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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만화를 읽다

괴물들

by 똥이아빠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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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괴물들

작가 : 박건웅

출판 : 보리

 

박건웅 작가의 신작이다. 그가 오랜 시간 그렸던 단편을 모았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작가들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경향이 높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데, 한국현대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한 과정을 겪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대개 70년대, 80년대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으며,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부패, 권력자의 오만과 폭력을 눈으로 보며 자랐다. 여기에 대학시절의 학생운동,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을 경험하면서 정치의식이 발달하고, 민주주의 학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작가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작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 직접 영향을 준다. 특히 그래픽노블이 갖는 장르적 특성은 작가의 자기 서사가 강하고 깊다는 데 있는데, 박건웅을 비롯해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한국현대사와 자기 서사를 일치하는 경향이 많다. 이건 퍽 우연이지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노블 작가는 강하고 깊은 자기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여준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것으로 보는데, 그래서 독자는 박건웅의 작품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문신'은 단편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통스럽다. 한 칸, 한 칸의 이미지가 마치 칼날처럼 몸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한 논문이 아닌, 그래픽노블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집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그린 것과,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면서 만든 작품을 모았다. 단편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 일관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자가 돌아왔다

보름달이 뜨던 날 오래전에 죽었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죽은 사람들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놀라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게 자기 피를 주고 달콤한 빵을 얻어먹다 보니, 점차 피가 모자라게 된다. 

죽은 자는 썩어서 흙이 되어야 하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으로 이미 역사의 퇴행을 의미한다.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마시고 생기를 찾을 때, 산 자들은 과거의 역사, 과거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죽은 자가 내미는 빵은 과거의 유산이다. 빵을 먹는 것은, 미래로 나가지 못하는, 미래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퇴행의 의지를 드러낸다. 과거의 유산이 달콤할수록 불투명한 미래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죽은 자들이 살아오고, 죽은 자가 마을의 대표가 되고,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이 공급하는 달콤한 빵에 만족할 때, 마을은 쇠퇴하고 사람들은 유령처럼 변한다.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죽은 자들이 마을을 점령한다. 죽은 자와 타협하는 것은 곧 과거로의 퇴행이자 소멸의 시작이라는 걸, 작가는 우화처럼 말한다. 전해 내려오는 모든 우화는 시대의 본질을 담고 있으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몫이며, 우화는 항상 새롭게 해석된다. 

 

사람들이 쌍굴다리 밑에서 모여 있다. 목이 마르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되는데 동굴 입구에 미군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굴에서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본다.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을 답사하고 그린 작품이다.

한 두 페이지를 넘겼을 때, 노근리 사건 이야기임을 알았다. 작가는 이미 '노근리 이야기'를 두 권으로 펴냈고, 이 단편은 노근리 학살 현장으로 답사를 다녀와서 그린 작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노근리 철길 아래는 여전히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고, 죽은 넋은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 살았어도, 죽었어도 끊임없이 고통을 느껴야 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들은 목이 마르고, 잘려나간 팔다리를 보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한다. 어둡고, 춥고, 고통스러운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 이들은 누군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 나타난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낯선 말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나타나고, 고통과 절망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는 그들은 군복을 입은 해골이다. 자신들을 죽인 그 미군들이 죽어서 해골이 되어 나타나 다시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들은 페인트를 가져와 벽을 지운다. 그들이 쏜 총알이 벽에 무수히 박혀 있는 자국을 감추려 했던 것처럼, 죽은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지우려 하는 것이다. 미군은 죽은 자들을 다시 죽이고, 그들이 남긴 흔적을 지우고, 역사에서도 지우려 한다.

 

바람이 불 때

1980년 봄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친구로 헤어진다. 그 뒤 한 사람은 버스에 탄 시민으로, 다른 한 사람은 버스에 총을 쏘는 군인으로 만난다. 5.18 광주에 투입됐던 어느 공수부대원의 증언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5.18 광주민중항쟁 시기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광주에 살던 청춘 남녀는 서로에게 마음이 있지만, 남자는 군에 입대한다. 공수부대에 배치된 남자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고, 부대원들이 광주 외곽을 지나가는 버스에 집단 난사를 해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 모두를 학살한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한다는 연인은 버스를 타보라는 남자의 말을 듣고, 남자를 면회가기 위해 멀미를 참으며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 그날, 그 버스에 남자의 연인이 타고 있었다. 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을까. 작가는 공수부대원의 증언으로 재구성했다. 연인들이 시민과 군인으로 만났다면, 그 군인은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고,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상관의 말을 믿었다면, 총을 쏜 군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모르고 저지른 학살이라도 학살자의 죄를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현대사사의 비극 가운데 가장 큰 비극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 국내에서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 많다. 그 군부의 상급자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시대에도 군인이었으며,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고, 국민을 학살했으며, 독립운동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학살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거인

캄캄한 굴 속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만났던 귀족과 거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 사람들은 거인이 모든 것을 다 해 줄 것이라는 귀족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고, 마을의 강은 점차 죽음의 강으로 변해 간다. 

소박하게 살아가던 마을 주민에게 귀족이 찾아온다. 귀족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본(가)이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많다. 귀족은 지배자일 수도 있고, 엘리트일 수도 있으며, 이명박일 수도 있다. 그것들이 순박한 마을 주민을 꼬드기고, 욕망을 부추킬 때, 사람들은 그 욕망을 좇는다. 어리석고 무지한 대중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 사기 치는 놈은 당연히 나쁘지만, 멍청하게 그 사기에 동조하고, 보이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 역시 사기꾼의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다.

민중이 언제나 옳거나 지혜롭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거의 대부분 어리석고 멍청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어리석은 민중은 조금씩 깨어났고, 지혜로워졌다. 욕망의 부추김에 수없이 속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무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이 데려온 거인은 탐욕과 욕망의 현현이다. 탐욕과 욕망은 추구할수록 커진다. 그것은 끝도 없이 자라며, 더 많은 것을 삼키고, 더 많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그 거인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에서 잠들어 있다. 언제든 어리석은 인간이 깨울 날을 기다리며.

 

거인과 소인

오래전부터 소인들은 거인에게 음식과 재물을 바치며 평생 살아왔다. 어느 날 더 바칠 것이 없어지자 거인은 소인들의 자식도 바치라고 요구한다. 결국 소인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거인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을 뽑아 새로운 왕국을 만들지만, 왕은 또다시 거인이 되어 나타난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존재는 스스로 작아진다. 거인과 소인은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존재다. 그것은 상대적이며,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거인은 권력자다. 아니, 권력자를 거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스스로 소인으로 만든다. 

권력의 유무에 따라 인간의 존재가 거인과 소인으로 나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걸 의미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을 준 것은 다수의 인민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과 '자기'를 일체화한다. 권력과 존재의 일체화는 개인을 권력의 화신으로 만든다. '개인'이 작아지지 않는 방법, 권력을 가진 자가 거인으로 보이지 않는 방법은 올바른 투표 뿐이라는 걸 작가는 우화로 말한다.

 

괴물들

아버지는 사막 너머에 괴물들이 살고 있으며 호시탐탐 마을을 위협하기 때문에 괴물들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괴물을 잡으러 사막 너머로 가, 괴물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그 자식을 인질로 데려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괴물을 잡으러 가자고 말한다. 괴물들은 작고 약했지만, 거대한 아버지는 그 괴물을 죽이고, 사로 잡아 마을로 데려온다. 그런데, 마을의 주민들과 잡아 온 괴물의 모습은 같다. 마을 주민들은 괴물을 잡아온 거인을 '나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나리가 잡아온 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배자는, 권력자는 자기가 다스리는 마을 사람과 똑같은 사람을 두고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때로 '빨갱이'이며, '종북'이며, '반미'이며, '친북'이며, '친중국'이며, '장애인'이며, '여성'이며, '페미니스트'이며, '성소수자'이며, '사회적 약자'들이다.

나리는 이런 소수자들을 '괴물'이라고 말하고, 이들을 혐오하도록 부추기고, 이들을 때려잡고, 이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정작, 평범한 사람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나리'는 눈이 하나인 진짜 '괴물'이다.

 

봄섬

태준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려운 집안 환경 속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는데 그 순간, 태준이는 어떻게 이 섬에 올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 이야기를 기록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2016)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지금도 진행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학생의 이야기는, 한국현대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과 맥이 닿아 있다. 제주4.3, 노근리, 광주5.18로 이어지는 학살의 주범은 늘 권력이었고, 동족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노근리는 외국군(미군)이 피난하는 민중을 학살한 사건이었지만, 그것 역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 탓이었으니, 이 땅의 민중은 늘 그렇게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존재였다.

세월호 참사는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그 모든 학살 사건의 정점이자, 마지막 사건이다. 이 사건을 만든 박근혜 정권의 뿌리는 저 멀리 일제강점기의 일본 관동군 소좌 박정희로 거슬러 올라가고,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조선일본군 박정희와 백선엽으로 시작해서, 해방 이후 조선의 민주주의자들을 암살하고, 때려잡던 일제 앞잡이 군인과 경찰로 이어지며,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망가뜨린 이승만을 거쳐 제주4.3에서 제주도 민중을 '어린아이도 모두 학살하라'고 명령한 이승만과 조병옥이를 비롯해 학살의 주범들이 권력을 쥐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좌우의 이념을 선택한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수없이 많은 민주주의 시민과 학생을 학살했다.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것은 필연이었다. 학살자를 아버지로 둔 박근혜는 대를 이어 권력을 잡았지만,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 허수아비였고, 최순실의 노리개가 되어 나라를 망가뜨렸다. 국민은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권력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해경은 학살 현장을 방조, 동조했다. 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진실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고, 학살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아파트

새로 지은 아파트 벽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주민들은 누가, 왜, 어떻게 시체로 발견되었는지보다 당장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걱정부터 하는데…. 그 비밀을 추적하던 9층 남자는 마침내 아파트의 비밀을 알게 된다.

아파트공화국에 대한 통렬한 풍자. 아파트를 세우는 사람들은 노동자다. 저임금에 강도 높은 노동으로 공사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사고로 죽는다. 이렇게 죽는 노동자들은 거푸집에 버려져 콘크리트와 함께 묻히고, 비싸고 화려한 아파트가 준공되어, 은행빚을 왕창 얻은 중산층은 아파트를 사면 곧바로 2배, 3배 아파트 값이 뛸 것을 기대한다.

아파트에 대한 욕망은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강렬하다. 아파트 벽에 사람의 시체가 드러나도 '예술작품'이라고 견강부회하며 오히려 아파트의 가치를 높인다고 말하는 목사의 말은, 아파트 가격이 지상 최고의 가치이자, 욕망의 절정이라는 걸 잘 드러낸다.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은 시체를 꺼내 국을 끓여 먹고, 살아 있는 사람도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른다.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사회는 인간의 윤리, 도덕, 염치, 사랑이 사라진 사회다. 오로지 돈, 물질, 가치, 욕망이 전부인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반 평범한 국민이 가지고 있는 자산의 70%가 아파트라고 하니, 아파트 가격의 오르내림은 이들에게 목줄을 쥐고 있는 것과 같다. 아파트 가격의 80%까지 은행에서 빚을 얻어 매입하고, 매달 이자를 내고 있으니, 아파트 가격이 내려가면 이들은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이들,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에 매달리도록 만든 것은 권력과 자본이다. 

인간의 이기와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사람의 생명보다 아파트 가격이 더 중요하도록 만들었다. 서로를 잡아 먹어야 살아남는 자본주의의 잔혹함은 주민들이 또 다른 주민을 잡아 먹는 장면으로 드러난다. '식인'은 단지 오래된 관습이 아니라,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을 통해서만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낸다.

 

천국과 지옥 1

죽은 자들은 천국의 문 앞에서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된다. 하나님을 믿고 십일조를 해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고, 돈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시간이 흘러 천국은 부패한 사람들로 가득해 살기 힘들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천국 사람들은 결국 지옥으로 향한다.

한국 개신교를 신랄하게 풍자한 내용. 천국과 지옥은 흑과 백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개신교의 맹점을 드러낸다. 세상이 오로지 천국과 지옥으로만 존재한다는 이 멍청하고 한심한 생각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만든다. 조 아무개를 닮은 천사는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갈 지, 지옥으로 갈 지 선별한다. 예수를 믿은 사람,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회개했다는 사람, 돈이 많아서 뇌물을 바치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가난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

천국은 범죄자들, 사기꾼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지옥은 가난한 사람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산다. 천국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나고, 서로를 죽이고, 악행이 벌어지면서 천국에 살던 사람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지옥으로 탈출한다. 차라리 지옥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국은 타락하고, 멸망한다. 그렇게 지옥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지옥이 너무 평화롭고,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옥은 화염이 불타고, 악마가 창과 칼로 사람들을 난도질 하는 것이었지만, 이 지옥은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락하고 멸망한 천국을 버리고 지옥으로 내려 온 조 아무개 천사는 지옥에 다시 거대한-천국을 찌를 만한-교회를 짓고 신도를 모으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교회에 관심이 없다. 교회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지옥은 평화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진짜 '예수'가 살고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내려 온 예수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유령

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청소 노동자들은 유령이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 학생, 노동자가 계급으로 인식되는 학원 풍경 속에서, 청소 노동자들은 유령이 아닌 사람으로서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

청소노동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고용으로 고통당하는 청소노동자는 현장에서도 유령 취급을 받는다. 누구도 아는 척 하지 않고, 무시하는 하찮은 존재. 그들이 누구건, 교수, 대학생, 사무직 노동자들 모두, 청소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자신도 노동자이면서 청소노동자를 마치 벌레처럼, 노예처럼 여기는 그들의 시선은 천박하게 비뚤어져 있다.

신분제 사회는 인간을 차별하고, 등급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주인이고, 노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인 것이 당연하지만, 여기에 다시 신분제가 자리 잡는다. 교수는 월급을 받는 노동자가 분명하지만,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은 대부분 미래의 노동자가 되지만, 청소노동자를 외면한다. 노동자도 대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중소기업 정규직, 중소기업 비정규직, 하청업체 비정규직 등등 무수히 많은 차별과 차등으로 서로를 구분하고, 혐오한다. 청소노동자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신분의 노동자다.

그런 그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순간, 유령이었던 청소노동자는 존재를 찾게 되고, 다른 노동자와 동등하게 노동자의 위치를 갖게 된다. 노동자는 단결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찾고, 실존의 인격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죄와 벌

술을 먹고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떳떳하게 살아가고, 성범죄 피해자는 사람들의 눈총과 속앓이로 더 움츠리고 숨어 지내야 하는 현실을 대비하여 보여 준다.

한국에서 성범죄는 매우 가볍게 처벌한다. 성범죄자의 95% 이상이 남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법부는 성범죄를 남성 범죄로 규정해도 좋은데, 남성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범죄에 관대한 한국의 법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성범죄를 부추기고, 남성의 성범죄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결국 사법부가 성범죄자인 남성들을 옹호하고 보호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에는 소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 보면, 성범죄 피해자의 95%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사법부까지 피해자인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 현실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남성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사회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천국과 지옥 2

지옥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던 예수가 지상이 살기 힘들다는 기도를 듣고 지상으로 향한다. 대형 교회와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교회의 부조리함을 알게 된다.

지옥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예수는 자기를 팔아서 먹고 사는 목사와 대형교회를 보면서 절망한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예수를 팔아서 무지한 신도들의 등을 처먹는 목사와 교회가 매우 많고, 어리석은 신도들은 그런 목사와 교회를 아무 생각없이 추종한다. 신도들은 '신' 또는 '하나님' 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고, 목사의 말을 진리로 믿는다. 어리석은 신도와 탐욕에 찌든 목사가 만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막장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살아서 한국에 오면 노숙자 소리를 듣고,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된다. 예수를 등처먹는 목사가 나타나고, 예수는 목사에게 이용당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신'이라는 예수마져도 하찮게 만드는 한국 개신교의 탐욕과 욕망의 크기는 초대형 크기의 교회로 등장한다. 세계 최고 크기의 교회를 짓는 한국의 개신교는, 목사가 대를 이어가며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교회를 부동산 가치로 계산하는 철저한 물신주의를 따른다.

 

문신

열세 살 소녀는 어느 날 일본군에게 끌려가, 혜산시 군부대 막사에서 다른 소녀들과 함께 성노예로 지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이토 다카시가 40년 동안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흑백의 단순한 형태로 그린 만화지만, 차마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다. 일본군이 저지른 이 참혹한 만행은 필설로 표현하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잔혹하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주인공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온몸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일제의 만행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일본은 한국의 성노예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일본은 자기 나라 국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일본군이 저지른 이 잔혹하고 악귀의 행위를 은폐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본의 만행을 더 널리 알리고, 성노예 피해자를 보호하고, 보살펴야 한다. 

 

세균

지구에서 가장 하등한 동물로 취급되는 세균. 어느 날 이 세균을 믿기 힘들 정도 귀하게 대접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세균을 통나무에 넣고 이런저런 실험을 자행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잊히지 않는 실험이 있다.

일본군 731부대의 만행을 그린 내용. 일본군은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 세균실험을 하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조선인과 중국인을 잡아와 생체실험을 했다. 그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고 참혹해서 필설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731부대에서만 일본군의 실험대상으로 약 1만 명의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몽골인이 죽었고, 731부대가 개발한 세균을 중국에 투하해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세균 감염으로 죽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쓴다는 것부터, 그들이 저지른 악행은 나찌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가스 학살보다 훨씬 더 잔혹한 행위였다. 일본은 끝내 이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여기서 만들어진 자료는 미군이 가져갔다. 미군 역시 731부대의 만행을 알았지만, 자료를 넘겨 받는 조건으로 전쟁범죄를 문제 삼지 않았으므로, 강대국의 논리는 정의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앞으로 10년 동안 긴 밤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밤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대통령은 모두가 긴 잠을 자야 한다고 대국민연설을 한다. 어느 날 모두가 잠든 피난소에 괴물이 나타나 사람 피를 빨아 먹는데, 그 모습을 잠들지 못한 소녀가 보게 된다.

침묵하는 대중은 권력에 잡혀 먹힌다. 권력은 낮은 밤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으며, 밤이 되면 모습을 바꿔 괴물이 된다. 그들은 대중의 피 - 재산은 물론 가족, 이웃, 친구, 우정, 정의, 민주주의, 연대, 우애, 윤리, 도덕, 사랑 - 를 먹고 사는 존재다. 괴물을 막으려면 대중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서 행동하는 시민, 단결하고, 힘을 모으고, 합심해 괴물을 막겠다는 의지를 가진 대중은 괴물(권력)에 잡혀 먹히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번 괴물에게 잡혀 먹혔던 기억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 이명박 사기꾼, 박근혜 등 사악하거나 멍청한 권력에게 빛을 빼앗기고, 오랜 시간 잡아먹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대중은 깨어났고, 서로 힘을 모아 괴물을 물리쳤다. 촛불 집회가 그 생생한 기록이자 증거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 어둠을 밝혔고, 괴물(권력)을 쫓아냈으며,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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