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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러브, 데쓰 + 로봇

by 똥이아빠 202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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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 미래를 이끈다 : 러브 데스 + 로봇

 

무적의 소니

뇌파로 조종하는 괴수 싸움에서 한번도 지지 않은 카니보어와 그를 조종하는 소니의 이야기. 강렬하고 화려한 액션과 반전이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대형 괴수인 카니보어나 터보 랩터는 대형 파충류처럼 보이는데, 이런 생물은 자연진화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공학을 활용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카니보어는 장소를 옮길 때 커다란 액체가 담긴 통에 들어가는데, 이는 여성이 임신했을 때, 자궁 안에 양수가 있고, 그 안에서 아기가 자라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다. 즉, 카니보어는 양수 속에서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며, 격투로 인해 발생한 상처를 치유한다.

생명공학으로 만든 괴수라 해도 통증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니보어와 터보 랩터가 싸우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정도의 과학기술이라면 DNA 조작을 통해 통각을 제거할 수 있음에도 통각을 살려두었다. 이는 '통증'이 단지 아픔, 고통을 느끼는 신호가 아닌,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괴수를 조종하는 것은 인간의 뇌파인데, 인간은 통증을 느낀다. 만약 괴수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괴수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상처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빨리 알아내기 어렵다. 통증의 경중을 통해 방어와 공격의 전술이 달라지는 건 괴수를 조종하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보라는 걸 알 수 있다.

소니와 카니보어 팀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격투기에서 지지 않은, 무적의 팀이다. 미래의 도시 외곽, 낡고 허름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괴수의 격투는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철저한 경비를 거쳐야 하고, 신분도 확실해야 한다. 거액의 판돈이 오가는 격투 도박판으로, 사회의 그늘에서 벌어지는 불법 격투장인 걸 알 수 있다.

과학기술은 생체공학으로 거대한 괴수를 만들 수 있지만, 정부는 이런 행위를 금지하고, 불법으로 규정해 처벌한다. 소니와 카니보어 팀은 격투장을 오가며 큰 판돈을 놓고 싸우면서 돈을 벌지만, '파이트머니'는 이런 일련의 위험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그래서 도박사 '디코'의 제안은 솔깃하다. 딱 한판만 져주면 거액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디코의 말을 소니의 매니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불법 도박판에서 다시 상대를 속이라는 제안은 이 괴수 격투 사업이 얼마나 오염되었는가를 보여주면서, 소니와 카니보어 팀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를 드러낸다.

최고의 반전은 마지막 장면에서 일어난다. 터보 랩터에게 큰 상처를 입었지만, 격투에서 승리한 카니보어는 양수에 잠겨 휴식에 들어가고, 불법 거래를 제안했던 도박사 '디코'와 비서가 나타나 소니를 살해한다. 디코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디코의 비서 역시 생명공학으로 만든 괴수와 같은 종류라는 게 드러나고, '소니'는 처참하게 짓밟혀 죽는다. 보통의 경우, 인간이 뇌파로 괴수를 조종하지만, 카니보어는 소니가 '파괴'(소니는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음'은 의미가 없다)되자, 자신이 직접 밖으로 나와 디코와 그의 비서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소니와 카니보어의 관계는 다른 괴수 팀과는 반대였다. 사람이 뇌파로 괴수를 조종하는 것이 보편이라면, 소니의 진짜 생명(뇌)은 카니보어에 있고, 소니는 카니보어의 명령을 받는 '바이오웨어 프로세서'를 가진 생체로봇이었다.

이 역전 현상은 단순한 반전을 넘어서, 생명공학, 생체로봇의 기술과 영역이 어떻게 진화 또는 변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생명공학으로 탄생한 괴수는 '지성'을 갖지 못하고, 단지 인간의 뇌파로 움직이는 아바타 역할에 머물렀으나, 인간의 뇌(여기서는 소니의 뇌)를 이식한 괴수는 인간의 지성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가 됨을 알 수 있다.

이때, 생명윤리적 시각에서 인간의 지성을 가진 괴수와 인간의 뇌파로 움직이는 괴수의 싸움은 정당한 것인지 문제가 된다. '소니'는 이미 인간이었을 때, 갱단에게 폭행당해 사실상 죽었다. 소니를 살릴 수 없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소니의 뇌를 카니보어에게 이식하고, 소니의 육체는 조립해 생체로봇으로 만들어 움직이도록 만든 것이다.

카니보어가 그렇게 강하고, 한번도 격투에서 지지 않았던 이유도, 소니가 갖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즉, 뇌파로 조종하는 괴수는 그런 자각과 인지가 없어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카니보어는 인간 '소니'의 뇌를 가진 괴수이므로 인간이 갖는, 특히 소니가 당한 개인적 폭력의 공포와 두려움을 내재하고 있다. 소니는 사실상 죽었지만, 그가 느낀 죽음의 공포는 그의 뇌에 새겨졌고, 그 트라우마가 괴수 격투 상황에서 강력한 전투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를 재해석해야 한다. 육체가 없이 '뇌'만 존재하고, 그 뇌가 원래 태어날 때 있던 육체가 아닌, 다른 생물체 - 그것도 생명공학으로 즉 인위적으로 만든 괴수의 육체 - 의 육체에 이식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억' 즉, 뇌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의 총량을 컴퓨터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하자. '기억'만으로는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이 '기억'을 인공지능으로 만든 가상의 인물과 결합하게 되면, 육체는 없지만 '개인'의 기억과 의지를 갖는 존재가 생성된다. 이것을 우리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래의 과학기술 - 유전학, 생명공학, 생체과학, 인공지능, 로봇 등 - 은 윤리적 문제를 필연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윤리와 도덕, 철학의 관점에서 '인간' 또는 '개인'의 존재를 규정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게 되리라 본다.

 

세 대의 로봇

인류는 절멸했다. 건물은 파괴되었고, 죽은 사람은 해골만 남아 있다. 각각 생김새가 다른 세 대의 로봇이 나타나 폐허가 된 도시를 돌아다니며 '관광'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언어로 소통하고, 인공지능을 탑재해 스스로 정보를 습득한다. 

하지만 이들의 인공지능 수준은 낮은 편이어서, 농구공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닥에 튕기는 건 알지만, 서로 편을 갈라 상대방 농구골대에 공을 넣어 점수를 획득하는 방식의 스포츠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후에 다시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로봇들은 인간이 남긴 오래 된 햄버거를 보면서, 인간이 이걸 먹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로봇이 인간의 음식물 섭취와 소화 과정을 묘사하는 걸 보면 마치 환형동물을 보는 듯하다. 뾰족한 이빨이 있는 구멍으로 음식물을 집어 넣으면, 산성 액체가 들어 있는 내부에서 음식물을 녹인다는 것인데,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지만 인간의 신체구조는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로봇의 수준을 더 높이지 못한 채 절멸당했고, 로봇은 인간이 사라져 새로운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 배터리를 충전해야 하는 로봇들은 도시의 황폐화가 진행하고, 문명이 자연에 묻히게 되면, 더 이상 배터리를 충전할 수 없는 방법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폐기될 운명이다.

세 로봇은 우연히 고양이를 발견하고, 고양이는 로봇에게 다가가 마치 인간을 대하듯 몸을 비비며 친근하고 귀엽게 행동한다. 하지만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하고, 인간을 절멸시킨 건 바로 고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이 고양이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고양이가 저절로 진화를 통해 사람의 말을 하거나, 손톱이 자라 참치캔을 따게 된 것은 아니다. 고양이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실험이 있었고, 고양이는 인간에 의해 비정상으로 변한다. 인간을 멸절시킨 것은 고양이고, 로봇을 만든 것은 인간이며, 고양이를 바꾼 것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로봇과 인간과 고양이는 서로에게 관련이 있는 존재다.

고양이는 인간을 절멸시켰고, 로봇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폐기될 존재지만, 고양이는 과연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까. 인간 대 자연의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만든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문명이 사라지면서 '자연화'가 진행하면 동물이 살아남을 확률은 더 커진다. 

핵발전소 폭발로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역인 '체르노빌'에서는 자연이 살아나면서 동물의 먹이사슬이 다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이 간섭하지 않는 자연은 스스로 회복하는 힘이 있고, 동식물은 저절로 번식하게 된다. 이 짧은 작품은 인간의 절멸을 우화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인간종의 절멸이 지구 전체의 동식물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과 3백만년 전에 인류의 조상에게서 갈라져 나온 인류가 수억 년의 살아온 동식물을 괴롭히고, 착취하고, 말살해 왔던 야만적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목격자

길 건너 창문에서 어떤 남자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스트리퍼. 그는 살인자를 피해 도망하지만, 살인자는 그를 쫓는다. 살인자를 피해 그가 일하는 클럽으로 뛰어들어 가지만, 살인자는 그를 따라온다. 무대에서 공연을 하다 살인자를 발견한 스트리퍼는 다시 밖으로 도망가고, 우연히 들어간 곳이 바로 자기가 살인을 목격한 그 아파트였다. 살인자는 그곳까지 따라오고, 두 사람은 몸싸움을 하다 총이 발사되어 살인자 남자가 죽는다. 겨우 살아난 스트리퍼는 당황하고 정신이 없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들리고, 자기를 바라보는 어떤 남자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갖는 구조와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두 사람은 하나의 인연으로 묶여 같은 인과를 만들어 내는데, 이런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이지 않는 반복 구조를 갖는 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과응보', '사필귀정'으로 귀납되지만, 이 작품에서 스트리퍼 여성과 남성은 사실 한 사람이다. 두 사람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한 사람의 내면에 들어 있는 인간의 양면성, 이중성을 상징한다. 

여기서 죽음은 끝일수도 있지만, 시작이기도 하다. 즉 시작과 끝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건, 삶과 죽음이 만나는 지점이 죽음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죽음은 단지 육체적 사멸을 뜻하지 않고,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의미하며, 영혼은 다시 '영'과 '혼'으로 구분한다. 이 작품에서 '영'과 '혼'은 하나의 육체를 공유하며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인간의 욕망과 억눌린 잠재의식은 자아의 분리를 통해 표출한다. 남성성은 노출되어 있는 여성성을 향해 질주한다. 작품에서 여성 주인공이 스트리퍼라는 것, 여성이 심한 노출 상태로 무대에 서거나, 도망할 때, 거리를 달릴 때도 그의 육체가 드러나는 것은 여성이 '자발적'으로 노출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성성에 의해 '벗기운'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여성성의 육체적 환유는 남성성의 욕망의 대상인데, 이때 두 성별은 하나의 욕망에서 탄생한 두 개의 자아다. 이들 두 개의 자아는 평범한 상황에서는 분리되지 않지만, 특수한 상황, 비정상적 상황에서 자아는 분리한다. 남녀 두 사람은 서로 쫓고 쫓기기를 반복하지만, 이때 관객이 보는 것이 실제 육체를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어떤 사람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보게 되는 환영, 환상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두 남녀는 극심하게 흥분한 상태로 쫓고 쫓기며, 상대방을 의심하고, 쫓기는 쪽에서는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 두 사람이 분리된 자아의 환영이라면, 그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는 어떤 상태에 있을까.

실제 살인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추측되는-이 아파트 3층의 작은 공간에서 마약을 하고, 마약에 취해 환각을 보게 된다. 그는 어쩌면 마약 과다복용으로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창밖으로 어떤 여자를 보게 되고, 그때부터 그의 의식은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때론 남성이 되었다가, 여성이 되기도 한다. 그는 죽지만 다시 살아나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며 쫓기다 다시 상대방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해명하려 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살인자로 여겨 도망친다. 이 모든 것은 환각과 상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며, 두 사람은 영원히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들끓는 욕망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상의 공간을 맴돌게 된다.

 

슈트로 무장하고

농장을 경영하는 행크 가족과 이웃들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지만, 침입 경보가 울린다. 이들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구멍이 뚫린 곳이 어디인지 레이더로 확인한 다음, 슈트에 올라타 구멍이 뚫린 곳으로 향한다. 농장에 설치 되어 있는 첨단 장비와 무기를 보면, 이곳이 범상치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이미 이들은 여러 번 이런 공격을 겪었고, 그때마다 방어를 잘 했기에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다.

수천, 수만 마리가 떼지어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당황하지 않고 침입한 괴물들에 맞서 싸운다. 이 곤충처럼 생긴 외계의 괴물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스타쉽 트루퍼스’나 ‘에일리언’ 등에 나오는 파충류처럼 생긴 이 생물체는 단단한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다. 저 방어막 바깥에는 대체 어떤 세상일까.

동료 한 명의 죽음으로 막아낸 외계 생물의 침입으로 잠시 평화로운 시간이 되었으나, 방어막 바깥에서는 다시 거대한 외계 생물이 몰려 들고, 이들이 살고 있는 행성은 지구가 아닌, 척박한 지구형 행성의 작은 일부분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지구를 떠나 이 행성에 정착했으며,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거대한 돔을 씌우고, 공기와 물을 공급해 농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고, 지구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어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행성을 찾아 떠돌다 이런 척박한 행성이라도 거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구에서 우주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선발대를 모집했고, 그 선발대로 다른 행성에서 정착하기로 결정한 몇몇 가구에 대해 특별한 혜택을 주며 우주 식민지를 개발하는 임무를 부여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이들은 지구를 떠나 낯선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외계 생물과 맞서 싸워야 하는 무섭고 두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인류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는 건 누구나 예상하지만,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나쁜 상황임에 틀림없다. 핵 전쟁, 환경오염, 전염병 등 인간의 절멸을 가져오는 극단적 위협은 한두 경우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을 위협하는 건, 인간 스스로 만든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인류가 우주 식민지를 개척할 만한 능력이 된다면 극소수 인간은 우주로 탈출해 새로운 행성에서 생존을 이어갈 지 모르지만, 인류 전체는 지구에서 마지막 숨을 쉬다 죽게 될 것이고, 인류의 멸절은 예정된 수순일 뿐, 시간을 앞당기는 건 오직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주 식민지 개척은 인류가 지속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하지만, 지구 이외의 행성에서 인간은 ‘외계인’일 뿐이다. 

지구에서 ‘인간’은 오랜 시간을 거쳐 진화를 통해 나타난 생물이지만, 외계에서 ‘인간’은 다른 행성에서 불쑥 나타난 침입자이자 외계인이며, 이질적 유전자를 가진 유해하고 위험한 생물일 뿐이다. 외계 행성으로 진출하는 인간은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을 함께 가지고 나가게 되는데, 이건 15세기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온갖 질병을 퍼뜨리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인간’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며, 인간의 감정에 이입한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으로 바라보면, 인간은 그 행성에서 침입자이자, 강력한 힘으로 자신들의 근거지를 침해하고 위협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무덤을 깨우다

고대 왕국을 발굴하던 고고학자는 무덤을 발견한다. 무덤의 관뚜껑에 쓰인 글자는 왕자였지만 드라큘라이기도 했던 인물의 관이었다. 관을 살피던 고고학자의 조수인 대학원생(한국인)은 깊은 동굴 안쪽에서 나타난 드라큘라 왕자에게 살해당하고, 고고학자와 용병들은 드라큘라와 싸우며 후퇴한다. 지하 깊은 곳에 사는 이들 드라큘라는 18편 ‘숨겨진 전쟁’에 등장하는 구울과 연결해서 해석할 수 있다.

땅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변형된 드라큘라이자 악령의 현현이다. 무덤에서 깨어난 자는 인간의 형체가 아닌, 악마의 모습이다. 이것은 살아서 악령에 점령당했거나, 스스로 악마가 된 자들이 죽어서 악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서양에서 악마의 존재는 유일신,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 등 흑백의 세계,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세계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단순한 흑백논리의 세계관은 고대 인류가 가졌던 낮은 단계의 지성에서 비롯한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고, 인류의 지식이 보잘 것 없던 시기에 생성된 이분법적 흑백 논리는, 지배집단이 다수의 무리를 이끌기 위해 필요했던 논리이기도 하다.

중동에서 시작된 종교는 유일신을 믿었지만, 모든 유일신은 태양신앙의 변형일 뿐이다. 악마는 타락한 천사이며, 지옥은 타락한 천국이다. 즉, 지배집단은 말을 듣지 않고 저항하거나, 이탈한 무리를 악마화하기 시작했고, 지배집단은 '선'으로 규정지었다. 선과 악의 대립은 곧 지배, 피지배 집단의 대립을 상징하며, 악마와 이단화, 사탄화하는 대상은 그 시대에서 소수 집단이자, 지배집단과 대립해 패배한 세력 또는 개인이었다.

이 작품에서 환생한 드라큘라 왕자는 살았을 때 이미 악마가 된 인물로, 그의 육체적 죽음은 큰 의미가 없었다. 악마는 땅속에서 죽은 것처럼 누워 있지만, 인간이 자신을 찾아내면 그들이 읽는 주문으로 환생한다.

하지만, 사람을 찢어죽이는 악마라 해도 고양이 앞에서는 벌벌 떤다. 코믹하게 보이는 이 장면은 고양이가 서양에서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고양이는 악마의 현현이자 대리인이며 악마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 악마를 찾아내고, 악마를 쫓는 역할도 한다.

악마 하나를 힘겹게 처치하고 동굴의 미로를 따라 가지만, 고고학자와 용병 일행은 거대한 땅굴에서 수많은 또다른 악마들을 맞닥드린다. 이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들을 따라온 고양이가 유일한 희망이지만, 열린 결말로 끝난다.

 

요거트가 세상을 지배할 때

5분 정도 짧은 작품이고, 우리가 먹는 '요거트'가 지구, 아니 인간을 지배한다는 설정은 황당하고 터무니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양한 메타포를 내재하고 있는 작품으로, 우리는 이 작품에서 유일신에 대한 풍자부터 생명공학, 인공지능, 유전학, 물리학, 경제학, 우주물리학, 군중심리학, 대중정치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먼저, 인간은 발달한 과학기술로 유전자를 복제, 조작할 수 있게 되었고, 과학자들이 가장 우수한 유전자(DNA)인 '락토바실러스 델브루에키이'를 요거트 발효균에 이식하고, 우연인지 그 가운데 일부 요거트에서 화학 변화가 일어나면서 요거트가 '지각'을 갖게 된다. 유전자 조작으로 생물이 변이를 일으킬 수는 있어도 '지각' 활동을 하게 된다는 건 비과학적이다. 유전자도, 발효균도 단백질이니 단백질끼리 결합을 할 수는 있겠으나, 단백질이 '생각'을 하고, '말'을 한다는 건 분명 만화적 과장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저 우주 밖에 스파게티면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지구와 우주를 창조했다는 '신'의 존재를 지구에 사는 70억 인구 가운데 50억 명 이상은 확신을 갖고 믿고 있다는 걸 볼 때, 저 우주 밖에 스파게티면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주장을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발견한 '락토바실러스 델브루에키이' 유전자를 조작하면서 인공지능 유전자를 삽입했다고 가정하자. 지각이 있는 요거트는 정부를 상대로 국가 부채를 완벽하게 상환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대신 자신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지역으로 '오하이오주'를 달라고 말한다.

요거트의 요구 사항은 터무니 없지만,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정부와 정치인들이다. 대통령을 비롯해 대통령 주변에 있는 고위 관료들은 국가부채를 완벽하게 상환한다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국가채무를 갚아주겠다는 말에 무조건 옳은 말인줄 알고 요거트의 협상을 받아들인다.

국가채무는 그냥 빚이 아니다. 따라서 그걸 한꺼번에 갚을 이유도 없고, 갚아봐야 결국 국민들이 나눠 갖게 되는 것이다. 국가채무는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빚을 지는 것이고, 채권자가 국민이기 때문에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이런 걸 갚는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고, 어리석은 것인데, 정부와 관료들은 물론 국민들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고, 요거트의 협상을 받아들이고, 요거트가 주장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

요거트는 지구에서의 삶보다는 우주로 나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자 한다. 인간들은 요거트를 마치 '신'처럼 대한다. 절대 복종과 믿음, 지구가 아닌 우주에 존재하는 요거트, 이게 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거트가 인간들이 만든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는 장면은, 요거트(신)의 입장에서 지구가 더 이상 매력 있는 별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요거트가 지구를 떠나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거트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게 되면서, 인류는 파멸하지만, 요거트의 말을 따르면 인간들의 삶은 행복해진다. 이때 인간의 삶은 진정 행복하고, 평화로운가. 인간은 노예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요거트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은 과연 행복할까, 불행할까. 

 

독수리자리 너머

인간의 근원적 공포를 다룬 작품. 우주 공간에서 미아가 된다는 설정은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지만, '코즈믹 호러'는 러브크래프트가 심해의 괴물을 등장시키면서 미지의 생명체, 미지의 불가사의한 존재, 심해, 깊은 동굴, 우주 등으로 확장되면서 인간의 본능 속에 있는 공포의 감정을 건드리는 장르다.

무한한 우주 공간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공포로 다가오는데, 여기서 길을 잃고 다시는 집(지구)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치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게다가 자신이 있는 곳이 단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 뿐 아니라, 우주의 쓰레기가 모이는 폐차장 수준의 폐허라면 기분이 어떨까. 

인류가 우주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과학기술을 지니고, 지구에서 먼 거리의 은하계까지도 타임워프 - 시공간을 뛰어 넘는 기술 - 를 통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미래. 우주선 '블루 구스'의 승무원 세 명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좌표를 입력하고 워프 이동 장치에 들어가면서 동시에 '동면'에 들어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톰이 먼저 깨어난다. 좌표를 확인한 톰은 자신들이 가야 할 목적지에서 경로가 많이 벗어난 것을 알고 당황한다. 그들은 지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타임워프로 빠져나와야 하는데, 이들이 도착한 곳은 가야할 목적지에서 많이 벗어난 곳이었다.

이때 톰 앞에 나타난 사람이 그레타였다. 문제가 발생한 순간 우연하게 그레타가 나타난 것도 이상하고, 우주선 밖에서 안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지만, 톰은 그레타의 등장에 안심한다. 이들은 4년 전 연인 사이였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헤어졌고, 여전히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동면에서 깨어난 톰의 동료 수지는 그레타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떨며 소리 지른다. 저 사람은 그레타가 아니라고. 수지가 휘두른 흉기에 그레타의 목에 상처가 생기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흉터는 사라진다. 이걸 보면서 톰은 수지가 한 말에 진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레타를 다그친다. 그레타는 지금처럼 자신과 함께 살아가자고 말한다.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이라고, 톰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였으니, 자신과 함께 안전하게 이곳에 남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지만, 톰은 그레타에게 화를 내며 진실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다그친다.

톰이 보게 된 '진짜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우주의 쓰레기들이 모이는 폐허 같은 공간, 함선은 이미 거미줄에 덮혀 있고, 주변에는 수 많은 다른 함선들 파편이 떠다니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함선은 낡아 삭아버렸고, 동료들은 이미 해골이 되었으며, 그는 뼈만 남은 채 늙은이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톰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는데, 여기에 '진짜' 그레타가 나타난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마치 거미처럼 보이는데, 거미도 아니고, 파충류로 보이는 외계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분명 그레타였으며, 그 폐허의 공간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기도 했다.

다시 동면에서 깨어난 톰은 자신이 본 '진짜 현실'의 기억이 삭제된 채 그레타를 만나면서 끝난다. 톰이 처음 동면에서 깨어난 다음부터 그레타를 만나고, 진실을 확인하고, 다시 동면에서 깨어나 그레타를 만나는 과정이 어쩌면 무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톰의 물리적 생명도 있으니 언젠가는 이 과정이 끝나겠지만 - '진짜 현실'에서 톰은 이미 늙은이가 되었다 - 기억과 현실의 무한 반복은 톰이 타고 온 우주선이 타임 워프를 지나면서 문제를 일으켰고, 그 안에서 톰의 공간이 다시 타임 워프를 통해 무한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그레타의 실제 모습은 폐허가 된 이 공간에 살고 있는 파충류를 닮은 외계인이 만든 가상 입체인물이다. 즉 이 외계인은 실제와 똑같은 입체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 또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레타로 등장하는 이 파충류 외계인은 톰에게 호의를 베푼다. 진실을 알게 되면 더 큰 고통이 있을 거라고 충고하고,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지구는 포기하고, 이곳 - 비록 시뮬레이션이지만 -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톰의 기억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인 그레타로 변신해 등장한 것이다.

톰은 진실을 알고자 하고, 진실을 알았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받지만, 거미를 닮은 외계인은 그런 톰의 기억을 삭제한다. 톰은 다시 우주선 내부로 돌아오지만, 이때 톰이 보고 삭제된 기억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조작된 기억인지는 알 수 없다. 즉, 진실은 분명하지 않다. 우주선에 남은 톰의 모습이 진짜인지, 폐허가 된 우주공간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도 없고,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톰이 동면에서 깨어나 그레타를 만나는 것도, 그레타가 '진짜 현실'이라고 보여주는 공포의 장면도 모두 지금 톰이 동면 상태에서 꾸는 꿈일 수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다. '진짜 공포'는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굿 헌팅

동양의 고대 전설인 구미호, 19세기 산업사회가 배경인 홍콩, 기계 문명의 발달을 전제하는 스팀 펑크 그리고 페미니즘이 버무려진 이야기. 사람(남성)을 홀려 잡아 먹는 구미호를 사냥하는 아버지와 아들(량). 두 사람은 구미호에 홀린 남자가 내는 비명 소리를 듣고 구미호가 올 거라고 예상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나타난 구미호는 아리따운 여성의 모습이었고, 량의 아버지는 칼을 휘둘러 구미호의 목을 벤다.

량은 죽은 구미호의 새끼 '옌'을 발견하지만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고 숨긴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가 살던 홍콩은 영국식민지가 되었고, 기차가 들어온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줄곧 새끼 구미호 예과 함께 지내던 량은 시골을 떠나 홍콩으로 가겠노라고 옌에게 말한다.

량은 홍콩에서 기차 수리공으로 일하며 기계의 원리를 배우는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영국인(백인 남성)들에게 희롱당하는 옌을 발견한 량은 옌을 구하고, 그가 마법 능력이 사라지면서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홍콩으로 나와 몸을 팔며 생활한다는 말을 듣는다.

식민지로 전락한 홍콩은 중국 영토였지만, 영국과의 전쟁에서 지고, 홍콩을 100년 동안 빌려주는 조건으로 빼앗긴다. 홍콩 땅에 살던 중국인들은 식민지 주민이 되어 영국인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들은 서양 백인들에 의해 비하, 조롱, 멸시의 대상이 된다. 이는 서양의 제국주의가 15세기 이후 줄곧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면서 보여준 오만함과 악랄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옌'이 매춘부로 살아가는 것은 식민지 여성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미호를 '여성'으로 그린 것은 여성이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말한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 성적 대상화로 전락한 존재이며, 남성을 '홀리는' 위험한 존재이자, 남성의 적대적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명백히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대상화, 도구화,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남성 중심의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이 작품은 남성의 반동적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

량은 기계를 잘 다루는 재능을 활용해 작은 로봇들을 직접 만든다. 이때는 '스팀'이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이므로, 기계의 내부에는 작은 화로(보일러)가 있어야 하고, 물을 끓여 수중기를 내뿜는 힘으로 동력 삼아 기계를 움직여야 한다.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이 만든 영화 '스팀보이'에서도 스팀이 동력이 되는 기계가 비현실적으로 움직이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작은 로봇들이 스팀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장면이 나온다.

옌은 영국 총독을 손님으로 맞이하는데, 영국 총독은 옌의 몸을 모두 기계로 바꿔버린다. 즉, 원래의 몸은 일부만 남기고 모두 기계로 대체한 것이다. 영국 총독은 기계를 보면 흥분하는 '메카노필리아'였으며,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곳으로, 영국인 즉 백인 남성이 갖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들이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백인 국가를 제외한 모든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그들은 마치 '신'처럼 인간의 생명도 좌우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은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노예나 가축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옌을 사이보그로 만든 것도 이런 인식이 바탕에 깔여 있었고, 더구나 여성인 옌을 사이보그로 만든 것은 여성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 기계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태도다.

사이보그 인간이 된 옌은 량을 찾아와 자신을 이렇게 만든 남성(특히 백인 남성)들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원래의 몸으로 돌이킬 수 없다면, 기계의 힘을 빌려 구미호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량에게 부탁한다. 량은 옌의 몸을 보고 놀라지만, 량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 옌의 몸을 개조해 인간의 모습과 사이보그 구미호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로봇으로 개조한다.

과거의 진짜 마법은 사라졌지만, 과학의 힘으로 새로운 마법을 얻게 된 옌은 밤이 되면 구미호로 변신해 여성을 괴롭히는 백인 남성들을 처치하기 시작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는데, 기존의 남성우월주의, 남성가부장제는 사람을 착취하는 자본주의가 더하면서 여성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여성은 성적 대상화로 전락하고, 심지어 식민지나 전쟁 상황에서는 성노예로 전락하게 되며, 여성은 노인, 아이처럼 '노약자' 또는 '사회적 약자' 취급을 받는다. 옌의 변신은 남성에 의해 거세당한 여성성에 대한 분노이자, 남성우월주의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으로 나타난다.

 

쓰레기 더미

데이브 노인은 쓰레기 하치장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는 20년 전부터 이 쓰레기 하치장에서 살고 있고, 자신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사는 듯하다. 어느 날, 시에서 나온 조사관이 데이브를 찾아온다. 쓰레기 하치장 주변으로 콘도미디엄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쓰레기 하치장을 전부 철거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거라고 말하며 데이브에게 동의서에 서명해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데이브는 쓰레기 하치장에서 나가지도 않을 것이며, 철거에 동의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2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보라며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2년 전, 데이브는 친구 펄리와 함께 이곳 쓰레기 하치장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두 사람이 맥주를 마시며 여자 이야기를 하다 펄리가 오줌이 마렵다며 쓰레기 더미에 소변을 보고 있을 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총소리가 들리고, 펄리가 바지도 추스리지 못한 채 놀라서 달려와 데이브에게 괴물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촉수가 펄리의 몸에 붙어 펄리를 끌어당기고, 펄리는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데이브는 총으로 괴물을 쏘지만, 괴물은 몸에 총구멍이 생겨도 죽지 않는다. 그는 거대한 몸집을 이룬 쓰레기 더미, 그 자체였던 것이다.

데이브는 ‘오토’를 부르고, 이야기가 끝나자 조사관 뒤로 나타난 ‘오토’는 강아지가 아니라 거대한 쓰레기 더미였고, 그 괴물은 펄리를 삼킨 것처럼, 조사관을 한입에 삼켜버린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쓰레기 하치장은 도시 외곽에 있으며, 도시에서 나온 온갖 더러운 것, 폐기물, 더 이상 인간들이 쓰지 않거나, 쓰다 버린 물건들이 한 곳에 모이는 곳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나온 재료를 가져와 가공한 다음 먹고, 입고, 쓰는 식품과 물건을 만들어 풍요롭게 살지만, 그 많은 물건들은 다시 폐기물이 되어 자연을 더럽히고 파괴한다.

그런 쓰레기 하치장에서 살아가는 데이브 역시 도시의 삶에서 밀려난 소외된 인물이다. 그의 과거가 어떠했든, 그는 도시에서 밀려나 변두리 쓰레기 하치장에서 20년 넘게 살아가고 있다. 도시에는 노숙자도 많은데, 이들 노숙자와 데이브의 처지는 다를 게 없다. 직장도 없고, 가족도 없으며, 삶의 근거가 사라진 노숙자나 데이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인간’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진 쓰레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밀려나 쓰레기 하치장에서 사는 데이브나 같은 처지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과 생존에서 탈락한 낙오자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자본주의의 탐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오토’는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괴물이다. 그는 어마어마한 탐욕을 지녔으며,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이것은 정확히 자본주의의 속성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돈이 되면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며, 필요한 수요 이상으로 과잉생산해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현대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오토’는 자본주의의 화신이며, 쓰레기로 버린 자본주의 폐기물이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시에서 나온 조사관은 쓰레기 하치장 주변으로 콘도미니엄이 들어설 거라고 말한다. 즉, 도시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부동산 투자가 확대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정도라면 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더 많은 소비가 일어나 쓰레기는 더 많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쓰레기 하치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도시에서 더 먼곳에 더 큰 쓰레기 하치장을 만들려는 것이 시의 정책이고, 시의 조사관은 이런 목적을 갖고 데이브를 찾아온 것이다.

쓰레기의 반격-‘오토’의 공격-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탐욕의 결과는 부메랑이 되어 자본주의 사회를 공격할 것이고, 지금 세계가 앓고 있는 쓰레기 대란, 바다에 섬을 이룬 쓰레기 섬, 폐기하지 못하고 쌓이는 쓰레기 산 등의 현상이 이 작품의 살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늑대 인간

'늑대인간이 우리와 함께 산다면'의 '군대' 버전. 늑대인간의 존재는 고대 이후 서양의 전설 또는 신화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보름달이 뜨면 늑대인간으로 변한다는 농담을 할만큼 늑대인간의 존재는 서양에서 친숙하다.

서양에서 보름달은 불길한 징조로 여긴다. 무덤에서 시체들이 일어나고, 악령이 깨어나며, 마녀들이 숲속에 모여 어린아이를 매달아 주술을 외고, 드라큘라가 창문을 열고 들어오며, 늑대인간이 깨어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늑대인간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생활한다면 어떨까. 하지만 이 작품에서 미군으로 복무하는 늑대인간은 '인간' 미군병사와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개새끼', '늑대', '짐승'이라고 멸시당하고,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밥도 먹지 않을 만큼 차별당하는 존재다.

하지만 늑대인간은 총에 맞아도 회복이 빠르고, 인간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감각기관-시력, 후각-과 체력 등 모든 면에서 '인간'을 능가한다. 이들 늑대인간은 가장 위험한 임무에서 가장 앞장서고, 인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해결하지만, 이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군부대에 배속된 두 명의 늑대인간 병사는 '인간' 병사들의 차별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지내는데, 한 명이 전진캠프로 나갔다가 병사 모두가 살해당한다. 미군병사를 죽인 적은 놀랍게도 늑대인간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늑대인간이 없는 줄 알았으나, 죽은 병사들의 몸에 남아 있는 적의 체취를 맡은 미군 늑대인간은 마을을 돌며 늑대인간이 누구인지 찾는다.

그날 밤, 미군기지를 몰래 빠져나와 아프가니스탄 늑대인간을 찾아 전우의 복수를 하려는 그 앞에, 두 명의 아프가니스탄 늑대인간이 나타난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에서 늑대인간으로 변신하고, 잔혹한 격투를 벌인다. 두 명의 늑대인간을 상대로 싸워 이겼지만 만신창이가 된 미군 늑대인간은 아침에 기지로 돌아오고, 그를 비난하는 상관에게 군번줄을 던진 다음, 죽은 동료의 시신을 안고 기지 밖으로 사라진다.

늑대인간은 신화적 존재지만, 늑대인간 대신 '흑인노예'를 대입하면, 이 서사는 전혀 다르지 않다. 늑대인간은 메타포일 뿐, 어쩌면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노예는 같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인간 이하의 존재, 짐승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늑대인간이 소수의 존재로 다수 '인간'에게 차별당하고, 노예로 부려지는 사회라고 할 때, 고대 로마의 스파르타쿠스처럼 노예들의 봉기가 일어날 것이고, 인간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진 이들 늑대인간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인간은 이길 수는 있어도 피해는 상상보다 클 것이다.

차별은 이질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는 남녀의 성이 다른 것을 시작으로 인종의 다름(게르만 우월주의), 피부색의 다름(흑인 노예), 빈부의 격차 등 여러 이유를 들어 차별을 시도했고, 지금도 이런 차별은 분쟁과 폭력을 만들고 있다.

생각(이념)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같은 민족 구성원을 학살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살해하는 것이 지금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작품에서도 같은 늑대인간이지만 미군에 속해 있던 늑대인간과 아프가니스탄인으로 살아가는 늑대인간은 서로 적대 관계에 놓여 있고, 같은 종족임에도 서로를 죽인다. 소수 인종인 늑대인간이 서로 힘을 합해도 모자랄 상황인데, 이들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같은 종족을 죽이는 걸까. 이념과 종교가 다르다고 같은 민족구성원을 살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다.

결국 미군 늑대인간은 동족의 시신을 안고 미군기지를 떠난다. 이제 더 이상 미군의 이익을 위해 동족을 죽이거나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제 소수 인종인 늑대인간(또는 소수인종)은 미군의 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힘이 강한 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보복당하는 것이 '힘의 논리'이고, 미군의 이란, 이라크 침공이 그런 '힘의 논리'에 의해 벌어진 전쟁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구원의 손

우주정거장 수리를 위해 우주선을 타고 도킹한 알렉스는 혼자 일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예전에는 둘이 하던 작업이지만 인건비를 줄이려는 회사의 방침으로 혼자 우주선 밖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다. 우주선 밖에서 혼자 수리 작업을 하던 알렉스는 인공위성 정지궤도를 따라 돌고 있던 작은 나사조각에 우주복이 파괴되고, 우주선에서 떨어져 우주공간을 떠돌게 된다.

구조대가 도착하는 시간은 약 58분, 알렉스의 우주복에 남아 있는 산소는 14분 정도. 꼼짝 없이 우주공간에서 죽게 될 처지에 놓여 있는 알렉스는 산소가 2분 정도 남아 있을 때, 스스로를 구할 방법을 떠올린다. 우주복의 일부-팔 부분-를 던져 그 반동으로 우주선에 도달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진공 상태에서 운동량 보존법칙 - 작용-반작용 법칙 - 은 뉴턴의 제3법칙에 의해 두 힘의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가 된다. 

우주복에서 팔 부분을 해체한 다음, 등쪽으로 우주선이 놓일 때를 기다렸다가 힘껏 우주복 일부를 던지면 그 반동으로 몸이 우주선을 향해 움직인다. 이때 뒤로 움직이는 속도는 우주복을 던질 때의 속도와 같다. 하지만 알렉스는 우주선을 잡지 못하고 다시 튕겨 나온다. 이대로 죽게 될까. 알렉스는 우주공간에 노출된 맨 팔을 본다. 팔은 이미 얼어붙었고, 살아 돌아간다 해도 팔은 동상으로 절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주의 온도는 해가 있을 때는 섭씨 120도, 해가 없을 때는 영하 120도까지 내려가고, 우주의 절대온도는 영하270도에 이른다. 어차피 팔을 잃게 되는 건 확실한 사실이라면, 알렉스는 그 팔을 잘라 다시 던져보기로 한다. 그렇게 뻣뻣하게 얼어붙은 팔을 뜯어내 다시 시도한다.

알렉스는 한쪽 팔을 잃고 살아서 지구로 귀환하지만, 우주인의 역할이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3D 직종의 업무라는 것이 드러났고, 알렉스는 산재처리를 하고, 팔은 로봇팔로 대체될 것이다. 알렉스를 고용한 기업은 이윤을 더 많이 내기 위해 노동자의 숫자를 줄이고,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에게 떠안기는 잔인함을 보였다.

우주 시대가 열려도 우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자일 뿐이다. '독수리 자리 너머'에서도 톰과 일행은 회사에서 부여한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데이터 오류로 엉뚱한 곳에 떨어져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는 것처럼, 알렉스 역시 두 사람이 안전하게 일해야 하는 업무를 기업의 이윤추구 때문에 혼자 일해야 했고, 결국 사고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미래에서도 지금과 같은 경제체제 - 자본주의 - 가 계속된다면, 다수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뜻과 상관 없이 산업재해의 위험에 노출되고, 자본의 이익 때문에 억울하게 죽게 될 확률이 높다. 알렉스는 다행히 생존해서 지구로 돌아오지만, 우주인의 낭만을 말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비참하다.

 

해저의 밤

방문판매원인 두 사람은 아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출발해 사막을 건너가고 있었다. 선배는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국도를 선택한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자동차가 고장났고, 두 사람은 사막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른 새벽, 덥지 않을 때 길을 걸어 다시 피닉스 쪽으로 돌아가자고 결정한다.

사막은 고요하고,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도로를 따라 전신주가 길게 이어지고 있지만, 자동차는 하루에 한 대도 다니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두 사람은 더디게 가는 시간 속에서 무료하고 지루함을 느낀다. 석양도 사라지고 땅거미가 질 무렵, 선배는, 이곳에 오래 전에는 바다였을 거라고 말한다. 만약 물고기의 유령이 있다면, 바다였던 이곳에도 나타나지 않을까.

사막에 해가 지고, 짙은 어둠 속에서 별이 마치 쏟아질 듯 촘촘하고 선명하게 밤하늘에서 반짝거리는 한밤중, 차안에서 잠을 자던 선배는 밝은 빛에 잠이 깬다. 그가 본 것은 심해어처럼 빛을 내는 물고기들이었고, 물고기와 해파리, 문어 등이 사막 위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꿈을 꾸는 것일까. 

선배는 잠자는 후배를 깨운다. 바다에는 가 본 적이 없다는 청년은 화려한 물고기의 유영을 보며 감탄한다. 그들이 낮에 말한 물고기 유령이라는 걸 알았고, 물고기 유령은 두 사람의 몸을 뚫고 지나가지만 마치 투명한 물체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청년은 물고기 유령의 유영을 보면서, 자신도 물고기처럼 유영하고 싶어한다. 옷을 벗어던지며, 물고기 유령을 따라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청년을 보며 선배는 돌아오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청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청년이 옷을 벗고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 땅에 발을 딛고 있던 선배와 청년의 운명은 이미 갈라졌던 것일까.

애타게 청년을 부르는 선배의 뒤쪽에서 거대한 메갈로돈이 다가온다. 고대 상어인 메갈로돈은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무서운 육식동물이고, 공중에서 유영하고 있는 청년을 향해 서서히 다가간다. 그리고 청년을 물어뜯는다. 청년의 몸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하얀 달을 가리며 서서히 번져나간다. 물고기 유령들이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새벽빛이 보일 때, 선배 혼자 자동차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꿈이었다면 청년은 있어야 한다. 아니, 아직 뒷좌석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선배가 본 환영은 꿈과 환상이 뒤섞인 장면일 것이고, 그가 지금 놓여 있는 곤란한 상황이 이런 환상으로 나타난 것일 수 있다.

나이 든 선배는 이제 방문판매원의 시대도 저물어 간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방문판매원' 즉 세일즈맨은 한때 돈을 잘 버는 직업이기도 했다. 미국이 한창 경제가 활황이고, 소비가 빠르게 늘어나던 1950년대, 2차 세계전쟁에서 미국은 승전국이 되었고, 미국산업은 전쟁 특수로 활황이었다. 컬러텔레비전이 나왔고, 냉장고가 보급되었으며, 자동차는 필수품이 되었다. 세일즈맨들은 전국을 다니며 온갖 물건을 팔았다.

방문판매원은 학력, 경력에 상관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직업이었으니 바꿔말하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방문판매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두 사람 역시 서로에게 이름도 부르지 않고, 개인적 친근함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일 때문에 함께 움직이는 것이고, 두 사람은 사회에서 거의 밑바닥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한때 바다였던 이곳에서 물고기의 유령을 보는 것은, 삭막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간절한 마음 때문으로 보인다. 힘들고 외로운 도시에서의 떠돌이 삶은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고, 앞으로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 삶에서 비현실적 환상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 이들은 다시 해가 뜨면 어디론가 떠나야 할 존재들이고, 그들 앞에 놓인 삶은 사막처럼 건조할 뿐이다.

 

행운의 13

2080년, 미군은 첨단 전투장비를 갖추고 적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공군 중위 콜비는 새롭게 전투기 조종사로 투입되면서, 신참 조종사가 가장 낡은 비행기를 받는다는 원칙에 따라 다른 조종사들이 외면하는 '13호'를 조종하게 된다. 이 전투기는 멀쩡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병사들이 몰살당하는 비극이 있었던 비행기였다.

비행기는 비행기일 뿐이라는 콜비 중위의 말에 선임정비관은 비행기도 인격체처럼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낡은 비행기를 조종하면서도 임무를 완벽하게 이행하는 콜비 중위는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 '13호'에게 깊은 애착을 갖게 된다. 여러 번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병사를 모두 살려서 돌아온 덕에 '13호'에게는 '행운의 13호'라는 애칭이 붙는다.

서양에서 숫자 '13'은 불길한 징조로 알려졌다. 13은 소수이며, 1과 자기 자신 외에는 나눠지지 않는다. 12를 완벽한 수로 여기던 것과 달리 13은 기독교에서 불길한 숫자로 여기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로 알려진 '13'과 '행운'을 결합한 것은 역설적 발상이다.

여기에 사물에 감정을 부여해 서로 공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던 콜비 중위는 어느 순간부터 '13호'가 하나의 인격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건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조난된 척 놀랜드(톰 행크스)가 택배 상자에 들어 있던 배구공에 '윌슨(배구공 상표명이기도 하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치 인간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사물인격체는 인격을 부여하는 사람의 감정이 이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개인'의 심리는 공감과 소통, 사랑의 감정이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쓰는 볼펜 한 자루를 잃어버려도 서운한 마음이 든다. 볼펜은 값싸고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평범한 물건이지만, '내가 쓰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볼펜과 차별화된다. 이것은 쌩떽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가 돌보는 장미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고, 어린왕자가 여우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돌보고 길들여지는 것은 시간과 관심이 필요하고, 그만큼 관계는 깊어지고, 감정은 특별해진다.

콜비 중위는 미신을 믿지 않지만, 자기가 조종하는 '행운의 13'호가 마치 감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행운의 13호'에게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고, 격려의 말이나, 칭찬하는 말을 하며, 비행기에 탑승할 때는 반드시 의식처럼 '13호'의 표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이런 행위는 일종의 가벼운 편집증으로 볼 수 있다. 지나치게 깔끔한 사람, 청소를 자주하고, 정리정돈을 완벽하게 하는 사람, 냉장고의 물건을 일렬로 정확하게 정리하는 사람, 문턱을 밟지 않거나, 선을 밟지 않는 사람, 특정한 숫자에 민감한 사람 등 가벼운 편집증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런 것처럼 콜비 중위가 '13호'에게 보이는 태도는 가벼운 편집증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믿기 위한 행동이다. 자기 내면의 불안을 특정한 행동, 행위를 통해 해소하는 것이다.

'행운의 13호' 운명도 전투 가운데 갑자기 결정되었다. 적의 포탄에 맞아 추락한 '13호'는 몰려오는 적에게 기체를 내줄 수 없다는 콜비 중위의 결심으로, 전투기의 자폭 버튼을 누르고 탈출한다. 적들이 더 몰려오고, '13호'를 둘러싸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분명 자폭할 시간에 터지지 않자, 콜비 중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적은 '13호' 주위와 기체 위까지 올라가서 아군을 공격하는데, 그때 콜비 중위는 '13호'가 폭발할 거라는 느낌을 받는다. '13호'는 자폭을 지연하면서 적이 주위에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폭발한 것이다. 이 약간의 지연이 우연한 것인지, '13호'가 스스로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콜비 중위는 '13호'가 그런 의지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아마 많은 사람이 집에 있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자동차에게 말을 걸거나, 격려, 칭찬을 해 본 경험이 있으리라. 가족이 타는 자동차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보다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심지어 새차를 구입하면 고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인간이 사물에 감정을 투사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지마 블루

예술가 지마는 세계적 작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를 인터뷰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클레어 기자에게 인터뷰를 하겠다고 연락이 온다. 바다 한 가운데, 거대한 성 같은 지마의 저택에서 만난 두 사람은 지마의 새로운 작품 - 수영장 -을 보며 자연스럽게 지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클레어는 지마의 새로운 작품이 평범한 수영장인 것에 의문을 갖지만, 내일 작품 발표 때 알게 될 거라고만 말한다.

사람들은 지마가 '인간'인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로봇이었으며, 그것도 최초의 모습은 수영장 청소를 하는 청소로봇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청소로봇 주인은 실용 로봇공학에 관심이 많았고, 집안에 여러 대의 로봇을 가지고 있었지만, 특히 수영장 청소 로봇을 좋아해서 기계를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타일을 닦는 기능이었지만, 색을 인지하는 센서를 설치하고, 기본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수영장 청소를 스스로 결정해서 작업할 수 있도록 만든다. 계속 업그레이드를 해서 청소로봇은 사람의 형태를 갖게 되고, 시간이 흘러 '인간' 주인이 죽고, 새로운 인간 주인으로 여러 번 바뀌면서 기계는 계속 업그레이드를 하면서 수영장 청소에서 벗어나 집안일 모두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언제부턴가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피부를 갖게 되었고, 사람들은 지마가 처음부터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마는 초상화가로 돈을 벌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몸 전체를 개조하는 수술을 받는다. 이런 개조는 불법이었지만, 돈을 받고 불법 개조를 해주는 사람 또는 외계인이 있기에 지마는 우주에서도 맨몸으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생명체가 된다.

지마는 자기가 기억하는 최초의 모습은 수영장 청소 로봇이라고 말하고, 그가 살아오면서 바뀐 모습과 그가 알게 된 모든 지식의 결과를 내일 새로운 작품으로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다음 날, 많은 사람이 지마의 새 작품 발표회에 모인다. 지마는 수영장 앞에 서서 옷을 벗고 나신이 된다. 위대한 예술가 지마는 수영장으로 뛰어들고, 천천히 자기 몸을 스스로 분해하기 시작한다. 그는 고등한 두뇌를 닫고, 육체를 분리해 자신의 처음 모습이었던 수영장 청소로봇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수백년을 살아오면서 배우고 깨달은 결론이었다.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화두는 불교에서 나온 말이지만,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에서도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인간이나 로봇도 자신의 최초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며, 불가능할 경우도 많다.

지마는 완벽한 상태-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에 도달하자 스스로 현재의 모습을 버리고 '최초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 능력을 버리고 오히려 가장 단순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교적 화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당시 왕자였으며, 아내와 자식을 둔 최고 권력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빈몸으로 수행을 시작한다. 권력, 부, 명예보다 중요한 삶의 의미는 생로병사에서 벗어나 온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 그래서 번뇌에서 해방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다시는 업보에 들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 평화로움에 도달하는 상태를 맞이하는 것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평범한 인간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에 이르렀고 열반에 들었으니 다른 사람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석가모니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은 걸로 보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지마가 자신의 몸과 정신을 버리고 가장 단순한 형태로 돌아가는 것은 그가 예술가로서 우주를 대상으로 거대한 작품을 만들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 우주는 무한하고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의 무한함은 세포 하나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즉 매우 작은 세포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 있고, 양자 활동은 우주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니, 우주가 크기만 하다는 생각에서 점차 만물의 이치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지마의 새로운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은 스스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 수영장 청소 로봇이 되는 거였다. 지능이 없는 단순한 상태로 돌아간 지마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인간에 의해 수영장 청소 로봇이 개조되고,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세상은 반복되고, 인간의 과학기술은 단순한 청소로봇을 안드로이드로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로봇도 지성을 갖춘 존재로 진화하고, 깨달음을 얻어 최초의 모습으로 돌아갈 정도로 수준 높은 철학적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인류와 로봇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 사회에서도 '본질'에 관한 고민은 계속되리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사각지대

로봇 액션물. 다섯 명의 사이보그가 트럭을 습격해 마이크로칩을 탈취하는 내용이다. 한밤중, 별이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드넓은 사막을 달리는 트럭이 있고, 그 뒤로 네 명의 사이보그가 트럭을 향해 질주한다. 트럭 안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있지만, 사이보그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이들은 병사를 모두 죽이고, 연결되어 있던 트럭 화물칸을 폭탄으로 분리한다.

터널 안에서 트럭에 실린 마이크로칩을 탈취할 계획이었지만, 예상에 없던 거대한 로봇이 나타나면서 사이보그와 로봇의 대결이 시작된다. 거대 로봇은 차례로 사이보그를 박살내고, 혼자 남은 사이보그 마져 곧 박살날 위기에 몰렸을 때, 머리가 잘린 사이보그가 거대 로봇의 두뇌인 CPU를 부수면서 거대 로봇이 파괴된다.

세 명의 사이보그가 박살났지만, 이들의 뇌를 미리 백업해 두었기에, 육체는 사라져도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화려하고 과장된 액션이 작품의 핵심이지만,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뇌를 백업해서 이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뇌를 백업할 수 있다는 의미는, 뇌가 저장하고 있는 정보를 데이터로 가공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뇌에 기록되어 있는 정보는 컴퓨터의 이진수와 같은 방식인 0과 1처럼 디지털 코드로 전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뇌와 컴퓨터 서버 사이에 뇌의 정보를 읽은 다음, 컴퓨터가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드는 디코딩 과정을 거쳐 서버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렇게 저장된 뇌의 정보는 가공, 편집, 삭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 데이터와 똑같다.

인간의 뇌에 인위적으로 다른 정보를 주입할 수 있다는 설정은 이미 '공각기동대'를 비롯해 다른 영화나 소설 등에서도 소재로 쓰이지만, 정보를 조작, 가공하는 것은 컴퓨터가 아니어도 가능하다. 단지 컴퓨터로 옮긴 뇌 정보는 악의적 해킹에 의해 조작, 가공, 삭제, 편집 등의 과정을 거쳐 나쁘게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뇌 정보를 어떤 논리든 접근하는 것 자체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은하철도999'에서도 철이는 몸을 로봇으로 개조해 영원히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철이의 동행인 메틸부터 그런 사이보그다. 뇌 정보는 즉 '의식'이고 '의식'은 지금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화 되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의식'은 모든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개인'은 곧 개별화된 '의식'이며, 이 '개별성'이 인간을 구분하는 핵심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의식'을 디지털화 하고, 가공, 편집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의식'은 '개별성'을 잃게 되고, '보편화'한다. '의식의 보편화'는 곧 '몰개성', '몰개인'화 하는 걸 전제하며, '개인의 의식'이 서버에 저장되기 시작하면, 인간의 고유성은 사라지게 된다. 즉, 인간은 '의식'을 통해 학습하고 발전하며, 경험을 축적하고 지혜를 배워나가는 존재인데, 개인의 '의식'이 빅데이터에 포함되기 시작하면 인간의 존재 의의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가 나타나면, '인간'의 범주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지 생물학적 고찰도 필요하고, 윤리적 측면과 철학적 문제까지 두루 고심해야 할 내용이다. '의식'만 있는 상태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her'에서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어서 주인공이 인공지능을 사랑하게 되는 내용이다. 인간의 감정도 '의식'의 일부분이므로 '의식'과 '감정'을 담은 안드로이드, 인공지능을 인간의 범주로 설정할까를 고민하게 되면 인간의 실체가 어디까지인가를 규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된다.

'반다이 비주얼'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OBSOLETE'에는 외계인이 석회암 1톤과 맞바꾸는 기계 '엑소프레임'이 나오는데, 사람이 좌석에 앉으면 '의식'을 읽어서 자동으로 작동한다. 인간이 이 허름한 기계를 재현하려 했지만 실패하는 걸로 보아 매우 고도의 과학문명이 만든 기계로 보인다. '엑소프레임'은 합금으로 만든 기계지만, 중추신경은 도마뱀 종류의 신경계를 쓰고 있다는 걸로 보아,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조종석에 앉는 인간의 의식이 '엑소프레임'과 연결되면, 외계인이 인간의 의식을 해킹할 수 있을 거라는 염려도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의식'은 외계인이 만든 기계와 연결되거나 외계인으로까지 확장되는데, 창작물에서 나타나는 이런 광범한 '의식'의 규정을 현실에서는 어떻게 규정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해야 할 과제다.

 

아이스 에이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한 롭과 게일은 집안 정리를 하다 전 주인이 남기고 간 오래된 냉장고를 들여다 본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는데, 그 얼음 속에 창을 맞고 죽은 맘모스가 있었고, 냉동실 얼음을 치우니 그 안에 문명이 성장하고 있었다.

냉동실 속 문명은 매우 빠르게 성장해서 단 10분만에 중세에서 현대까지 발달하고, 곧이어 핵폭탄이 터져 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두 멸망하는가 싶더니, 이들이 냉장고 문을 닫고 피자를 시켜 먹는 1시간 사이, 초과학문명을 이룬다. 초고도문명은 빛을 발산하며 사라지고, 냉동실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롭은 냉장고의 전기코드를 뽑고, 내일 내다버리자고 말하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냉동실 문을 열어 본 두 사람은 깜짝 놀란다. 냉동실 안에서는 공룡과 유인원이 서로 먹고 먹히는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작품으로 '오츠스튜디오'의 'GOD' 시리즈가 있는데, 인간이 아주 작은 인간들을 유인원 때부터 지켜보며,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내용이다. 영화 '다운사이징'도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을 아주 작게 만드는 이야기다.

'작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중세 유럽에서 널리 퍼졌던 내용이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을 통해 '소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에도 호문쿨루스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고대 의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남성의 정자 속에 아주 작은 사람이 들어 있다고 믿었으며 연금술사들은 정자와 다른 재료를 섞어 말똥 속에서 60일 정도 숙성하면 아주 작은 인간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이 작품처럼 작은 인간과 그 인간들이 만드는 문명을 지켜보는 인간의 심리는 전지전능한 '신'을 믿는 심리와 같다. 즉, 우리 인간이 보이지 않는 절대적 힘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어떤 대상에게 절대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욕망을 투사해서 만든 존재가 바로 초미니 인간인 것이다.

인간이 믿는 '신'의 존재도 알고보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기독교에서는 신의 모습을 본따 인간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신의 형상이 지금 인간의 모습과 같다는 것인데, 이는 명백히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 비과학적 주장이다. 따라서 고대의 인류는 인간의 형상을 본따 신을 창조한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을 닮은 아주 작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신을 만든 것과 같은 심리적 기제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만든 작은 인간을 바라보며 인간은 우월감과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초미니 인간들은 아주 빠른 시간에 공룡이 뛰놀던 시대부터 초문명시대까지 최소 3억년의 시간을 단 몇 시간만에 만들어낸다. 이 과정을 두 명의 평범한 인간이 바라보는 것은, 긴 역사를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한 삶이 호기심과 욕망의 투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역사

가상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앱을 소개하는 영상처럼 만든 작품. 역사에 가상, 가정은 성립하지 않지만, 오락용으로 만들어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예를 들었고, 모두 6개의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190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미술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작하며, 미술학교 계단에서 싸움을 벌이다 맞아죽는 경우, 1차 세계전쟁은 같은 날짜에 발발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늦게 생기면서 1948년에 2차 세계전쟁이 발발하고, 1952년에 베를린에 핵폭탄이 터진다. 두번째, 미술학교 앞에서 마차에 치어죽는 경우, 빈에서 강력한 마차 규제법이 생기면서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고, 오스트리아는 자동차 강국이 된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1차 세계전쟁은 독일이 승리하고, 세계 대공황도 없으며, 1958년에 빌리 브란트가 달에 첫발을 디딘다. 세번째, 러시아 귀족이 개발해 무작위로 쏜 젤라딘 덩어리에 갇혀 죽는 경우, 러시아 혁명은 실패하고, 1차 세계전쟁도 러시아의 승리로 1915년에 끝난다. 러시아는 세계초강대국이 되며, 1988년에 블라디미르 푸틴이 달에 착륙한다. 네번째, 오스트리아 매춘부 네 명과 난교를 벌이다 복상사. 이 매춘부들은 섹시 평행우주에서 온 여행자들이고, 1969년에 여성이 달에 착륙. 다섯번째, 운석에 깔려 사망.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인류는 멸종하고 다른 생명체도 93%가 멸종. 쥐가 살아남아 진화하지만 결국 전쟁으로 멸종. 바다에서 오징어가 진화해 2,973,412년 뒤에 오징어 우주인이 달에 착륙. 여섯번째, 미래에서 온 나찌친위대와 반나찌 부대가 싸우게 되고, 미래에서 온 히틀러가 현재의 어린 히틀러를 구하게 되는데, 미래의 히틀러와 현재의 히틀러가 서로 손가락을 맞대는 순간 시공간이 붕괴하면서 우주 전체가 붕괴하며 종말을 맞는다.

이 시나리오보다 가장 간단한 사례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국립미술아카데미에 합격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실제 화가가 되고 싶었고, 그림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미술학교에 입학하려고 시험을 치렀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미술학교에 입학했다면 그가 1차 세계전쟁에 지원병으로 복무하지 않았을 것이고, 군대에서 자신의 좌절한 욕망을 이루는 계기를 발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역사를 풍자하고, 히틀러를 조롱하면서 가볍게 웃자고 만든 작품이지만, 2차 세계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와 나찌의 만행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가벼운 농담은 오히려 역사의 본질을 희석하거나 왜곡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대체역사, 가상역사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숨겨진 전쟁

1941년, 독일군이 쏘련을 침공했다. 독일군은 동쪽으로 폴란드, 체코, 헝가리를 침공하고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쏘련을 기습한다. 시기는 2차 세계전쟁 가운데 있었지만, 독일-쏘련 전쟁은 그 자체로 국가간 단일 전쟁으로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전면적이었으며, 이 전쟁만으로 소련은 3천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독일도 5백만 명이 사망했다.

이 전쟁의 특수성은, 독일군이 쏘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면서 쏘련군이 아닌 민간인을 무수히 학살하고,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반인륜적 폭력을 저질렀다는 데 있다. 민간인 사망자만 2천만 명에 이를 정도로, 독일군은 쏘련을 점령의 대상이 아닌, 파괴와 절멸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아주 잠깐, 중요한 단서가 나온다. 구울을 섬멸하는 작전에 투입된 군인이 너무 적고, 지원군이 오지 못하는 이유를 지휘자인 중위가 말할 때, '공군은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독일군 때문에 바쁘'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 한 문장만으로 이 작품의 배경이 1942년에서 1943년 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중위는 작전 도중 발견한 쏘련군 비밀정보기관인 체카 조직원의 몸에서 수첩을 발견한다. 죽은 사람은 보리스 그리신 소령으로, 하데스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이 작전은 소작농들 사이에 떠도는 불가사의한 미신을 밝히는 작전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귀족과 자본가들이 구성한 백군이 소비에트 군대(붉은 군대)를 공격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붉은 군대는 백군을 무찌르고, 체카에 소속된 보리스 그리신은 이 임무를 맡게 된다. 그가 비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랴크족 사이에서 전해오는 흑마술을 써서 땅속에서 잠자던 구울을 불러내 붉은 군대를 위해 싸우도록 한다는 것이 비밀작전이었다.

보리스 그리신은 흑마술을 써서 구울을 불러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구울들은 보리스 그리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땅속에서 올라온 구울들은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고, 시베리아 숲속에 거대한 군집을 이루기 시작했다.

중위를 포함한 소수 부대가 시베리아 숲속을 뒤지며 구울을 찾아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당시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구울의 존재가 외부에 드러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물론 스탈린을 비롯한 최상부의 명령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중위 역시 구울의 존재를 상부에 보고하는 순간, 자신을 포함해 모든 병사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오로지 구울의 집단 서식지를 찾아 섬멸하는 것이 임무였다. 시베리아에 드물게 있는 촌락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구울의 습격으로 모두 죽는다. 구울 집단이 계속 커지고 있었고,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면서, 쏘련 지도부는 서쪽, 당장 코앞에 닥친 독일군의 공격도 심각한 상황이지만, 동쪽의 괴물(구울)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도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독일군과의 전투는 쏘련 민중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애국심을 고취해 독일군을 무찌르는데 도움이 되지만, 괴물의 존재가 알려지면 쏘련 민중은 두려움에 떨고, 미신을 더 믿게 되며, 쏘련 정부를 믿지 않게 될 우려가 있으므로, 쏘련 당국으로서는 독일군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구울의 존재였다.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는 시베리아 숲속에서 간헐적으로 구울을 만나 섬멸하면서 전진하다, 그동안 본 적이 없는 대규모 구울 서식지를 발견한다. 중위는 폭탄을 다루는 병사를 보내 동굴 안에 폭약을 설치하고, 동굴 입구만 봉쇄하려 했지만, 폭발로 동굴이 무너지면서 산의 일부가 무너져 구울의 근거지가 훤하게 드러난다.

이대로 후퇴하면 쫓아오는 구울에게 몰살당할 것이 뻔하므로, 중위는 진지를 구축하고, 어린 병사 - 중위의 아들이었다 - 를 후방으로 보내 공군폭격기를 요청한다.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는 구울과 싸우기도 하지만, 폭격기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었다.

중위와 병사들은 영웅적으로 싸우자 전멸한다. 이들이 구울과 싸우는 장면은 처절하지만 인간의 숭고함을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준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구울은 '독일군'의 메타포다. 쏘련군은 절대 열세 속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우는데, 구울과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쏘련군이 다수의 구울(독일군)과 싸우면서도 흔들림 없이 당당하고 영웅적인 투쟁으로 구울(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내고 있다.

독쏘 전쟁에서 쏘련(러시아) 민중은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어머니 러시아'를 사수해야 한다는 하나의 구호를 외쳤다. 조국수호전쟁은 애국심에 바탕하며, 애국심은 하나의 국가, 민족의 단결과 동질감을 구축하는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감정이다.

구울과 싸우는 쏘련군 역시 자신의 목숨보다 조국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구울로 인해 민간인들이 수없이 죽어간 것을 잘 알고 있고, 어떻게든 구울을 섬멸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자신들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구울과 싸우는 장면은 개인의 이기심이 사라진, 진한 동료애와 조국을 사랑하는 진심이 느껴지는 명장면이다.

이들이 모두 전사하고, 구울들이 이들의 시신을 뜯어먹고 있을 때, 하늘에서 고요히 날아오는 폭격기 편대의 웅장한 장면과 저 멀리 산꼭대기부터 터지기 시작하는 융단 폭격 장면 그리고 그 위에 실리는 발랄라이카의 슬픈 음악 소리는 이 작품이 '러브, 데쓰 + 로봇' 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작품은 오컬트, 2차 세계전쟁, 흑마술, 러시아혁명 등을 곳곳에 집어 넣은 오컬트 밀리터리 액션 작품으로, '무적의 소니', '독수리자리 너머'와 같은 실사그래픽 작품이다. 실제 일어난 역사는 아니지만, 실제 역사와 가상의 이야기를 버무린 '팩션'으로, 작품의 소재와 구성이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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