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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유럽영화

살인마 잭의 집

by 똥이아빠 2023.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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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잭의 집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작품. 늘 격렬한 논쟁을 몰고 다니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도 논란이 큰 작품이다. 연쇄살인자 잭의 독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는 시도였지만, 형식의 문제로 본질이 가려지는 안타까운 점이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모든 예술에서 '형식' 즉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 디자인과 미장센이 중요하지만 - 소설을 비롯한 활자에서는 '문체' - 영화는 미장센이 서사를 완성한다고 볼 수 있다. 서사를 받치는 구체적이며 물적 토대가 되는 형식의 문제는 장르 영화에서 특히 중요하고,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살인마 잭의 집)는 장르 영화는 아니지만, 작게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넓게는 인간의 본질에 이르는 깊이 있는 존재의 탐구를 시도한 영화인데, 형식은 '연쇄살인'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살인의 행위'는 본질이 아니다. 잭이 수십 명을 죽여 냉동 창고에 쌓아두었다 마침내 '집'을 짓는 과정에서 잭이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관객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잭은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그는 작은 집을 지으려 한다. 매우 엄밀하고 완벽한 구조를 갖춘 건물을 구상하고 있지만, 그런 건축물을 지으려는 잭의 시도는 실패한다. 집짓기의 실패와 연쇄 살인의 시작은 맞물려 있다. 잭은 소심하고 겸손하며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인물인데, 그의 내면에서 어느 순간 '사이코패스' 기질이 폭발한다. 그건 우연히 일어난 사소한 상황에서, 한 여성의 농담으로 시작한다. 외진 도로에서 자동차 고장으로 난감해 하는 여성(우마 서먼)을 도와주는 잭에게 여성은 짓궂은 농담을 한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짜증날 정도로 집요하게. 잭의 감정은 따로 이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관객도 이 여성에게 적의를 품도록 만든다. 그렇게 짜증이 폭발한 잭은 살인을 저지른다.
 
잭은 말한다. 자기가 저지른 수십 건의 살인 가운데 몇 개만 말한다고. 그건 잭에게 의미 있는 사건이라는 의미다. 최초의 살인 이후, 잭은 살인을 무덤덤하게 '해치운다'. 그는 살인을 하나의 '작업'으로 여긴다. 그건 여느 사이코패스들이 살인을 하면서 느끼는 쾌감이나 쾌락과는 다르다. 잭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건축의 결과물'로써 살인은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다. 잭은 호숫가에 짓는 '진짜 집'을 완성하지 못하는데, 그가 죽은 사람으로 집을 만드는 건 성공한다. 즉, 잭에게 '살인'은 '집'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잭은 왜 '집'에 집착하고, 집을 완성하려 하는가. 이 질문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관객은 잭의 의도를 알 수 없다. 잭 역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이코패스'의 과거가 매우 불행하고 드라마틱할 거라고 짐작한다. 잭의 과거가 드러나지 않는 건, 어떤 과거로 인해 한 인간이 '연쇄 살인마'가 된다는 결정론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잭의 과거가 불행했을 수 있으며, 반대로 유복한 환경이었을 수 있다. 영화에서 잭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집'은 사람이 사는 건물이자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 된다. 인류는 동굴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땅을 파내 나뭇가지를 얹은 어설픈 형태의 집을 시작으로 점차 정교하고 튼튼한 건물을 세우기 시작한다. 건물은 당연히 권력과 부의 상징이며, 인류의 역사와 함께 권력 관계, 권력 의지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왕궁과 성당은 왕(황제)과 교황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로 지어지고, 종교 건물은 세속의 건물과 다른, 신성의 느낌이 들도록 극도의 조형미를 추가한다. 인간은 특정한 공간에서 특정한 느낌을 갖도록 진화했는데, 이건 최초에는 생존을 위한 '느낌'으로 시작해 점차 종교적, 주술적 공간에 반응하게 되었다. '공간심리학'에서 다루는 인간의 심리는 과학으로 분석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의 느낌과 감정이 공간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잭이 '집'을 지으려는 의도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예술 작품을 만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잭은 진짜 집짓기에 실패한다. 즉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 이건 명백하게 잭의 좌절된 꿈이고, 그 꿈을 이루려는 대안으로 살인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잭이 시신으로 집을 짓는 행위는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겠다는 강렬한 욕망의 표현이며, 그 과정에서 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위를 통해 자기의 욕망을 이룬다. 왜 하필 살인이었을까. '집'을 짓는 행위는 다른 방법도 많을텐데, 왜 살인이어야만 했을까.
 
많은 사람은 '성선설'을 믿는다. 사람은 선하게 태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요인, 환경에 의해 나쁘게 변한다는 이론이다. '성악설'을 믿는 사람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 말하는 '원죄'와 같은 개념을 믿는 사람들이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인류가 200만 년 전부터 본격 인류로 진화하면서 현재 80억 명의 개체를 이룰 수 있었던 건, 집단과 사회를 이루며 서로 의지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서로에게 적대하고 악하게 행동했다면 멸종할 가능성이 더 크다.
세상에는 '악'이 더 기승을 부리고, 악의 기운이 더 강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선량하고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고, 가까이 있는 조금 더 어려운 사람을 돌보며, 이타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집단의 토대를 이루고 있고, '가난의 연대', '선한 의지의 연대'를 이루며 마치 땅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균사체의 뿌리처럼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다.
 
잭은 수많은 '연쇄 살인자' 가운데 한 명이지만, 자신은 '예술'을 위한 살인을 했다고 말한다. '살인'을 예술 행위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 그루누이는 완벽한 향수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른다. 그르누이에게 중요한 건 사람의 목숨, 생명이 아니고, 자기가 추구하는 향수의 완결성, 완벽함에 있다. 즉,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의 목숨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걸 우리는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잭은 '건축'이라는 예술 행위를 위해 연쇄 살인을 했다고 말하지만, 그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모든 살인자들은 자기합리화와 변명을 한다. 특히 연쇄 살인을 하는 사이코패스는 살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을 갖는다.  또한 성장 과정에서 심한 학대를 당하거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거나, 공동체의 윤리, 도덕 등을 배우지 못하는 환경(부모의 영향 등)에 놓인 사람들에게서 사이코패스 경향이 높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인 유영철이나 게리 리지웨이, 테드 번디 같은 범죄자에게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다.
 
연쇄 살인자 잭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도록 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단지 엽기적인 장면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가 연출한 이전의 작품들, '킹덤', '도그빌', '안티 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 등에서도 감독은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극단의 표현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예술 작품은 예술가 자신의 내면의 일부를 형상화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내면의 일부'는 있는 그대로, 날 것의 감정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승화한 형태로 드러나게 되며,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보편적 예술성을 지니게 된다. 또한 그래야 한다. 수준 낮은 예술가들이 저지르는 실수나 오해가, 작가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관객(독자)에게 감동을 일으킬 거라고 믿는 경향인데, 미학적 완성을 거치지 않은 예술은 거칠고 난삽하며, 예술적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한다.
따라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은 일부 사람들이 비난하기도 하지만, 감독 자신의 예술성을 미학적으로 수준 높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살인마 잭의 집'에서 감독은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모습을 드러내려 했을까 질문하면, 인간 정신의 극히 일부에 자리한 '악'에 관한 본성을 드러내려는 걸로 보인다. 지구에는 80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지만, 완벽하게 선하거나, 완벽하게 악한 사람은 없다. 대부분 선량한 사람이지만, 천사같은 사람, 부처님 같은 사람에게도 극히 일말의 '악'한 감정은 존재하며, 세상의 장삼이사들은 그보다 더 많은 농도의 '악'한 감정을 지니며 잘 살고 있다.
 
이때 '악'한 감정은 거의 발현하지 않는다.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면서 때로 적개심과 증오심 심지어 살인 충동까지 느낄 지라도 그걸 실행하지는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폭력을 휘두르면 그에 따르는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런 평범한 사람이 가진 '악'한 감정이 극대화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상상한다.
영화가 잔혹하다고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영화에서 표현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참혹하고, 잔혹하며, 악랄하다. 즉 현실이 상상을 뛰어 넘는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은 당장 현실에서 벌어지는 지옥보다 끔찍한 범죄에 관해서는 모르는 척 할 확률이 높다. 비난의 화살은 영화가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진짜 범죄'여야 함에도, 타겟의 주객이 뒤바뀐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들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감독은 그걸 의도했고, 그런 불편함, 불쾌함, 역겨움을 즐긴다기 보다, 그런 '현상'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길 바란다고 생각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이 불쾌한 관객에게 스르잔 스파소예비치 감독 작품 '세르비안 필름'을 추천한다. 이 영화를 보고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보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이 얼마나 '순한 맛'인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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