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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퀸스 갬빗

by 똥이아빠 202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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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스 갬빗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즌1 1-7화. 한꺼번에 몰아서 다 봤다. 

앤 마가렛을 닮은 베시 하먼은 8살 무렵, 교통사고로 엄마가 사망하면서 고아가 된다. 시즌1에서 베시의 개인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아주 짧게 보여주는 플래시백으로 추측하면, 베시의 엄마는 정상적으로 결혼한 부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베시의 아빠는 등장하지 않고, 연락할 사람도 없다고 했다. 베시는 두 가지 강렬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가 어릴 때 한 남자가 찾아와 엄마에게 애원하는 장면, 엄마가 베시를 데리고 어딘가로 가서 어떤 남자에게 애원하는 장면이다. 이때 두 남자는 같은 인물이며, 베시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베시의 엄마는 마주오는 트럭과 정면 충돌하면서 사망하는데, 이는 엄마의 자살이었고, 이 사고에서 베시는 천행으로 살아남는다. 사고가 발생하기 직전, 베시 엄마는 베시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베시 엄마는 베시와 함께 자살할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겼으나 베시는 살아남았다. 이 트라우마는 베시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이 드라마는 베시의 성장 드라마이면서, 서양 장기인 '체스' 이야기이자, 1960년대 동서냉전 시대와 미국 문화를 잘 드러내고 있다. 베시가 체스 천재라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베시의 엄마 앨리스 하먼은 코넬 대학에서 '단항식 표현과 대칭 표현'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학 명문대학인 코넬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라면 촉망받는 젊은 수학자였을텐데,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시즌1에서 베시의 엄마 앨리스의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시즌1을 보고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이 드라마에는 나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즉 베시 주변 인물은 지극히 평범하며, 상식적 인물이고, 친절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들이다. 보통은, 주인공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고난에 해당하는 사건과 악역을 등장시키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악역을 맡는 특별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인물 사이의 갈등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장면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악역이나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베시가 체스를 두기 때문으로 보인다. 체스 자체가 두 사람이 만나서 대립하는 것이고, 날카로운 두뇌 싸움이며, 상대방과 자신과의 심리전이어서 따로 악역이나 사람 사이의 갈등을 설정하지 않아도 좋고, 오히려 그런 장치가 체스 경기를 치르는 베스에게 방해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졸지에 고아가 된 베시는 고아원에 입소하고, 그곳에서 약 5년 정도 생활한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의 미국 고아원 풍경은 어떤 면에서 부럽고, 어떤 면에서 끔찍하다.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도 고아원이 나오는데, 19세기 영국고아원은 끔찍하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환경이지만, 베시가 생활하는 고아원 역시 따뜻하고 아늑한 가정집과는 거리가 멀다.  

 

베시는 고아원 입소 첫날부터 '비타민'을 의무적으로 받아 먹는다. 모든 원생은 '비타민'을 먹는데, 두 개의 알약 가운데 하나가 '진정제'였다는 건 나중에 밝혀진다. 고아원 운영자와 관리자들은 진짜 비타민과 함께 진정제를 먹이는 것에 어떤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이는 마치 19세기 영국 고아원에서 아기들에게 럼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유모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칭얼대거나 울지 않고 긴밤을 깊고, 오래 잠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발견한 방법이었으므로, 영아들은 치명적인 알콜중독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베시가 머문 고아원 역시 그 정도는 약했지만 어린 여자아이들 가운데 약물중독에 이르는 경우가 나타났고, 베시도 그런 아이였다. 베시의 고아원 생활은 짧고 건조하게 묘사되고 있다. 베시는 고아원에서 두 명을 만나는데, 첫날 알게 된 '졸린'과 건물관리인 '샤이벌'이 그들이다.

두 사람은 베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시즌1에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샤이벌'은 시즌 끝부분에서 사망한다.

베시는 두 사람을 만나면서 자기에게도 '가족'이 생겼다는 걸 어렴풋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신적으로 큰 위안이 된다는 걸 베시는 느낀다.

 

수업시간에 수학문제를 가장 먼저 풀고 조용히 앉아 있던 베시에게 선생님은 칠판지우개를 털고 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베시는 샤이벌을 만나게 되고, 샤이벌이 혼자 체스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체스가 마음으로 들어온다. 나중에 베시가 밝히지만, 8살 베시의 마음은 황폐하고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움으로 괴로운 상태였다.

그때 흑백의 체스판이 눈에 들어왔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체스에 마음을 빼앗긴다. 무언가 몰두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베시에게 체스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베시는 당돌하게 할아버지 샤이벌에게 체스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고, 샤이벌은 무뚝뚝하면서도 살갑게 베시에게 체스를 가르쳐준다. 

두 사람은 체스를 두면서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위로와 위안의 대상이 된다. 샤이벌은 노인이고, 고아원의 건물관리자로 일하면서 시간이 조금 빌 때마다 지하에 내려와 혼자 체스를 두는 노인이다. 샤이벌에게는 가족이 없을까. 처음부터 가족이 없었거나, 있어도 인연을 끊은 채 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장례식에 가족이 참석하지 않았으니.

 

베시 자신도 체스에 천재적 재능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베시가 체스에 끌린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선택이었다. 베시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프로 체스선수가 되는데, 베시가 대학에 진학해 수학을 전공했다면 엄마처럼 수학자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크다.

짧은 시간에 샤이벌을 이긴 베시는 샤이벌의 도움으로 근처 고등학교 체스선수들과 시합을 갖고 그들을 모두 이긴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베시는 과거의 불행하고 외로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체스에 있다고 믿는다.

영웅신화에서 영웅의 탄생에는 반드시 고난과 멘토가 존재한다. 베시는 어려서 부모를 잃는다는 설정은 고전에서 이미 수없이 다룬 클리셰다. 콩쥐도, 장화와 홍련도, 심청도 어머니를 어려서 잃는다. 이들이 '여성'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드라마를 페미니즘 영화로 보는 건 지나치지만,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이 겪는 고난은 거의 모든 집단과 국가에서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사회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어린 베시가 고아가 되고, '대체 가족'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졸린'과 '샤이벌'인데, 이들은 각각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상징한다. 졸린은 같은 여성으로, 몇 살 많은 언니지만, 일찍 고아원에 들어와 베시에게 고아원 멘토가 되고, 친구처럼 지내며, 때론 엄마처럼 베시를 돌봐준다. 샤이벌은 할아버지면서, 아버지다.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샤이벌은 베시의 재능을 드러내도록 돕고, 베시가 더 넓은 세상에 나갈 수 있는 기본을 갖추도록 돕는 역할이다. 즉, 고아원 안에서는 졸린이, 바깥에서는 샤이벌이 베시의 세계를 구축하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베시가 체스로 성공하고, 졸린을 만나서 샤이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둘이 샤이벌의 장례식에 참석해 베시가 샤이벌이 머물고, 자신이 체스를 배웠던 그 지하실에서 샤이벌이 스크랩한 자기의 신문기사를 보면서 오열하는 장면은, 누가 진짜 아버지인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베시는 열 세살에 입양된다. 베시의 부모는 평범한 사람이고, 다른 아이는 없어서 베시가 유일한 자식인데, 청소년 고아를 입양한 이유는 관객이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설정했다. 베시의 양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매우 바쁜 사람이고, 처음부터 입양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인물이다. 베시를 입양한 사람은 양엄마인데,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아이를 입양해 돌보거나 대화를 나누면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가 있다. 그녀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으나 무대공포증이 있어 무대에 서지 못한 좌절감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이 양부모의 역할은 베시가 고아원에서 나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 보호자가 되는 것이다. 베시는 학교에 다니며 스스로의 힘으로 체스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체스를 잘 두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양엄마를 설득해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서 양엄마와 둘이 체스대회를 다니며 돈을 번다. 이때는 이미 양아버지는 먼 곳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한 이후여서, 베시와 양엄마는 경제적인 문제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베시가 체스대회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양엄마는 적극적으로 베시의 매니저가 되어 텍사스주 뿐아니라 다른 주까지 옮겨다니며 각종 대회에 출전해 상금을 쟁취하며 승승장구, 잘 나가는 체스 챔피언과 매니저로 활동한다.

그러다 베시의 양엄마는 어느날 갑자기 호텔에서 사망하는데, 이 부분은 드라마의 진행에서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마 양엄마의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갑자기 사라지도록 만든 것인데, 어색한 부분인 건 분명하다. 양엄마의 퇴장은 베시가 이제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개척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베시의 성공은 빠르게 그려진다. 고아원 생활, 입양은 스케치로만 보이고, 베시가 체스로 승승장구하면서 미국챔피언십, US오픈 같은 큰 대회를 치르며 전국적 인물로 등장하고, 마침내 체스세계 챔피언인 러시아의 보르고프와의 대전을 향해 질주한다.

이 시기의 세계 체스는 러시아가 단연 최고 수준이고,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이 그 뒤를 따르고 있으며, 미국은 변방이었다. 바둑으로 치자면 한국과 중국이 최고 수준이고 일본이 그 아래,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가 변방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런 체스의 변방에서 어느 이름도 없던 한 여성이 혜성처럼 나타나 세계챔피언을 꺾고 새로운 챔피언이 되는 건,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며, 불우하게 성장한 소녀가 스타가 되는 헐리우드식 '스타 탄생'의 줄거리와 같다. 

시즌1의 줄거리만 보면, 스타 탄생과 영웅 신화의 클리셰가 분명하게 보이는데,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시즌1에서 보인 것은,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가 뻔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시즌1의 후반에서 고아원 친구이자 언니인 졸린이 나타나고, 베스는 챔피언이 되어 정점에 이른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요소는 주인공 베시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스타 탄생'의 줄거리로 관객의 대리만족을 충족시키고, 주인공인 배우 안야 테일러조이의 매력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악한과 악당이 나오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히 재미있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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