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은 물인가, 불인가
지난 11월 26일, 광화문과 시청, 종로 일대에서 약 150만 명이 모이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미 네 번의 집회가 평화적으로 열렸고, 이날 역시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내용은 평화롭고, 따뜻했으며, 서로의 믿음과 지혜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마침 첫 눈이 내리고, 날씨는 차가웠지만 그렇기에 혹시 집회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해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 나왔다. 나 한 사람 쯤이야, 하는 마음이 아니라, 나 혼자라도 나간다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 무려 150만 명이었다.
언론에서는 경찰과 충돌하지 않고, 다친 사람 한 명 없으며, 길거리의 쓰레기까지 깨끗하게 치우는 시민들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고, 또 실제로도 그렇지만, '평화집회'가 목적이 아님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광장에 모이는 이유는, 부정과 부패, 비리와 범죄를 저지른 현직 대통령과 그의 사사로운 인간관계로 얽힌 자들의 범죄를 끝장내기 위해서다. 당장은 범죄자 대통령을 자리에서 쫓아내고, 검찰을 압박해 엄정하고 투명한 수사가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광장에 모이는 이유인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백만명, 이백만명이 광장에 모인들, 대통령은 꼼작하지 않고,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데, 촛불집회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나는 이른바 '가투'에 자주 나갔다. 선배들을 따라서 화염병과 보도블록을 깨서 전경들과 백골단에게 던졌다. 최루탄이 쏟아지고, 물리력에서 밀리는 우리들은 백골단의 폭력을 피해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많은 동지들이 전경과 백골단에 잡혀 몰매를 맞고 끌려갔다.
경찰 최루탄에 맞고 목숨을 잃은 이한열 열사 사건 이후, 학생과 노동자들 뿐 아니라, 시민들이 본격 반정부투쟁에 나섰고, 마침내 87, 88년의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면서 우리는 가슴 뻐근한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승리의 열매를 다시 부르주아 정당에게 빼앗긴 것은 역사적 오류였음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를 거울 삼아 다시는 시민의 승리를 부르주아 정당에게 선물로 건네주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가투'라는 말도 사라졌고, 대신 '촛불집회'가 대신하고 있다. 내가 던졌던 '꽃병', '몰로토프 칵테일', '화염병'이라는 단어도 사라졌고, 그보다는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퍼포먼스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아름답고, 신나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거리에 나오는 이유가, 저 썩어문드러진 대통령과 지배집단을 끝장내는 것이고, 우리가 즐겁고 신나는 퍼포먼스만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는 이제 다섯 번의 기회를 부패한 대통령과 지배집단에게 주었다. 자신의 발로 스스로 내려오기를. 우리는 평화롭게 행진했고, 우리의 목소리를 가능한 온건하게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저들, 부패한 대통령과 지배집단은 평화로운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 애써 무시하고나,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시민이 잠시 맡긴 권력을 사유화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더러운 짓을 일삼은 무리들은 대통령도, 집권여당도 그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스스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평화'롭지만은 않은 100만명이 될 것이고, '촛불'보다는 '횃불'을 들 것이며, 단지 함성이었던 시민의 힘은 거대한 급류가 되어 청와대와 국회를 쓸어버릴 것이다.
옛말에 불난 자리에는 남은 것이 있어도, 물 지나간 자리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유순해 보이는 물은 한번 난폭해지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은 물이 될 수도 있고, 불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인내가 어디까지일지 대통령과 지배집단은 시험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인내의 끝에서, 프랑스 혁명보다 더 격렬한 폭력과 잔혹함이 거리에 넘쳐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협박이라고? 어떻게 받아들여도 좋다.
봉건왕조였던 조선시대에도 민중은 잔학한 벼슬아치를 징치하는데 서슴치 않았다. 악랄한 벼슬아치의 악행을 참다참다 견디지 못할 때, 민중은 집에 있는 낫과 쇠스랑을 들고 관청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악덕 벼슬아치를 무릎 꿇리고, 그 죄를 낱낱이 알린 다음, 목을 베어 큰 거리에 내걸었다. 그것이 민중의 힘이다.
민주주의 시대라고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오히려 민주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시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잠시 맡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고, 제왕적 권력인양 착각하는 대통령과 지배집단에게는 프랑스 혁명의 길로틴이나 그보다 더한 응징의 방법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횃불을 들 수 있고, 화염병도 얼마든지 던질 수 있으며, 5.18 광주민중항쟁처럼, 시민군이 직접 총을 들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역사적 경험이 있고, 역사에서 모두 승리한 기록들이다. 우리를 이기려는 권력이 있다면, 그것은 곧바로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경고한다. 우리들 시민은 물이고, 불이다. 칼이 누구의 손에 있느냐에 따라 요리를 할 수도 있고, 피를 볼 수도 있는 것처럼, 물이 평화롭게 흐를 수도 있고, 불이 아름답게 빛날 수도 있다. 하지만 물이 급류가 되고, 불이 횃불로 타오르게 될 때, 범죄자 대통령과 지배집단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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