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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사의 찬미

by 똥이아빠 2011.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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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의 찬미]를 보았다. 최근에 만들어지는 우리 영화의 수준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꼼꼼하고 성의있게 보고자 노력했다. 금년 여름에  발표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은 흥행에서 크게 성공한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의 작품 수준이 대중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을 정도로  일정한 수준에 올랐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기대는 영화를 보면서 점차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사실 [사의 찬미]라는 제목이 상징하듯이 내 기대에  만족을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내용과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은 출연한 배우들을 보면 안다. 윤심덕으로 나오는 장미희,  김우진으로  나오는  임성민,  홍난파로 나오는 이경영, 이들 세 사람은 우리 영화계에서  인정받는 연기자들이다. 
 이렇듯 호화 연기자들이 출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졸작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왜일까? 부족하나마 그 이유를 알아보자.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주제의  설정이다.  배우들이 아무리 연기를 잘 해도 기본 골격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작품은 빛나지 않는다. 1990년대에 [사의 찬미]라는 주제를 설정한 것은 어떤 의도일까. 윤심덕과 김우진의 비극적 사랑이 오늘날에도 많은 청춘남녀의 가슴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의 숫자는 차치하더라도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어떤 여성은 이 영화를  보고나서  '잘 되었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지만 '잘 되었다'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겠다. 나는 그러나 이 영화가 여러가지로 왜 '못 되었는지' 몇  가지  이유를 말하겠다. 
 근본적으로 주제가 잘못 설정되었다고 말한다면 많은 반론이 있을  듯  하다. 그럼 주제는 무엇이며 근본적인 잘못은  무엇인지를  밝혀보자.  예술은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이다.  예술행위를 하는 사람이 다른 무엇에  의해  그 행위를 제한 받는다면  그것은 가장 큰 비극이다. 따라서 무엇을 주제로  하여 어떤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은 전혀 제작자의 의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이 '사랑' '이별' '애정' 등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받는 대접을 보면  영화라는 예술 장르에 어떤  힘이 간섭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구로 아리랑]이나 [부활의 노래] 등 사회문제를  다룬  것들은 영화가 대중들에게 보여지기 이전에 상당부분이 잘려나가 제작의 본 뜻을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사회를 비판하거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는  작품들은 왠일인지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못하거나 개봉이 되어도 이내 간판이  내려지고 만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관객들이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를  싫어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한 이유는 못된다.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외국영화 가운데 [로메로]나  [심문],  [죽은 시인의  사회] 등은 사회를 비판하고 있지만 흥행에 성공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의 주제가 어느 것이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냐 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작품들의  대개가 애정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장사'가 잘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비판적인 작품이 발붙일 수 없는 조건이 있기 때문임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때문에 [사의 찬미]와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작자로서는 훨씬 그럴듯한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럴듯해도 이 작품이 보여주는 한계를 극복할 만큼 훌륭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의 찬미]는 1920년대에 지식인이었던 윤심덕과 김우진의 '불륜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어느 사람은 '비극적  사랑'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죽어서 비극인지, 그 두 사람의  사랑이 비극인지 알 수가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윤심덕과 김우진이 살아서 사랑을 하던  시대상황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고 암흑의 나날을 살아가던 그  시절, 민중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  정든 고향을 버리고 멀리  만주로 떠나고 나라 잃은 서러움과 분노로 젊은이들은 독립운동에 온 몸을 바치던 때였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서는 그런  우리  민중의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윤심덕은 동경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이고 김우진은 희곡을 쓰며 연극연출을  하고 있다. 그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으며 조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조금도 고민을  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영화가 진실로 두  사람의 사랑과 고뇌를 그리고자 했다면 더욱 주위의 상황을 통해  갈등과 고민을 부여했어야 했다. 그들이 마치 사랑만을 위해  태어난 단세포 동물인 듯 조선과 일본을 드나들며 애정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애정의 본질을 무시하고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려는 저급한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다. 
 당시, 1920년대는 1917년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지식인들의 성향이 급진적으로 발전하던 때였다. 더우기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의  식민지라는 악조건이 더욱 이러한 사상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유학생들 가운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김우진, 홍난파를 비롯해  많은  한국인 유학생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염세주의자거나 통속적인 출세주의자들 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시대상황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않거나 너무 무식해서 그런 것들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모른다는 것은 전혀 거짓이다.  따라서  결론은 의도적으로 시대상황을 외면하고 비켜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반론도 있겠다.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이런 저런  애기를 다 넣을 수 있겠느냐고. 주제에 관한 애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긴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전체 영화 상영시간이 다른  영화에 비해 길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시간때문에 표현해야 하는  것들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변명 중에서도 가장 유치한 변명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특히 영화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많은 것들을 압축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많이 이해하고 보자면 이런 논리도 가능하겠다. 당시 상황은 우리  민족에게 암흑의 시대였다. 지식인들은 절망하고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분위기는 허무주의로 변해가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모든  사상과 지식은 퇴폐적으로 변한다.  이른바 '퇴폐적 허무주의'. 이 영화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것은 성공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가장 잘못되어 있는 것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배우들의 연기와 세트, 카메라의 감각 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자.  윤심덕의 역할을 하고 있는 장미희 씨는 우리나라 여자배우 가운데서도  연기력이 수준급에 든다고 한다. 그러나 윤심덕  역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어색함과 민망함을 느꼈다. 영화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성도를 갖추려면 완벽한 연출과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은 잔소리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영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프로근성'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적당히  하면서  관객들에게  우리  영화니까 잘봐달라는 식의 억지는 환멸을 느끼게 할  뿐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의욕과잉이거나  수준미달이었다. 장미희  씨가 소프라노를 부르는 모습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보는  사람이 민망했다. 입이 맞지 않아서 노래와  입이 따로 노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의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이  생각났다. 자기 분수에 맞는 역을 찾는 것도   연기자의  능력이구나 싶다. 메릴 스트립이 다른 악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우리나라 여배우 가운데 과연 저만한 배우가 있을까 싶었다. 내가 너무 사대주의적인지는 모르지만 연기자의  실력은 적당한 배역을 맡아 자기의 능력을 완전히  쏟아부을 때 그 진가가 나타난다고 믿는다. 너무 과분한 역이나 부족한 역을 맡아서 고생하는 것은  관객을 위해서도 슬픈 일이다. 장미희 씨는 매우 열심히 연기를 했고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단, 의욕과잉인 것만 제외한다면. 그러나  상대역인 임성민 씨의 연기에는 모두들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홍난파 역의 이경영 씨는 그래도  가장  무난하게 연기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카메라는 상당히 세련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아름다운  것만을 찍기  위해 들인 노력치고는 마지막 선상 부분에서  이미지를 상했다. 작위적인 모습이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관객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아마추어 수준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극장에 불이 들어오면서 느끼는 것은 극장요금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끝까지 참고 보고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그래도 우리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증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을 헐뜯은(?) 나쁜 관객이지만 이런  관객이  있어야 좋은 관객도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영화의  발전을 바라면서 쓴다. 


사의 찬미
감독 김호선 (1991 / 한국)
출연 장미희,임성민,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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