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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화이트 노이즈

by 똥이아빠 2023.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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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노아 바움백 감독 작품. 이 영화 직전에 만든 작품 '결혼이야기'가 상당한 성공을 거두면서, 노아 바움백 감독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었다. 그는 감독 초기 작품부터 지금까지 코미디, 부조리극을 주제로 작품을 연출했으며, 이쪽 분야의 대가인 우디 앨런과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원작 소설 '화이트 노이즈'를 쓴 돈 드릴로의 작품은 한국에도 여러 권 번역 출판했다. 나는 과문해서 돈 드릴로를 알지 못했는데, 2013년 '제3회 박경리문학상'의 최종 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소설 '화이트 노이즈'는 1985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그가 여덟 번째 쓴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로 '내셔널 북어워드' 상을 받았으며 작가의 입지를 굳힌다. 영화는 원작소설의 구성을 그대로 가져왔다. 600쪽이 넘는 소설을 2시간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텍스트가 주는 즐거움을 느끼긴 어렵지만, 원작소설이 말하려는 문명과 미국사회 비판은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블랙코미디로 보여준다.
 
미국의 작은 도시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로 살아가는 잭 글래드니는 '심화히틀러학'을 가르친다. 히틀러는 악한이지만, 그가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은 여론 조작, 대중 선동, 군중 심리, 선전선동,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과 음모, 이미지 조작 같은 기술을 동원했으며, 이런 방법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대중문화와 상품을 홍보하고, 대중의 여론을 생성하며, 이미지를 조작하는 방식과 같다.
잭 글래드니의 동료 교수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구하는데, 엘비스와 히틀러는 많은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 인물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이며, 대중에게 절대 존재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대중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다. 그런 점에서 대중문화의 수퍼스타와 정치가로 독재자는 비슷한 특성을 공유한다.
미국은 자본주의 체제로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라고 말하지만, 그런 나라에 사는 국민은 자본이 만들어 보여주는 온갖 상징 조작과 대중 여론 조작, 이미지 조작 같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화이트 노이즈'는 백색 소음으로, 소음이긴 하지만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는 소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화이트 노이즈'는 백인 즉 미국의 주류 국민인 백인들이 만드는 '노이즈', 소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작가 돈 드릴로는 미국 백인들 대부분이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리석고 멍청하게 살아간다고 말한다.
 
잭 글래드니와 그의 아내 버벳은 서로 끔찍히 사랑하는 사이지만, 중년의 위기가 온다. 특히 버벳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데, 그가 보여주는 증세는 갱년기 증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가 시달리는 죽음의 공포는 크고 작을 뿐 모든 사람이 갖는 궁극의 질문이자, 공포의 근원이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고 그게 삶을 강제하거나 매순간 심각하게 살지 않는다. 죽음은 당연하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따라서 버벳이 느끼는 지나친 죽음의 공포는 그만큼 삶에 애착이 강하다는 증거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그것도 여러 명), 그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절실한 마음의 반영이다.
영화는 심각한 내용을 보여주긴 해도 지켜야 할 선 - 진짜 심각한 상황 -을 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현실을 풍자하고, 잭 글래드니라는 백인 중산층 가족을 통해 미국 사회를 반영한다. 가족 단위에서 발생하는 재앙은 버벳의 일탈이었고, 마을 단위로는 독극물 유출 사고였다. 두 가지 사고가 일어났을 때, 잭 글래드니가 보이는 반응은 일관성이 없다.
버벳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큰딸의 말에 잭은 변명과 합리화로 일관한다. 그는 마치 '쿨'한 듯 반응하지만, 관심 없거나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인다. 아내보다 꼭 먼저 죽고 싶다면서 애정을 표현할 때와는 달리, 아내가 정체 모를 약을 먹고 있고, 예전처럼 밝고 명랑하지 않은 행동을 보여도 잭은 그러려니한다. 
심지어, 사고로 독극물이 마을을 덮칠 때도 끝까지 현실을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안심하라는 말만 하는 잭의 태도는 무사안일, 변명, 합리화로 일관하는 정부와 공무원의 태도를 보는 듯하다. 
 
버벳이 사실을 말하면서, 약물에 의존하다 결국 가짜 약을 파는 사기꾼에게 몸까지 내준 사실을 알게 된 잭은 사기꾼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어렵게 사기꾼이 머무는 모텔을 찾아내고, 그를 총으로 쏘지만, 빗나가서 죽지 않는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잭과 버벳은 나란히 병원에 누워 손을 잡고, 영화는 대형 수퍼마켓에서 군무를 추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끝난다.
잭 글래드니가 학교에서 히틀러에 관해 강의하는 장면, 광기에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파시즘이 대중을 어떻게 휘어잡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은 히틀러의 군중 연설을 연상할 정도로 강한 힘을 보여준다. 즉, 잭 글래드니는 자기가 가르치는 '히틀러'의 힘에 압도되어 그의 꼭둑각시 같은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그가 현실에서 아내 버벳이 사기꾼에게 당한 걸 알면서도 단호하지 못한 태도 또는 분노와 폭력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화된 창작물(소설 또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단호한 결정, 분노의 폭발, 완벽한 응징을 통해 자기 의지를 관철하지만, 현실의 개인(잭 글래드니)은 창작물 속의 주인공처럼 완벽하거나 단호하지 못하다는 걸 확인한다.
그건 미국의 대중문화가 그렇게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하다는 게 대중의 대리욕구를 분출하는 도구일 뿐이며, '폭력을 배제하면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보인다'는 포스트모던한 주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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