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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만화를 읽다

아리랑

by 똥이아빠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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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리랑

작가 : 박건웅

출판 : 동녘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영웅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재능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시대에 조응하는 인간이며, 역사에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김산은 열다섯 살에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떠난다. 지금의 중학생 정도의 어린 소년이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혁명가가 된다.

소년이 일본경찰과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 조선공산당이 1921년에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김산의 행동은 자생적 공산주의자 1세대에 해당한다. 김산은 당시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판단하고 있던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혁명과 함께 해야만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갈라졌으며 그 안에서도 여러 분파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장투쟁 계열에서도 개별적 테러를 활용했던 민족주의 계열과 군대를 양성해 일본과 전쟁을 하겠다는 전투부대 조직은 목적은 같았으나 행동이 달랐고, 그들도 중국공산당과 쏘련공산당으로 각각 협력 세력이 나뉘었다. 아무리 간단하게 요약해도 당시 독립운동의 갈래는 매우 복잡했으며, 각 파벌의 갈등은 동지가 아닌, 적과 같은 미움과 증오를 띄기도 했다.

여기에 중국으로 숨어든 일본의 조선인 밀정이 독립운동가를 납치, 살해하는 경우도 많았고, 멀쩡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일제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사상의 굳건함을 잃지 않고, 혁명가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잊지 않고 일관된 투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서양에서는 체 게바라를 대표적 혁명가로 손꼽지만, 김산의 삶은 체 게바라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혁명과 독립을 위해 싸웠다. 쿠바 혁명을 비롯한 남미의 혁명이 미제국주의와 자본을 뒤엎는 혁명이었다면, 김산이 살았던 시대의 혁명은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띈다. 한국의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독립하는 절대 과제와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혁명까지 이뤄야 하는 공산주의 혁명의 의무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산은 중국 곳곳에서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군벌들과 싸우며, 크고 작은 도시에서 일시적으로 혁명에 성공해 해방구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중국공산당은 언제나 열세에 있었으며, 군벌에 쫓기고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에서 패퇴하면서 대장정을 시작한다. 대장정을 시작할 때 10만 명이던 사람은 연안에 도착했을 때 90% 가까이 사망하게 된다. 30년대 중반의 중국공산당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연안에서 다시 터전을 다진 중국공산당은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다.

김산은 중국혁명의 성공도, 한국의 독립도 못 본 채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삼십대의 짧은 살았던 한 혁명가의 삶은 님 웨일스의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님 웨일스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짜 혁명가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남북한의 분단과 체제로 인해 인정받지 못하거나, 왜곡되는 현실이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혁명가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 계열, 남조선노동당, 중국공산당과 협력했던 혁명가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결국 만주와 중국, 쏘련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역사에서 잊혀졌거나 지워진 상태다.

약소국의 혁명가는 시작부터 비극적 운명을 내재하고 있다.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서 큰 나라의 혁명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 혁명가는 현실의 고난을 피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신화와 창작에서 영웅은 고향을 떠나 고난의 길을 따라 모험을 하고, 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현실의 혁명가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전전하며 끝모를 고통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다. 그리고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혁명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억울하게 죽은 혁명가들은 기록에도 남아 있지 못하다.

님 웨일스의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모택동을 만나 '중국의 붉은 별'을 써서 서양에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알린 인물이고, 님 웨일스 역시 한국공산주의자이자 중국공산당원 장지락(김산)을 인터뷰해 당시 한국공산주의자들과 혁명에 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은 매우 중요한 기록이지만 한국에서는 한때 금서였다. 독재정권은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장지락(김산)의 일생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제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과거의 혁명가를 잊어버렸다.

박건웅 작가는 활자에 갇혀 있던 혁명가 김산을 깨웠다. 박건웅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흑백 판화 기법의 그림은 강렬한 내용처럼 강한 이미지로 당대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김산의 삶은 스스로 혁명가로서의 자각과 오랜 훈련으로,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가지만, 늘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혁명가라도 인간적인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고, 평범한 행복을 누릴 기회도 있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이미 결심한 김산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행복조차도 부담스러워한다. 그 누구도 김산의 삶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혁명가의 삶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높은 도덕성과 신념, 의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하지만 이름 없이 스러진 수많은 혁명가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북한의 분단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의 자취까지 분단되는 부작용을 만들었으며, 역사에 기록될 기회조차 갖지 못한 훌륭한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이 많다.

'아리랑'은 정부나 단체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님 웨일스와 장지락이 만나 대화를 하며 기록한 내용이라 공인받지 못한 기록이지만, 개인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기록하고, 당대의 세밀한 묘사가 풍부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서 높은 사료적 가치가 있다.

님 웨일스의 글을 읽기 부담스럽다면, 박건웅 작가가 그래픽노블로 그린 이 작품을 권한다. 글만 읽을 때보다 훨씬 이해도 잘 되고 재미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삶과 중국의 혁명 과정까지 알 수 있어 독립운동사 자료로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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