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뜨> 매국노 사냥꾼
BMW 820D가 미끄러지듯 호텔 입구에 들어왔다. 도어맨이 재빠르게 뒷문을 열자,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다른 문에서도 남자들이 내렸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짙은 선그라스를 쓰고 있었다. 중절모는 도어맨에게 팁을 건냈다. 도어맨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차를 호텔 앞 가장 좋은 자리에 세웠다.
중절모를 쓴 남자가 앞장 섰고,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세 남자는 호텔 로비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프론트에 도착한 남자는 점잖고 교양 있는 태도로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물었다.
프론트 직원은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회장님의 거처는 1급 비밀에 해당하는 내용이어서 누구에게도 알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은 여느 손님과는 달라보였다.
'회장님 거처는 저희도 모릅니다만...'
직원은 지배인이 지시한대로 일단 모범답안을 말했다. 그러자 중절모에 선그라스를 쓴 남자는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팻말을 꺼내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701호실. 우리도 알고 있어요. 거짓말 하면, 그 대가가 어떤지 몸으로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말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왔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면 안 됩니다. 아셨죠?'
남자들은 프론트를 떠나 엘리베이터 쪽으러 걸어갔다. 키가 크고, 군살이 없이 마른 몸매에 짙은 선그라스를 쓴 남자들이라면...직원은 회장이 있는 수트룸의 호출 버튼에 손을 가져갔지만, 누르지는 못했다.
1701호 객실은 호텔에서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네 개의 수트룸 가운데 하나로, 17층은 전체가 비어 있고, 오직 회장만이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수트룸이 차는 경우는, 회장이 초대한 사람이거나, 정치계의 거물이 요청하는 경우, 외국의 귀빈인 경우 외에는 예외가 없었다.
17층 엘리베이터 앞에는 경호원 두 명이 24시간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17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세 남자가 내리자 경호원이 다가왔다.
'아, 손님, 여기는 객실이 없습니다. 잘못 올라오신 듯 한데, 다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경호원이 친절하게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세 남자는 1701호를 향해 걸어갔다. 경호원은 놀라서 세 남자 앞으로 달려와 가로 막았다. 그들의 허리에는 가스총이 매달려 있었다.
중절모는 다시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팻말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자 경호원들은 멈칫,하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중절모 뒤에 서 있던 두 남자는 양복 저고리를 슬쩍 열어보였다. 그들의 허리에는 권총 손잡이가 보였다. 경호원들은 복도 옆으로 붙어섰고, 세 남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1701호 앞으로 다가갔다.
중절모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중절모는 조금 세게 다시 두드렸다. 몇 초가 지나고, 안에서 '무슨 일이야?' 하는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중절모는 온몸으로 문을 강하게 밀어부쳤다. 그 충격으로 안에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나뒹굴었다.
중절모는 객실로 뛰어 들어 회장을 찾았다. 다른 남자가 넘어진 회장의 비서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며 거실로 들어갔다. 비서는 비명을 질렀다. 회장은 침실에 있다가 비서의 비명을 듣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침실에는 젊은 여자가 벌거벗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체...'
회장은 허리 아래에 큰 수건을 두르고,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침실에서 거실로 나오다 세 남자를 발견했고, 그 자리에 멈췄다.
'뭐야, 당신들!'
회장이 소리질렀다. 비서는 문에 맞고 넘어지면서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를 봐서인지, 아니면 정말 아파서인지 비서는 회장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때, 비서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가 주먹으로 비서의 얼굴을 강타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비서는 소리를 질렀지만 곧 멈췄다. 소리를 지르면 계속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서의 얼굴은 뭉개지고 피로 범벅이 되었다. 코뼈가 부러졌고, 이빨이 몇 개 부러져 입에서 튀어 나왔다. 눈두덩도 부어올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비서의 꼴을 보면서 회장은 선뜻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중절모가 턱으로 회장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회장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소파에 가서 앉았다. 회장 맞은편에 중절모가 앉았고, 두 남자는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놀라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중절모가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짙은 선그라스 뒤쪽에 있어 어떤 표정인지 회장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절모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것으로 보아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이해하면, 우리도 조용히 사라지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면, 그때는 회장님은 물론, 이 호텔 전체의 손님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지하주차장에 폭탄을 장착한 차가 있으니까요.'
중절모는 나즈막히 이야기했고, 놀라운 말이었지만 회장은 믿지 않았다. 저런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공갈협박이나 하는 놈들은 모두 사기꾼 개자식들 뿐이라는 것을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믿지 않으실테고, 설령 호텔이 다 폭발해도 회장님만 살아 있으면 아무 문제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중절모는 회장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저희도 회장님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 점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대체 용건이 뭐요...' 회장은 이 남자들이 정부에서 온 사람들인지, 강도들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전화하셔서, 5만원짜리 현금으로 50억원을 가방에 넣어 호텔 현관 앞에 있는 검은색 베엠베 트렁크에 넣으라고 하세요. 저희 용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지만, 당장 50억원을 어떻게...' 회장은 일단 버텨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장의 눈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중절모가 회장의 따귀를 힘껏 때린 것이다. 회장의 왼쪽 뺨이 시뻘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회장은 아픈 것보다 치욕스러웠다. 평생 누구에게 단 한 번도 손찌검을 당한 적이 없는 귀한 몸으로 자란 자신이었다. 누구나 자기 앞에서는 벌벌 떨며, 허리를 굽히고,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 정치가들도 권력을 앞세워 큰소리를 쳐도 뒤에서는 자기에게 굽신거리고,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돈은 권력보다 더 힘이 강하다는 것을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같은 자신이 범죄자들에게 뺨을 맞았다는 것이 원통하고 참혹한 기분이었다.
'자, 지금부터 1분 안에 우리가 바라는대로 되지 않으면, 그때는 조금 더 짜릿한 맛을 보게 될 겁니다.'
중절모는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빛은 서리처럼 차가울 것이라고 회장은 생각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호텔 재정 담당은 전화를 받았고, 금고에서 현금으로 50억원을 꺼내, 가방 두 개에 나눠 담아 호텔 앞에 서 있는 BMW 트렁크에 실었다. 재정 담당은 회장의 전화가 낯설지도 않았고, 이렇게 현금을 싣고 나가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중절모가 전화를 받았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또 한 명의 남자가 일이 무사히 진행되었음을 알렸다. 중절모는 전화를 끊고, 회장을 바라보았다.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저희가 직접 오지 않고 전화를 드릴테니, 그때도 지금처럼 똑같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시간 이후에 경찰에게 전화를 하거나, 잘 아는 국회의원이나 정보부 따까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아까웠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모욕한 이 범죄자를 꼭 잡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중절모는 일어서 문 쪽으로 걸어가다 발을 멈추고 회장을 돌아보았다.
'아, 회장님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후작이었죠. 그때 일본으로부터 돈을 꽤 많이 하사받았고, 땅이며, 건물이며 각종 예술품까지, 고대광실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말을 마친 중절모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모자를 살짝 들어올리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회장은 떨리는 다리를 끌고 중절모가 떨어뜨린 종이를 집으러 갔다. 그 종이를 본 회장은 바닥에 철썩 주저 앉았다. 그 종이는 회장의 손자와 손녀들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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