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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by 똥이아빠 2021.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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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PD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찬실은 새로운 영화 제작을 앞두고 감독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난감한 신세가 된다. 수입이 끊기자 산동네 단칸방으로 이사하고, 친하게 지내는 여배우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기도 한다.

여배우의 집으로 찾아오는 영어 과외 선생 김영을 만나면서 찬실은 그에게 이성의 끌림을 느끼지만, 김영은 찬실을 누나로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할머니 혼자 산다는 집에는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장국영이 있고, 그는 찬실이 눈에만 보이는 귀신인데, 엄청 착한 귀신이다.

왜 찬실의 눈에만 보이는 장국영 귀신이 나타날까. 장국영은 찬실에게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전부 버리고,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한다. 찬실은 그동안 영화를 만드는 일에 자신을 내던지고 살아왔고, 그것이 진정 자기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찬실은 연애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고, 시나리오도 쓰고 싶고, 다시 영화도 만들고 싶다. 그 어느 것도 잘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모두 포기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찬실이의 진짜 멘토는 주인집 할머니(윤여정)다. 할머니는 하루만 열심히 산다. 그 하루가 모여서 결국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된다. 할머니는 글을 배우러 주민센터에 다니고, 밥하고 반찬 만드는 일이 생활이지만, 사실 할머니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딸이 먼저 세상을 떴고, 그 방은 내내 비어 있다. 할머니는 찬실이를 보면서 딸을 떠올렸을 것이고, 찬실이가 세들어 사는 것이 적잖이 위안이 되는 듯 하다.

찬실이는 그동안 해왔던 영화 제작을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혼자 시나리오를 쓴다. 하지만 그가 쓴 시나리오는 후배 여배우 소피의 판단으로는 '도저히 지루해서 못 읽겠어'. 일본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좋아하는 찬실은 그러나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을 보고 영화계에 입문했다고 장국영에게 말한다. 솔직히, 영화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찬실이가 좋아하는 오즈 야스지로와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잘 안다. 이 말은, 찬실이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와 만들고 싶은 영화가 다르다는 걸 뜻한다. 찬실이의 영화적 세계관은 아직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으며, 그가 죽은 지감독과만 오래 일했던 것으로 보아 영화의 다양성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매운 버전으로 떠오르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다. 리얼리즘 영화라는 점에서는 '찬실이는...'과 홍상수의 영화는 같은 계열이지만 연출에 있어서는 서로 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홍상수 작품의 인물들은 뻔뻔함, 속물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반면, '찬실이는..'의 인물들은 비교적 점잖고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나마 찬실이가 가장 뻔뻔하고 속물적인 캐릭터다. 그런 찬실이도 좋아하는 남자(김영)에게 먼저 다가가지만, 김영의 태도가 어색하자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한다. 이 장면에서 홍상수의 작품이라면, 찬실과 김영은 술을 많이 마시고 만취한 다음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순서고, 다음날 아침 어색한 표정으로 여관을 나와 해장국을 같이 먹는 것까지 그림이 그려진다.

찬실은 장국영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장국영은 찬실의 또다른 자아-영화의 꿈을 간직한 자아-다. 찬실은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젊은 여성의 모습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비혼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청년들의 삶을 상징한다.

찬실을 찾아오는 영화판 동료들과 함께 달밤의 길을 내려가면서 찬실은 달보고 맹세하지 말라고 말한다. 달도 변하는데 뭔들 변하지 않겠느냐고.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개인의 삶도 매일, 매일이 달라지지 않는가. 

그들은 함께 다시 영화를 만들자고 말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찬실은 영화를 만들고픈 꿈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자기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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