 교수로 재직,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였으며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하였습니다.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되었고 일본, 스웨덴, 미국 등 다수의 국제전과 10여 차례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박노수 화백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운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의 독자적인 新 화풍을 구축하여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 낸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011년 와병중에도 사회 환원에 뜻을 가지고 종로구와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설립을 위한 기증협약을 맺었습니다. 박노수 화백은 애석하게도 미술관 설립 준비 중인 2013년 2월에 타계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2013년 9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개방된 박노수 가옥은 80여 년 전인 1937년 경 지어진 절충식 기법의 가옥입니다. 1973년, 한국화가인 남정 박노수 화백이 소유하여 2011년도말까지 거주하였습니다. 한.양 절충식 주택이라고 하지만 주로 한식으로 지어졌으며 1층은 온돌과 마루, 2층은 마루방 구조이고, 3개의 벽난로가 설치 되어있습니다. 현관은 포치를 설치하여 아늑한 느낌을 주며 벽돌을 사용하여 포치의 벽을 꾸며놓았습니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로 되어있어 장식적인 요소와 단순함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박노수가옥은 80여 년 간의 긴 세월동안 풍파를 겪으며 증축, 수리를 거쳤으며 박노수 화백 소유.관리 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1991년)로 등록되었으며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전시관의 공간은 화가의 거주 공간이었던 가옥을 미술관으로 개관한 곳으로 작가가 생전에 사용하던 공간의 명칭을 전시실의 명칭으로 (1층-응접실, 거실, 안방, 주방, 2층-화실 겸 서재, 공부방, 다락방, 욕실) 사용하고 있습니다.
80여 년이 된 고택이자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인 건축물의 의미를 살려 화백이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를 보존, 관리하고 있으며 미술관으로 운영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을 설치하였습니다.
각 전시에 따라 공간구성이 달라져 여러 차례에 거쳐 가옥의 다채로운 공간 또한 관람할 수 있는 화가의 숨결과 시간을 담은 전시공간입니다. (출처 : 종로문화재단 홈페이지)

윤동주 하숙집 자리 역시 특별한 게 없었는데, 명패만 붙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허경진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인용했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의 안내책자에 실린 윤동주의 생애는 “1917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출생”으로 시작해서 “1945년 2월16일 오전 3시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약력을 읽으면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된다. 온 국민이 사랑하는 민족시인 윤동주가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고 다시 중국 고향 땅에 묻혔다면, 윤동주에게 서울은 무엇이었을까?
1938년 서울에 처음 올라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여름방학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 학생이던 후배 장덕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주 땅에서는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했고, 도처에 우리 국기의 상징인 태극 마크가 새겨져 있고, 일본말을 쓰지 않고, 강의도 우리말로 하는 조선문학도 있다.”
윤동주의 시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설명이 북간도 명동촌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다니던 시절의 명동소학교는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시기의 민족교육 학교가 아니라 인민학교였으며, 1915년에 발표된 중국 정부의 교육법에 따라 중국어와 일본어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쳤다. 그나마 6학년 때에는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해 공부했으므로 중국어로 배우고 생활하게 되었다.
광명학원 중학부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을 때 지은 시는 띄어쓰기도 되지 않은 국한문혼용체였는데, 윤동주가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지은 시 ‘새로운 길’은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처럼 한글 전용이 되었다.
시내에 들어갔다 학교로 돌아오는 날에는 창천 내를 건너서 연희 숲을 지나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이 구절은 최현배 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우며 아름다운 모국어로 시를 짓게 된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다.
졸업반 시절에 태평양전쟁 여파로 기숙사 음식이 시원치 않게 되자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하숙집을 찾았는데, 정병욱은 하숙집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해(1941년) 5월 그믐께,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윤동주보다 8세 위였던 김송은 함경도 출신으로 대표적인 항일작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의 감옥 체험을 다룬 데뷔작 <지옥>을 신흥극장 창단 작품으로 공연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중단당했으며, 일본 경찰에게는 요시찰 인물이었다. 누상동 9번지 하숙집에 살던 시절 윤동주의 동선은 글자 그대로 서울 산책이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하학 후에는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明治座)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다.” 윤동주가 기숙사에서 나와 누상동에 하숙집을 잡은 이유는 서울 문화산책을 하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하숙집에서는 조 여사가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렸으며, 식사가 끝나면 김송이 대청마루로 불러들여 한 시간 남짓 문학과 세상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김송이 요시찰 인물이라 고등계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와 윤동주의 책꽂이에서 책 제목을 적어 가고, 고리짝까지 뒤져 편지를 압수해 가며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하숙집을 옮겨야만 했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연세대학교 핀슨홀(당시 기숙사)과 누상동 하숙집뿐인데, 윤동주 하숙집을 검색하면 낯선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일본인 독자들이 윤동주 하숙집을 찾아왔다가 한옥을 헐고 새로 세운 주택 앞에서 허탈하게 찍은 사진과 “윤/하/뻔”, 즉 태극기와 윤동주 하숙집 터 안내동판 위에 크게 써붙인 “윤동주 하숙집터 뻔데기” 간판이다.
윤동주가 아침마다 산책하고 세수하던 수성동계곡이 복원되면서 관광객들이 찾아오자 누군가 장삿속을 발동한 것이겠지만, 이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 집을 서울시민들에게 돌려줄 때가 되었다.
윤동주의 시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글자가 하늘과 우물과 길이다. 누상동 하숙집에서 청운동 시인의 언덕을 거쳐 윤동주문학관까지 이르는 길을 윤동주 산책길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기를, 서울시와 서울시의회에 제안한다.(2016.06.01 경향신문 : 허경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윤동주 하숙집 자리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조금 올라가면 '수성동 계곡'이 나온다.

수성동은 누상동과 옥인동의 경계에 위치한 인왕산 아래 첫 계곡으로 조선 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으며, 수성동의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계곡’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현재 철거된 종로구 옥인동 옥인아파트 자리에서 복원된 계곡이다. 계곡의 길이는 총 190.8m, 폭은 최대 26.2m, 최소 4.8m에 이르며 하류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돌다리가 1기 남아 있다.

그 옛날 인왕산의 물줄기는 크게 수성동과 옥류동(玉流洞)으로 나뉘어 흘렀는데, 이 물줄기가 기린교에서 합수되어 청계천으로 흘렀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옥같이 맑게 흐르던 “옥류동 계곡”은 콘크리트로 덮여 주택가로 변했지만, 수성동 계곡은 옥인아파트 철거 후 옛 모습을 되찾아 여전히 맑고 청아한 물소리가 들리고 있다.

수성동은 조선 시대 도성 안에서 백악산 삼청동과 함께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첫 손가락에 꼽혔고,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고,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집터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 《한경지략》 - 명승(名勝) - 수성동(水聲洞)
水聲洞 在人王山麓 洞壑 幽邃 有泉石之勝 最好 暑月 遊賞 惑云此洞 匪懈堂(安平大君 瑢蹟也) 舊基也有橋名麒麟橋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으니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여 시내와 암석의 빼어남이 있어 여름에 놀며 감상하기에 마땅하다. 혹은 이르기를 이곳이 비해당 터(안평대군 이용의 옛 집터)라 한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수성동 계곡 이곳저곳에는 조선시대 저명한 인물들과 그에 얽힌 유적들이 널리 분포하였는데, 이들의 이야기가 옛 시와 그림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 살던 터전인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壯洞) 일대를 8폭의 진경, 즉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으로 남겨 놓았는데 인왕산 일대 〈수성동〉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그림을 보면 거대한 바위 사이로 급한 개울이 흐르고 주변에는 암석이 수려하며, 계곡에는 장대석을 두 개 맞댄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있는데, 선비들은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고 있다. 오늘날 인왕산 수성동 풍경의 원형이 18세기 겸재 정선의 회화 속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성동 계곡은 옥인아파트 조성 시 계곡의 암반부가 일부 복개도로로 변하는 등 경관이 일부 훼손되었으나, 조선시대 겸재 그림 속 인왕산과 계곡부의 전체적 풍경을 매우 양호하게 유지하고 있고 현재 훼손된 경관을 회복하기 위해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또한 이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저명한 시사(詩社)가 결성되어 18~19세기 위항문학[2](委巷文學)을 꽃피웠던 곳으로 문학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시모임(詩社)은 당시 양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문학이 중인층을 비롯한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규장각 서리 출신으로 위항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존재 박윤묵은 평민시인 천수경(千壽慶)·왕태(王太)·장혼(張混)·김낙서(金洛瑞) 등과 어울려 옥계시사(玉溪詩社)를 결성하고, 천수경의 송석원(松石園), 장혼의 이이엄(而已广) 등에 모여 함께 시회를 즐겼는데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문집 《존재집》(存齋集)에 자세하게 글로 남겼다.

《존재집》에서 박윤묵은 수성동의 풍경을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에서 노니는 듯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 박윤묵의 《존재집》(存齋集) 23권 - 遊水聲洞記
洞多水。以水聲名。迺西山之口也。庚午夏。大雨數十日。川渠漲溢。平地水深三尺。余朝起跣足着屐。衣雨衣携一壺酒。與數三同志者入洞。至石橋邊。上下一望。應接殆不能暇。溪澗之勝。泉瀑之壯。怳與舊日 觀大有異焉。凡西山之水。或橫流或倒流。或折而復流。或掛匹練。或噴亂珠。或飛於絶壁之上。或灑於松 翠之間。百谷千流。不一其狀。皆到水聲之洞然後。始成一大流。裂山倒壑。衝崖轉石。如万馬之爭騰。如疾雷之暴發。其勢不可遏也。其深不可測也。其中霏霏如也蕩蕩如也。時飛沫濺衣。凉意逼骨。魂淸神爽。情逸意蕩。浩然如與造物者。遊於物之外也。遂大醉樂極。散髮長歌。歌曰西山之上雨床床兮。西山之下水 湯湯兮。惟此水是吾鄕兮。徜徉不忍去。物與我而俱相忘兮。歌闋相顧而起。天忽開霽。西日已在山。

수성동(水聲洞)은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뜻의 수성으로 이름이 붙었는데 곧 인왕산 입구다. 경오년(1810) 여름 큰 비가 수십 일이나 내려 개울물이 불어 평지에도 물이 세 자 깊이나 되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나막신을 신고 우의를 입고서 술 한 병을 들고 몇 명의 동지들과 수성동으로 들어갔다. 돌다리 가에 이르니 아래 위쪽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여 예전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대개 인왕산의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벼랑에 명주 한 폭을 걸어놓은 듯한 곳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는 눈비가 퍼붓는 듯, 자욱하고 넘실거린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으로 노니는 듯하다. 마침내 술에 만취하여 즐거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하노라.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면
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른다네.
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라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
내 풍경과 함께 때를 씻고 나서
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
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
해는 하마 서산에 걸렸네.
한편 계곡 하류에 걸려 있는 돌다리(길이 3. 8m, 폭 0.9m)는 장대석 2개를 잇대어 만들었는데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고 도성(都城)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 보존된 다리이며, 또한 통돌로 만든 가장 긴 다리라는 점에서 교량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어 약 190.8m에 달하는 계곡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보존하기로 하였다.

이 돌다리는 현재까지 각자(刻字) 등이 발견되지 않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기린교"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경지략》 등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에 실린 기록들과 겸재의 그림 등을 고려할 때 "기린교(麒麟橋)"로 추정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은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名勝地)로 소개되고, 겸재 정선의 〈수성동〉 회화에도 등장하며, 조선 후기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주무대로 당시의 풍경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전통적 경승지'로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옛 돌다리를 포함하여 남아 있는 계곡부 전체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여 옛 수성동의 수려했던 경관 자체를 보존하고자 한다.(출처 : 위키백과)

수성동 계곡에서 점심을 먹고, 인왕산 자락길을 따라 걸었다.

윤동주문학관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억'이 나온다.

이 언덕이 윤동주와 직접 관련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윤동주가 하숙하면서 이 뒷 동산에 자주 올라왔을 거라는 합리적 추측을 통해 이 언덕에 기념비를 세웠다.

윤동주문학관은 기존 가압장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훌륭한 사업 모델로 인정받았다.

 

- 기존의 풍경을 존중하여 주어진 여건의 잠재성을 살린다.
- 실내공간으로 사용하기 힘든 불리한 여건의 역할용
- 채우기보다는 비움으로, 윤동주 시인을 닮은 공간 구상
- 절제된 디자인과 과정의 공공성

1974년 9월, 청운시민아파트 및 청운단독주택지를 위해 청운가압장이 건축되었다. 35년 후, 2009년 청운시민아파트가 철거되면서 용도폐기되어 비우게 된다. 청와대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최규식 동상 맞은편에 자리 잡은 이 자그마한 수도 가압장은, 2010년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고 임시 윤동주문학관이 들어서기 까지, 특별히 주목받지도 않았고, 노후되고 허름한 모습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혐오스럽거나 눈에 거슬리는 건물도 아니였다. 그저 그곳을 자주 지나다니는 동네 분들에게는 마치 늘 그곳에, 그 모서리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하얀 시설물이었다.

언뜻 보기에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100㎡도 안되는 이 건물을 종로구청은 철거하지 않고 문학관으로 리모델링하기로, 참으로 훌륭한 결정을 한다. 2011년 여름, 기본설계가 시작되고,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 산사태가 유난히도 많았던 해라, 가압장 뒤에 있던 정체가 불분명한 옹벽의 (일반 옹벽은 배수구가 있으나, 이 옹벽에는 배수구가 없었다) 구조안전진단을 하기로 결정이 되고, 그를 위해 조사하던 중, 그 벽이 옹벽이 아니라, 반은 산에 묻혀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물탱크 2개의 벽면임을 알게 된다. 보물을 찾게 된 셈이다.

5m x 11m x h7.5m 의 콘크리트 박스 2개.
35년간 물로 차였다 비워졌다가 반복되던 물탱크 벽면에 남은 물자국,
관리자가 사다리를 타고 출입하던 물탱크 상부의 600x600의 작은 개구부를 통해서만 들어오는 빛줄기,
콘크리트 박스의 거대한 울림...
단열도 방수도 제대로 안되어 느껴지는 눅눅함...
그 자체로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감흥의 공간...

물탱크를 포함하는 재설계가 시작되었다. 연면적이 2배로 늘어나면서(100에서 200㎡로...그래도 여전히 참 작은 문학관이다) 처음에는 원형을 살리기 위해 당연히 물탱크를 실내공간의 확장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설계를 진행하면서, 단열도 방수도 할 수 없는 공간을(물자국이 있는 벽면을 가리거나 해하지 않고서는...) 실내 공간으로 사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고 결국 물탱크의 본질을 존중하기위해 실내공간으로 활용하지 않고 냉난방시설도 없는 특수한 외부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주출입구가 있고 도로에 접해있는 ㄱ자의 가압장 건물은 서울중심을 향한 아름다운 전경을 향해 최대한 열어주고, 문학관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시설(화장실/창고 등)을 계획하여 높은 층고의 가압장이 내부공간을 살리고, 외부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여 언뜻 보기에는 크게 바뀐 것이 없어보이게 하였다. 소박하고 순결한 시인의 이미지를 닮길 기대했다. 새로운 가치부여를 위해 주어진 상황들을 지혜롭게 활용하기 위해 많은 분들의 많은 수고가 있었다.

윤동주문학관의 공간계획을 다시 간단히 요약하자면, 가압장이었던 ‘시인채’, 물탱크1이었던 ‘열린우물’, 물탱크2였던 ‘닫힌우물’, 뒤뜰의 ‘별뜨락’, 그리고 새로 계획된 뒤뜰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연결되는 ‘시인의 언덕’으로 구성되어있다.

참 작은 공공건축물이다.
참 작기에 억지스러운 시도가 필요하지 않았고, 참 작기에 작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학관의 완성을 위해 혼신을 다하신 관계자 모든 분들의 수고가 더욱 빛나고, 참 작기에 여운이 남는 듯하다.
(글 : 2014 서울시 건축문화제 자료집)

백운동(白雲洞)은 인왕산 자락 자하문터널 상부 일대로서 행정구역상 종로구 청운동 6-6번지를 중심으로 한 곳이다. 청운동에서 부암동 방향으로 가는 자하문터널 입구 오른쪽 편에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건물의 뒷편 즉, 서북쪽 일대의 계곡부를 일컫는다.

인왕산은 대부분 암벽이고 험준하지만 그 동록은 산수 자연이 아름다운 경승지로 유명하다. 사직공원에서 북쪽으로 등성이를 넘어가면 필운동의 필운대가 있고 필운대 언덕에서 다시 북쪽으로 내려가면 산록의 골짜기가 깊숙한데 여기에 인왕동 · 옥류동 · 수성동 등의 산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앞으로 송석원(松石園) · 청풍계(淸風溪) 등 명소가 이어지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 그 동북쪽 끝에 백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백운동은 흰 구름이 떠있는 계곡이라는 의미로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 ‘계곡’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일찍이 조선 전기부터 당대의 사대가(四大家)로 칭송받던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 1410~1481),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등이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바 있으며, 용재(傭齋) 성현(成俔, 1439~1504)의 저서 『용재총화(傭齋叢話)』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서도 한양도성 내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다섯 군데의 명소(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는 장소이다.

『한양도성도(1770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도성도」 『동여도(1856~1872, 보물1358호)』 등의 고지도에서도 그 지명이 확인되고 있으며,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하나인 「백운동」의 회화를 통해서도 그 명승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준천사실(濬川事實)』, 『한경지략(漢京識略)』,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에 따르면 한양의 도성 내 공간을 구획하는 중심축이자, 하수도였던 개천(開川, 오늘날의 청계천)이 발원하는 물길 중 가장 길다고 하는 백운동천(白雲洞川)이 흘러나오는 계곡에 해당한다.

그 역사·문화적 경관이 근현대 시기까지 유지되었기에 조선 전기 문신인 이염의(?~1492)의 집터가 있었고 대한제국기에는 법부대신를 지낸 동농 김가진(1846~1922)도 별서(別墅)인 백운장(白雲莊)을 이곳에 조성해 1910년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 지금도 김가진의 별서 터의 일부와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고 쓴 그의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이 백운장은 김가진 일가의 중국망명 이후 일제강점기동안 고급요리집으로 사용되었던 기록과 사진이 확인되고 있으며, 해방 이후부터 1961년 박정희 정권 때 불하 결정(이때 현 소유주가 매입한 것으로 추정)되기 전까지 요정 및 호텔 등으로 요정정치가 이루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왕산 백운동 계곡은 서울의 몇 안 되는 ‘전통적 경승지’이자 청계천의 주요 수원이 오늘날에도 보존되어 있고 시대를 달리하여 오랜 기간 역사적 인물들의 활동공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계곡부 일대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여 옛 백운동의 수려한 경관을 제도적으로 보존하고자 한다.(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백운동 계곡에서 모임을 마쳤다. 오늘 모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김남일 선생님이 충실하게 준비한 자료로 한층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석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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