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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소설을 읽다

위대한 개츠비 - 열린책들

by 똥이아빠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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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 열린책들

 

최근 페이스북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을 놓고 무수히 많은 주장과 반론들이 오갔다. 어떤 출판사(의 대표)가 예전부터 카뮈의 '이방인', '쌩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분란을 일으켰고, 이 책 '위대한 개츠비'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번역(과 번역자)를 부정하고, 자신(과 출판사)의 번역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과 편협함의 극치를 보이면서, 그것이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의심을 충분히 사고도 남을 만했다.

나는 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은 읽지도 않았고(돈이 아까워서) 읽을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이미 '이방인'에서부터 보여주었던 번역자의 태도와 번역의 품질에 대해 심각한 전문가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고, 나는 그들 전문가들의 의견에 공감했기 때문에 출판사 쪽의 언론플레이가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도 많은 분들이 그 출판사의 대표가 번역하는 내용을 두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번역의 중요성과 심각함을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이들의 선의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듯했다. 이런 논쟁을 지켜보면서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볼 생각을 했고, 내가 구독하고 있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

'위대한 개츠비'가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이고, 지금도 미국의 많은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미국문학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 소설은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미국의 문학계와 언론에서도 혹평 일색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소설이 새로운 가치로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소설이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개츠비'는 냉정하게 말하면 '삼류 애정소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우아하게 포장한다 해도, 그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개츠비라는 한 사내가 한 여자를 만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다시 그 여자에게 일편단심으로 다가가다 비극적으로 죽는다는 내용인데, 소설적 개연성도 떨어지고, 이야기의 구조도 상투적이다.

이 소설의 평론이나 영어의 문장, 시대를 묘사하는 깊이는 번역본으로 읽는 한계 때문에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이 소설의 본질만을 놓고 본다면, 이 소설이 '세계문학'에 속할 정도로 수준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들의 이야기다.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다 알다시피 독점과 과점을 통해 급격하게 부를 축적했으며, 이 소설의 무대였던 1920년대 미국 노동자의 삶과 비교하면, 1달러로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이 있는가하면, 시거를 100달러짜리에 말아피우는 부르주아들이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이 소설의 작가는 '개츠비'라는 인물의 비극적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정작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가장 큰 사회적 현상인 미국 민중 특히 미국 노동자의 삶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재투성이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여지긴 하지만 그건 그저 스쳐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다.

위대한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근본적인 긴장 관계이며, 부르주아의 사치와 허영을 한꺼풀 벗기면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에서처럼 빈민굴에서 살며 쓰레기장 같은 도축장에서 소와 돼지를 잡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난다.

하워드 진이 쓴 '미국민중사'를 모르는 한, 미국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허황된 구호에 매몰될 것이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런 소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당대의 미국 부르주아의 허영과 사치를 풍자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딱히 그런 장면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츠비'라는 남자가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과 그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이 전부다.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순정한 남자의 고통스러운 일대기'일 수도 있고, 썩어빠진 부르주아의 한심한 돈지랄이자 멍청한 사랑놀음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나는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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