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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소설을 읽다

네 눈물을 믿지 마

by 똥이아빠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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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물을 믿지 마

 

김이정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3, 4년 전쯤 청송 '객주문학관'에서 김이정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때 만난 작가들 가운데 박정애, 권지예, 정길연, 이경혜, 해이수, 이지 작가들이 있었고, 나는 운 좋게 그곳에서 얼마간 머무를 수 있었다. 작가를 만났다고 해서 그 작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개의 작가들은 진짜 자기 모습은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자기 모습은 드러내되, 자기 창작의 내면은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에게 내밀한 지하공간이며, 무수히 많은 창조의 단어들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기에 섣불리 보여줄 수도, 드러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 세 끼의 밥을 맛있게 먹고, 저녁 때는 가끔 내가 만든 간식들을 나눠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밥 먹는 시간이나, 가끔 산책하는 시간 외에는 모두 창작실에서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아마 스님의 하안거, 동안거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품들은 2014년 이후 1년에 한 편 정도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다르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이야기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인도, 포르투칼, 스페인, 베트남, 영국에서 떠나온 한국을 생각하고, '나'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한다.

인물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는 동기는 무언가에 떠밀리듯 한 비자발적이고 충동적인 행위 때문인데, 이때 이런 비자발성은 '나'의 내면에서 발생한 충격 또는 갈등이 원인이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인들에 의한 학살 사건을 조명한 작품 외에는 모두 '나'의 충동적 여행이고, '나'는 여행을 통해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의지와 함께, 현실을 객관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무의식적 행동을 한다.

 

퍽 오랜만에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베트남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이 가해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범죄라면, '나'가 외국에서 겪는 에피소드는 바깥에서 나를 보는 객관의 시선이다. '나'는 늘 온전하지 않은 삶으로 고통스러운 인물이다. '나'는 사업이 파산한 남편과 이혼하거나, 위암에 걸리는 등 자기 의지와 상관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때 '나'가 할 수 있는 건 현실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 뿐이다. 그때 현실(한국)은 더욱 엉망진창이 되거나, 알아서 수습이 되거나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운명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나'는 그저 폭포처럼 쏟아지는 운명을 감당할 뿐이다.

 

프리페이드 라이프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떠밀리듯 한국을 떠나 인도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우연히 보게 된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이 큰 이유라고 말하지만,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존재로 버티고 있었다. 마치 좀비처럼.

'나'는 한국에서도, 인도에서도 음식을 먹지 않는다. 마치 좀비처럼. 그가 유일하게 음식에 관해 언급한 것은 인도의 중국음식점에서 주문한 '한국 수제비'이야기였다. 그것도 음식을 먹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에게 음식은 절실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그에게 음식보다 더 절실한 것은 존재에 대한 확신이다. 그는 집안의 빚 때문에 이혼을 했고, 가족을 부양하면서 빚을 갚아야 했던 오랜 시간이 있었다. 그는 빚에 짓눌리고, 찌든 삶을 살아가느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버스의 룸미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기겁한 것이다. 그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나'이면서 '나'는 아니다. '나'는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쓰지만, 그는 왼손을 쓴다. '나'는 오른손잡이지만 거울 속의 '그'는 왼손잡이다.

'나'는 빚에 짓눌러 질식해 가고 있지만, 거울 속의 '그'는 빚을 지지 않았으면서도 서서히 말라죽어 가고 있다. '나'는 오랜 동안 빚을 갚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났음에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것이 빚으로 남아,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도의 갠지스강가 화장터를 오가며, 화장터에서 불살라 잿더미로 사라지는 육신을 보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바라보며, 마치 자기 자신이 그렇게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갠지강에 뿌려지는 듯한 환상 체험을 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나'는 정말 그렇게 고요히, 가볍게 장작 위에 놓인 시신이 되어 화염 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에게 인도는 '저승'이다. 그는 이승(서울)을 떠나 비현실의 세계, 실재하지 않는 세계, 빚독촉과 고통스러운 가족의 인연과 비루한 삶이 있던 서울을 떠나 저승 같은 인도로 온 것이다. 저승에서는 의식주가 중요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도 하찮아진다. '나'는 저승에서 지난 삶을 돌아본다. 그 삶은 과연 살만했던 삶이었을까. 삶의 의미는 있는 걸까, 비루와 오욕으로 더럽혀진 삶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준 것은 아닐까. 한때 미워했던 사람들 마져도, 나의 탐욕과 욕망과 이기의 투사는 아니었을까.

'나'는 이승(한국)에서 견딜 수 없어 자발적으로 저승(인도)으로 온 사람이다.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돌아갈 의무도, 책임도 없다. 하지만 이승(한국)에는 여전히 가족들이 있고, 그가 돌봐야 할 식구들이 절망과 슬픔의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혼자 이승(한국)을 떠난 것조차 죄스럽기만 하다. '나'는 망자들의 영혼이 건너는 갠지스강 위에서 '자신을 잃은 삶이야말로 가장 부도덕한지도 몰라. 어떻게든 나를 회복하기 위해 애쓸 거야.'라고 말한다. '나'는 어쩌면 살아서 이승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미 연꽃

호아, 서 하사, 광희. 1968년, 1998년. 2010년. 베트남 하미 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집단 학살 사건을 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한국군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 이것은 마치 '한국전쟁'으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극적으로 부활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한국군대를 베트남에 파병했고, 병사들의 죽음과 돈을 맞바꿨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자식들이었던 '한국군인'들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동료를 위해 싸웠고, 동료의 죽음을 보며 괴물이 되어갔다.

베트남 민중은 죄 없이 학살당했으며, 이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수많은 주민학살과 똑같은 내용과 의미를 갖는다. '한국군'은 '한국전쟁' 때 자기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고, 베트남에서도 주민들을 '빨갱이'라고 덮어씌워 학살했다. 

학살을 명령한 주범들은 영웅이 되어 돌아왔고, 그들은 거들먹 거렸으며, 훈장을 받았고, 부자가 되었으며, 권력을 누렸다. 병사들 가운데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사람이 있었고, 서 하사처럼 평생 정신병원에 갇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오로지 제국주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으킨 사악한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나갔던 한국군은 미군보다 더 잔혹한 살인귀가 되어 베트남 주민들을 학살한 것이다. 이것은 씻을 수 없는 전쟁범죄이며,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를 지금도 비난하듯,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베트남 국민에게 우리는 비난당해도 마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가해자의 시각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을 가능한 객관의 시선으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작품이 그동안 한국문학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서의 (일부) 한국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우리가 가해자로서 저지른 범죄에 관해 가르치지 않고 있다. 우리와 일본의 관계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일본의 강점기에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관해서는 꾸준히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학살 범죄에 관해서는 가능한 침묵하려 한다. 이것은 명백히 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범죄다. 독일처럼 기회가 될 때마다 대통령과 총리가 공식 사죄를 해야 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역사적 처벌을 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죄 없는 사람들의 도시

'나'는 엄마의 장례와 삼우재를 지내고 도망치듯 리스본으로 온다. 호스텔에서 머물며 리스본의 거리를 배회하면서 '나'는 엄마가 죽어가는 과정을 돌아본다. 갑작스러운 죽음. 죄 없는 사람의 불행. 그것은 리스본에 닥쳤던 18세기 지진과 해일로 리스본에 살던 사람 약 25%가 죽은 사건과 중첩하면서, 삶과 죽음에 관해 내면으로 침잠하는 '나'의 생각을 좇는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최근 나에게 닥쳤던 두 가지 사건과 30년 전에 있었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건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죽음'을 이해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일 때만 그렇다. 죽음이 나에게 닥쳤을 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나'의 엄마는 아직 젊은 나이에 급성 백혈병(혈액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한다. 엄마를 바라보는 '나'는 많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죽음을 느끼지는 않는다. 죽음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이 딜레마는 단순한 안타까움이나 슬픔을 넘어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엄마는 고통으로 죽어가는데, 나는 여전히 건강하게 살며, 먹고, 마시고, 웃고, 섹스를 하고 있다는 것이 죄의식으로 남는 것이다.

'나'가 도망치듯 외국으로 떠나온 것은,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와, 자기 혐오를 달래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이다. 그리고 하필 포르투갈에 도착했고, 포르투갈의 18세기에 있었던 지진과 해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때 죽은 사람들은 마침 휴일이었던 그 날, 신을 찬양하기 위해 성당에 모였고, 신의 공간이었던 성당이 붕괴하고 불이 나면서 비참하게 죽었다.

'나'의 엄마는 평생 육식을 하지 않았고, 바닥에 사는 작은 생물조차 죽이지 않으려 조심하며 살았지만,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괴로운 시간을 보낸 끝에 죽게 된다. 포르투갈 사람들도 선량한 시민들이었을테고, 모두들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병으로, 사고로 죽어간다.

'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앞으로도 영원히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조리한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던지는 것은 '도대체 왜?'라는 질문 뿐이다.

 

믿지 마, 네 눈물은 누군가의 투신일지도 몰라

파산한 남자 이야기. 아내와도 위장 이혼하고-위장 이혼이라는 건 없다. 그냥 이혼을 했을 뿐-혼자 고시원을 떠돌며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당을 버는 남자는 오랜만에 집을 찾아오지만, 현관키가 바뀌어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한때 잘 나가던 사업가였으나 지금은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은 남자다. 아내는 보험영업을 하며 먹고 살고, 아들은 아버지인 자신을 더 이상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친어머니처럼 생각했던 장모님도 파산 이후에는 딸의 눈치를 보는 것과 동시에, 사위에 대한 애정도 거두었다.

사내는 연락할 친구도, 도움을 받을 가까운 사람도 없다. 과거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돈을 보고 만났던 사람들이고, 사회와 현실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냉정하고 삭막하다는 걸 사내는 깨닫는다.

사내는 배낭에 몇 가지 물건을 지니고 다닌다. 그것은 그의 삶을 끝내는 도구들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내가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다. 파산 이후,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사내는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지만 약이 떨어져도 선뜻 약을 구입하지 못한다. 약보다 아내의 카드로 약값을 결재해야 하는 부담이 더 크기 때문이다.

파산, 금치산자가 된 사내는 채권자에게 쫓기면서 정상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는 고시원의 관짝 같은 방에서 낮을 보내고, 야간 경비를 서며, 일당을 떼이고,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 되어 간다. 가족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문자로 묻고 답한다. 사내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는 이미 죽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퐁니

믿고 싶지 않겠지만, 베트남에서 벌어진 베트남-미국의 전쟁 때, 한국군은 미국의 괴뢰군으로, 여러 번의 학살을 저질렀다. 이 작품 역시 1968년 2월 12일, 퐁니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이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들어오면서, 어린 탄이 한국군에게 초콜릿을 받아 먹은 것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은 미군에게 초콜릿을 받아 먹었다.

한국전쟁 때, 군대의 전투를 통한 군인의 사망이 아닌, 군대에 의한 주민 학살 사건만 해도 보도연맹, 거창 주민, 노근리 피난민, 경산 코발트탄광, 국민방위군, 고양 금정굴, 강화주민, 산청,함양주민, 남양주 주민, 함평 주민, 문경 주민, 죽산 주민, 나주 주민,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학살 사건이 있었다.

이런 학살 사건은 이념 전쟁이자 냉전의 대리 전쟁이었던 한국에서 벌어진 가장 끔찍하고 비극적 사건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한을 안고 살아가는 원인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어린이였거나 전쟁이 끝나서 태어난 청년들이 베트남에서 다시 이런 참혹한 학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인류의 비극은 결코 멈춰지지 않을 거라는 암울한 예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생명의 존엄성을 말해도,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고, 지금도 지구의 몇몇 나라에서는 내전 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예외없이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한국)는 오랜 역사에서 늘 피해자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고조선 이후 지금까지 이웃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평균 몇 년에 한번씩 적의 침략으로 전쟁을 치렀지만 지금까지 끝가지 살아남았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베트남 전쟁에서만큼은 우리는 가해자였으며, 전쟁범죄에 앞장 선 나라였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에 의한 한국인 주민 학살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한국인끼리도 남북한 군인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이 많았다. 이때 남북한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노인, 여성, 어린이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노인, 여성, 어린이를 학살했다.

이념을 앞세워 자신들의 학살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는, 전쟁범죄를 은폐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이같은 행위는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에서 똑같이 벌어졌다. 즉, 총을 든 악마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늘 우리 주변에 있다는 뜻이다.

베트남 학살 피해자 가운데 극히 일부가 살아남았고, 그들은 그날의 상황을 증언한다. 그때 학살에 참여했던 한국군들을 찾아내 전쟁범죄자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정의다.

 

노 파사란

갑자기 한국을 떠나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나'는 바깥에도 나가지 않고 거의 호스텔 안에서 잠과 잠을 반복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겨우 바깥으로 나온 '나'는 거리를 걷다 우연히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게르니카'를 보게 된다. 그 거대한 그림을 보는 순간, '나'의 내면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나'는 짐을 꾸려 '게르니카'로 향한다.

무작정 도착한 게르니카에서의 첫 인상은 즐겁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아이들이 강아지를 강매하려 하고, 호스텔 주인은 신경질을 부리고, 호스텔 입구의 체크인 카드기계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로 시작한 게르니카였지만, 다음 날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나'는 시내를 걷다 우연히 호스텔 주인 여자를 발견하고, 그 여자가 웃는 모습을 보면서, 어제 마귀 같았던 여자와 같은 인물인지 놀란다. 그때 아이들이 폭죽놀이를 하고, 주인여자와 함께 있던 노인이 탁자 아래로 기어들어가면서 올리브오일 병이 깨지는 등 가벼운 사고가 벌어진다. 

'나'는 다시 거리를 걷다 배가 고파 들어간 식당에서 우연히 다시 호스텔 여주인을 만난다. 첫 인상을 나빴지만, 대화를 하면서 여주인은 치매인 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호스텔을 하면서 병원 조무사로도 일을 하는 등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치매 어머니가 낮에 한 행동은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에 있었던 폭격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 폭격으로 어머니의 가족 모두 사망했고, 오직 어머니 혼자만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어머니는 치매 이후 여덟 살의 그때 나이로 돌아갔고, 큰 소리만 들리면 폭격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1937년, 게르니카에 쏟아진 폭격은 독일 나찌의 비행기에서 떨어진 폭탄이었다. 당시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고, 프랑코는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 좌파 세력과 내전을 시작한다. 그때 독일은 프랑코를 지원했고, 공화파는 소련의 지원을 받긴 하지만 화력에서 열세였고, 결국 프랑코에게 패한다.

왜 이곳에 왔느냐는 주인 여자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는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한 남편이 위장 이혼을 하고, 혼자 고시원을 떠돌다가 6개월이 지났을 때, 갑자기 사망한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무작정 떠난 외국,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 고아가 된 주인여자의 어머니와 남편을 잃은 '나'. 게르니카에 떨어진 폭탄처럼, '나'에게도 삶을 공격하는 고통과 채무의 폭탄이 떨어지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오열한다.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자

'나'는 영국에 사는 친구를 찾아간다. 14년만의 만남.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지만, 친구의 남편은 몇년 전 심장마비로 죽었고, 아들은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그녀와 얽힌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고, 가난했으며, 딸이 무려 일곱이나 되는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나'는 대학을 다니고, 교사가 되었지만, 친구는 대학 진학을 못했고, 어렵게 돈을 모아 영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운명은 갈렸지만, '나'는 결혼하고 남편의 사업이 파산한 이후 이혼을 당하고,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잘 살고, 학교 선생으로 만족하며 살던 삶도 위암 판정을 받는 순간 부서져 내리는 걸 느낀다.

'나'는 위암 수술을 앞두고 영국에 있는 친구를 찾은 것이다. 두 사람은 과거의 추억과 기억에서 상처받은 시간과 숨겨두었던 슬픔을 꺼낸다. '나'는 친구에게 부채감과 죄의식을 갖고 있었고, 삶의 변곡점에서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피카소가 그린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은 검은 머리에 붉은 목도리를 두른 여인이 녹색의 압생트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다. 진한 화장을 하고, 몸이 마른 여인은 왼쪽 손을 귀 근처에 대고 있는데, 마치 누군가 하는 말을 자세히 들으려는 듯한 자세다. 오른손은 잔 위에 가볍게 다가갔다. 이 여인은 어쩌면 '창부'일 가능성이 높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피에르 오디넬이 치료용으로 만든 술인 압생트는 주류업자 페르노 리카르에게 넘어가서 대중에게 팔리게 되는데, 당시 프랑스 부르주아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이들과 함께 했던 고급창부(드 미 몽드)들이 특히 이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18세기 이후 유럽의 화가들 가운데 '압생트'를 소재로 그림을 그린 화가만 해도 피카소, 고흐, 드가, 마네, 로트렉 등 유명 작가들이 많다.

 

붉은 길

'그'를 찾아 인도에 온 '나'는 정작 그가 있는 '마이소르'에 가지 않고, '벵갈루루'의 한 숙소에 머문다. '나'는 산책을 나왔다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고, 낯선 길, 붉은 황토길을 걸으며 불안한 마음으로 '그'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이혼을 했고, 남편이었던 남자는 남미로 떠났다. 영어학원에서 처음 본 '그'와 가까워지지만 어느날 '그'는 인도 '마이소르'로 떠난다고 했다.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 떠난 인도행이지만, 막상 '그'가 살고 있는 도시로는 가지 못하고, 2시간 거리의 벵갈루루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나'는 현실에서도 길을 잃었고, 삶의 길에서도 길을 잃은 상태다. 그를 만나야 하는 건지, 만나서 어쩌자는 건지,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낯선 길 위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떨고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인도에서 여성, 그것도 외국 여성 혼자 밤거리를 걷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얼마전에도 인도여성이 여러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결국 병원에서 죽은 사건도 일어났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제복을 입은 남성들에게 다가가 '스와미 아쉬람'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 극도의 긴장 속에서 여러 명의 남자들과 함께 차를 타고 어느 장소에 도착한다. '나'의 약간의 오해 끝에 경찰이 데려다 준 곳은 '스와미 아쉬람'이었다.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그'를 찾으려는 마음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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