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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by 똥이아빠 202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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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심각한 사회 문제를 코믹하고 유쾌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에린 브로코비치'와 비슷하다. 영화는 학벌, 여성, 성차별, 유리천정, 성평등, 기업범죄, 환경오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내부자 고발, 여성들의 우정 등 매우 많은 요소를 버무려 만들었다.

현재의 기준으로 이런 영화가 나올 수는 없으니까 - 그랬다가는 여성운동, 페미니스트들의 강력한 펀치를 맞게 될 것이 뻔하므로 - 영리하게 시간을 1990년대 중반으로 돌렸다. 

한국의 한 재벌기업인 삼전기업에서 일하는 자영, 보람, 유나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회사에 취직했다. 첫 장면부터 학력이 낮은 여성이 회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보여준다. 직급이 높은 남성 노동자를 위해 커피를 타는 여성 노동자들은 특히 그들만 유니폼을 입었다. 이들 유니폼을 입은 여성 노동자들은 대학을 졸업해 취업한 다른 여성 사무직 노동자들보다 낮은 직급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여성 노동자가 결혼하거나 임신하면 회사에서는 강제로 해고할 수 없으니 심리적 압박과 기업 분위기를 해고하는 방향으로 몰고간다. 여기서 조금 이해할 수 없는 건, 직급이 높은 남성 노동자들이 직급이 낮은 여성 노동자에게 성추행, 성희롱, 성폭력을 하는 장면이 단 한 장면도 없다는 것이다. 무려 1990년대 중반의 기업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노동자가 많은 회사에서 성희롱, 성추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지금의 여성 관객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영화에서는 적어도 남성과 여성의 성윤리는 눈꼽만큼도 나무랄 데가 없다. 그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당위적으로 옳다는 건 잘 알지만, 이 영화는 그래서 환타지다.

 

영화가 환타지인 이유는 '에린 브로코비치'가 실화를 기반으로 한 대신, 이 영화는 픽션인 점도 있다. 삼진기업의 공장에서 불법으로 독극물 페놀을 방류하고, 이것을 본 자영이 회사 내부의 지휘계통을 따라 보고서를 제출한다. 회사에서는 페놀 방출을 인정하고, 공장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만나 사과하고 보상하는 합의를 한다. 여기까지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올바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방류한 페놀 수치는 정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미국 연구소 보고서는 조작되었고, 서울에 있는 대학연구소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기준치를 훨씬 넘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말하고 있지만, 그 보고서는 곧바로 폐기된다. 

여기에 회장 아들인 상무의 무능과 비리, 외국인 경영자 빌리는 알고보니 기업사냥꾼이었고 기업의 주식을 떨어뜨려 헤지펀드가 기업의 주식을 싸게 매입한 다음, 대주주가 되어 일본의 기업에 이윤을 남기고 팔아 넘기려는 음모까지 개입한다.

 

삼진그룹에서 운영하는 '영어토익반'은 고졸 사원을 위해 회사에서 토익점수 600점이 넘는 사원에 한해 대리 진급을 시키겠다는 공고를 내면서, 고졸 여성 노동자들이 단체로 영어토익 공부를 하게 된다. 회사의 불법 페놀 방류를 목격하는 것도 여성 노동자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것도 고졸 여성 노동자들이다. 이 기업에서 양심 있는 사람은 모두 여성 노동자들이고, 남성 노동자들은 퇴직한 봉현철 상무 뿐이다.

남성 노동자들은 피동적이고, 소극적이며, 불법을 외면하고, 오로지 자기의 보신만 신경 쓰는 한심하고 역겨운 존재들이다. 이들이 나중에 회사를 팔아넘기려는 외국인 경영자 빌리와 맞서는 것도 여성 노동자들이 발품을 팔아 주주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해 동의서를 받아온 서류를 확인한 다음부터였다.

이 영화에서도 '언론'은 기업과 담함해 범죄를 숨기고, 기업에게 돈을 받아먹는 악랄하고 파렴치한 존재로 등장한다. 한국 언론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기자'는 '데스크'에서 기사를 빼고, 모든 자료를 삼진그룹에 넘겼다는 말을 한다. 즉, 언론이 기업과 담합해 범죄를 숨긴 것이다. 그럼에도 페놀 방류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고, 일부 언론에서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루기 시작한다.

 

영화가 코미디 장르이긴 하지만, 기업에서 고졸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범죄 행위를 고발하고, 기업이 다른 기업에 인수합병되는 걸 막는다는 설정, 그 과정에서 모든 남성 노동자는 모두 허수아비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고, 은퇴했던 기업의 회장이 나왔을 때도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졸 여성 노동자들인 장면은 코미디를 넘어 환타지다.

영화의 주제나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렇게 개연성이 없는 내용이라면 재미를 떠나 동의를 하기 어렵다. 여성 노동자의 활약을 그린 것은 좋지만, 그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업이나 사회의 구조도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걸 감독이나 제작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로라도 여성 노동자이 활약을 펼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 것은 일종의 자위일 수는 있으나,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하며, 현실이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영화가 현실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것이 사회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코미디를 선택했다. 그리고 코미디는 관객을 웃기기보다는 환타지로 변신하면서, 현실에서 동떨어진 먼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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