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를 보다/한국영화

세 자매

by 똥이아빠 2021. 7. 15.
728x90

세 자매

 

훌륭한 작품. 

저마다 기구한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지만, 여기 세 자매의 삶도 만만찮다. 세 자매는 서로 사뭇 다른 삶을 살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은 '억울함'이다. 그것도 가벼운 억울함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이들 세 자매의 영혼 깊은 곳에 꾹꾹 눌리며 쌓인 트라우마가 이들의 삶을 서서히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시공간은 이들 세 자매가 눌려 있던 트라우마를 폭발하는 과정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절제된 대사와 행동이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증폭하고 관객에게 뜻밖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 공포는 비틀린 시간이 만든 것으로, 그 시간을 견뎌온 세 자매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그 시공간을 통과하면서 기형적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자기 모습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공포다.

 

세 자매에서 큰언니 희숙은 매우 소심하고 소극적인 여성이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답답하고 짜증나는 캐릭터다. 작품 초반, 희숙은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듣는다. 자신의 몸에 암이 생겼다는 사실을 듣지만, 그것마져도 안으로 삼킨다.

희숙에게는 집을 나갔지만 가끔 찾아와 돈을 뜯어가는 남편이 있고, 학교에 가지 않고 바깥으로 도는 딸이 있다. 그는 작은 꽃가게를 하고 있는데, 꽃가게도, 그녀의 표정도 조명이 꺼진 어두운 실내도 모두 어둡고 우울하다. 전기요금을 아끼려고 불을 끄고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희숙의 모습은, 그의 내면에 갇힌 자아를 보는 것 같다.

희숙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늘 실패한다. 남편과의 관계, 딸과의 관계도 지금까지는 실패했다. 희숙을 둘러싼 관계와 상황에서 그녀는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고, 양보하고, 스스로 낮은 자세를 유지하지만, 그럴수록 희숙의 내면은 황폐해진다. 희숙은 아무도 모르게 자해하는데, 그 정도 상태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희숙은 자신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희숙은 경제적으로 하류층에 속하고, 가족은 있으나 정서적 유대는 없는, 살벌하고 황량한 가족이다. 희숙에게는 마음을 털어놓고 지낼만한 친구도 없다. 

둘째 미연은 겉으로 보면 전형적인 중산층이다. 그의 남편은 대학교수이고, 미연 자신은 교회에서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미연은 자기 삶과 종교를 일치하려는 노력을 한다. 미연의 삶은 세 자매 가운데 가장 역설적이고, 충격적이다. 그건 뒷 부분에 나오는 잔치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미연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면서 합창단을 지휘하고, 자기 삶을 종교와 일치하려 했던가에 관한 해석은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심리적 기재를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연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겉으로 보이는 합리적이고, 따뜻하며, 배려하고, 상냥한 미연의 모습은 사회적 관계를 위해 만든 얼굴이고, 남편의 불륜으로 확인되는 남편에 대한 차가운 복수, 남편의 불륜 상대인 합창단의 후배에 대한 폭력, 자식에 대한 차갑고 난폭한 태도는 미연의 내면에서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미연은 누구보다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가 존경받는 목회자라는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이중적 모습, 위선적 모습을 받아들여 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미옥은 나이가 가장 어려서 두 언니들만큼 트라우마가 심하지 않을까 했지만, 희숙 만큼은 아니어도 다른 형태의 트라우마가 작동하고 있다. 미옥은 어릴 때 겪었던 충격과 공포 이후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미옥은 나이 들고, 작가가 되고, 작품도 쓰지만 그의 자아는 여전히 두 언니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미옥은 하루에도 여러 번 미연에게 전화해서 투정을 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어렸을 때, 미연의 손을 잡고 집을 뛰쳐나와 멀리 떨어진 마을의 가게로 뛰어가던 기억이 있을 때부터 미옥은 미연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었거나, 떨어지고 싶지 않은 밀착, 애착 상태에 놓여 있다.

미옥도 남편이 있는데, 그 남편은 청과상을 하는 평범하고 선량한 남자다. 미옥이 추구하는 세계와는 거리가 먼 남자였지만, 오로지 '착한 남자'이기 때문에 미옥이 선택한 것이다. 나이 차이도 많고, 자기의 이상형과도 거리가 먼 남자를 선택한 것은 '착한 남자'라는 특성이 미옥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이것 역시 미옥의 트라우마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이들의 트라우마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실체를 드러낸다. 이들 세 자매가 현재의 삶을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서서히 드러난다. 

 

 

자매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세 자매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형제든 자매든 연락을 자주 하면서 사는 집은 드물다. 누군가 친화력 좋은 한 사람이 나서서 연락을 자주 하면 몰라도, 보통은 일년에 몇 번 만나지 않는다. 이들 자매도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막내 미옥은 둘째 언니 미연에게 자주 전화한다. 주로 술에 취해서 전화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을 길게 늘어 놓는다. 미연은 미옥의 전화를 받을 때 특히 상냥하다. 화를 내지도 않고, 짜증스러워 하지도 않는다. 미연은 미옥을 애틋하게 여기고, 자기가 돌봐야 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미연과 미옥은 자주 전화를 하면서 목소리도 듣고, 미옥이 어리광도 부리는 사이지만, 미연과 미옥과 달리 희숙은 따로 떨어진 느낌이다. 희숙은 자신의 처지가 몹시 고통스럽고, 외롭고, 우울하지만 동생들인 미연과 미옥에게 먼저 전화하지 않고, 연락하지 않는다.

관객은 영화 말미에 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고, 그 모든 과거의 사건에 이름이 다른 언니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세 자매인데, 왜 이름이 다를까. 희숙, 미연, 미옥. 두 사람은 이름이 같은 항렬이고, 희숙만 다르다. 이름은 이들 자매의 운명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미연과 미옥은 희숙을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선뜻 먼저 연락하지 못한다.

이들 세 자매는 어릴 때, 고통스러운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며, 가해자의 폭력에 시달리며 피해자로서의 경험과 감정을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세 자매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트라우마는 결이 다르다. 희숙은 가장 오래 폭력의 희생자로 살았던 경험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고, 미연은 자신도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희숙보다는 덜 했지만, 희숙이 당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봐야 했던 피해자이면서 목격자의 위치에 있다. 미옥도 폭력 피해자이긴 하지만 두 언니들보다는 정도와 깊이는 직접적으로 덜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피해자일 수 있는 인물이다.

희숙은 미연과 미옥에게 돈을 빌리는데, 그 돈은 아마 남편의 손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돈을 빌려준 것을 두고 미연과 미옥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두 사람은 돈을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희숙은 그것을 늘 마음에 담고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즉, 희숙은 미연과 미옥에게 명확히 말하지 못하는 거리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 거리감에 관해 끝내 말하지 않지만, 관객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고, 그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의 원인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남편과의 관계

세 자매는 모두 결혼했고, 남편과 아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가정' 또는 '가족'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세 자매가 만든 가정, 가족은 그들 개인이 겪은 과거의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기형적 결과물이다. 세 자매는 결혼을 하나의 도피로 생각하거나,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는 의지의 반영이거나, 결혼해서 배우자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막연한 기대가 있거나, 과거의 고통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등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 자매가 가졌던 결혼에 대한 기대 또는 바람은 현실과 괴리가 크다. 그들이 만난 남자가 어떤 남자인가를 알 수 없었던 것이 첫번째 이유겠지만, 남편과의 불화, 가정의 파탄, 가족의 불화에 세 자매 각자의 문제나 책임은 없는지 들여다보면, 거기에 세 자매가 오래 전 겪었던 트라우마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희숙의 남편

백수 건달이면서 도박중독자인 듯한 희숙의 남편은 가끔 집에 들러 희숙에게서 돈을 가져간다. 희숙이 마련한 돈은 사채인 것으로 보이는데, 돈을 가져가는 남편은 매우 폭력적이고 아내인 희숙을 조롱하고 비웃는 야비한 인간이다.

희숙이 처음부터 양아치, 건달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한 것인지, 아니면 살다보니 희숙의 남편이 그렇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지만, 희숙의 가족은 매우 기괴하게 뒤틀린 모습을 보여준다. 희숙은 남편이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사채를 써서라도 돈을 만들어 남편에게 준다. 하지만 그런 희숙을 남편은 전혀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희숙을 비웃고, 함부로 대한다.

희숙의 남편이 가학적 태도를 보이는 데는 희숙의 책임도 있다. '책임'이라고 말하기에는 희숙의 트라우마가 원인이어서, 희숙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피해자라는 걸 관객은 나중에 알지만, 희숙이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은 몹시 안타깝고 안쓰럽다.

희숙은 남편 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납작 업드린 자세로 대한다. 남편은 이런 희숙의 태도를 보면서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어 오히려 더 사납게 희숙을 물어뜯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희숙이 미연처럼 당당하고 사납게 대든다면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지만, 희숙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존감이 사라진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희숙은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라 자기가 먼저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남편에게 휘둘리며, 결혼 생활이 파탄날 때까지 끊임없이 혼자 자해하며 괴로움을 참고 견디다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의 남편이 그를 안쓰럽게 생각할 리도 없을 것이고, 안타까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미연의 남편

대학교수로 지식인이고 교회의 집사인 미연의 남편은 교회 합창단의 솔로로 활동하는 미혼의 젊은 여성과 불륜 사이다. 미연은 남편과 자기가 지휘하는 합창단의 솔로가 불륜이라는 걸 확인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른척 넘어가지도 않는다. 

남편의 불륜 상대인 합창단 솔로와 기도원에 가서는 발로 얼굴을 짓밟아 버리고, 남편의 학교로 찾아가 이혼을 하려면 자신의 돈으로 구입한 아파트 융자금과 남편의 형 수술비로 쓴 돈을 갚으라고 말한다. 이런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 미연은 냉정함을 잃지 않는데, 정작 이런 미연의 모습이 남편의 입장에서는 '소름끼치게 징그러운' 모습인 것이다.

즉,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 미연을 보면서 남편은 아내의 위선적 태도에 마음이 상한 상태였고, 마음이 점차 멀어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건 단지 부부의 문제 뿐아니라, 미연이 아이들(아들과 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데, 미연은 아이들에게 강압적 태도를 보인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합리적인 듯 하지만, 그의 내면에 강한 응어리가 있다는 걸 남편도,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연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것이 이해되거나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미연의 남편이 지금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미연이 5천만 원을 만들어 대학 쪽에 뇌물을 준 결과이며, 미연은 남편이 교수가 될 수 있도록 뒤에서 적극 도왔다. 그럼에도 미연의 남편은 교수가 된 이후, 오히려 미연을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른 걸 보면, 미연의 태도가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라 해도 그것을 핑계로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다.

 

미옥의 남편

청과상을 하는 미옥의 남편은 착한 사람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어려움에 놓인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갈팡질팡하는 미옥을 보살피고, 붙잡아준다. 미옥의 남편은 이혼한 사람이다. 고등학생 아들과 둘이 살고 있는데, 청과상을 하면서 바쁘게 사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미옥은 남편이 이혼하기 전의 아내를 고등학생 아들의 학교 교무실에서 처음 만난다. 엄마의 자격으로 학교에 가지만, 거기에는 이미 아이의 친엄마가 와 있었고, 학교선생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혼은 했지만 아이의 친엄마라는 사실은 엄연한 것이고, 미옥은 자기가 계모라는 사실에 짜증이 난다.

미옥이 세상 물정을 모르며 살아온 천둥벌거숭이임에도 미옥의 남편은 그를 잘 보듬고 달래며 살아간다. 미옥도 이 사내가 착해서 결혼했다고 인정할 정도로, 미옥의 남편은 선량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익은 느낌이 든다. 희숙과 미옥의 남편은 서로 닮아 보인다. 두 사람은 더 없이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도 행복하냐면, 그건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희숙은 자해를 할 정도로 자존감이 없는 사람인데, 미옥의 남편은 내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없다. 즉, '세 자매'의 이야기에서 거의 모든 남성은 타자화 되어 있는 것이다.

 

 

자식을 대하는 태도

세 자매 모두 자식이 있다. 세 자매가 각각 자식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들이 살았던 과거의 시간에서 경험한 감정과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걸 알 수 있다. 자식들이 행동하는 모습은 그대로 엄마인 세 자매의 거울로 비치는 모습처럼 보인다. 세 자매가 자라면서 보여 준 모습과 똑같지 않지만, 세 자매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던 바로 그 '진짜' 모습이 자식을 통해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희숙의 딸 보미

온몸에 문신을 하고, 기괴한 화장을 한 보미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학교는 다니지 않는 걸로 보이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밤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고, 인디 그룹의 가수를 쫓아다니고 있다.

보미의 태도는 매우 불량스럽고 반항적인데, 이런 보미의 태도가 전적으로 보미의 책임일 수 없다는 걸 관객은 쉽게 알아차린다. 보미가 이렇게 엇나간 것은 그가 보고 자란 부모의 모습과 태도에 원인이 있는 것이고, 자식 교육을 올바르게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인물들이 어쩌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게 된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겠다.

보미의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책임감도 없고, 가족을 부양하려는 의지도 없는 양아치로 볼 수 있다. 그가 도박 중독인지, 약물 중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족과 가정을 팽개치고 밖으로 나도는 것은 옳지 않다.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무책임하게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서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의도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

반면 희숙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내와 엄마로서 잘 해 보려는 의지는 있다. 다만 어떻게 해야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는지 자신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이다. 희숙은 자해를 하면서 자유를 느끼는데, 다른 누구에게도 큰 소리를 내 본 적 없고, 싸움은 할 엄두를 내지 못하며, 모든 잘못된 결과는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희숙을 바라보는 보미의 시선은 짜증, 연민, 분노가 복합된 감정이다.

보미는 엄마가 불쌍하면서도, 당당하지 못한 모습이 짜증스럽고, 딸인 자기를 이끌어주어야 할 엄마가 오히려 비굴하고, 자기 눈치를 보는 것에 분노한다. 보미는 불량하길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항의하는 수단으로 불량한 컨셉을 선택한 것이다.

 

미연의 아들과 딸

아직 어린 미연의 아들과 딸은 미연을 닮았다. 아이들은 엄격한 개신교 분위기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는데,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종교로 인해 종교적 제의를 강제당하고, 신앙을 주입당하는 처지여서 매우 안타깝다.

미연은 아들과 딸에게 자기가 믿는 종교적 신앙을 강제하고 주입한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기도를 하지 않는 딸에게 저주하는 말을 내뱉고, 자식들을 매우 엄하게 대한다. 미연의 태도는 그가 어렸을 때 봤던 아버지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관객은 나중에 알게 된다. 미연은 가장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어느새 닮아간다는 점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미연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미연의 태도는 자신을 지켜야 했던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온 것으로 이해한다. 즉,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어린 미연에게 생존 방법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웃고, 춤을 추어야 하는데, 속으로는 미칠 것 같은 분노와 짜증이 올라오고 있어도 겉으로는 웃어야 하는 자아분열적 행동을 어릴 때부터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미연 즉 엄마의 태도를 아들과 딸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미연은 자기 자식들이 자신의 이중적 태도를 눈치 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이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미옥의 고등학생 아들

미옥의 아들은 고등학생이다. 친아들도 아니고, 나이도 겨우 누나나 이모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고등학생이면 다 큰 청년인데, 그런 아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미옥은 엄마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스럽고 어렵다.

다행히 아들은 착하고, 자기 생활을 잘 유지하는 편이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아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있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미옥은 아들에게 말도 건네고, 농담고 하고, 장난도 치지만 아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미옥은 사회에 나와서 세상을 자기 멋대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작가로 이름을 얻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과도 멀어지는데, 그건 대개 눈치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거침 없이 하는 미옥의 태도에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미옥은 솔직하고 거침 없는데, 그것이 장점이면서 한편으로 단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어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럼에도 미옥은 아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자신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그것이 모성인지, 인간에 대한 애정인지, 뒤늦게 철든 가족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옥은 이혼남에 다 큰 아들이 있는 '착한 남자'와 결혼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든다.

고등학생 아들의 시선으로 보면, 도저히 엄마라고 부를 수 없는 여자가 어느 날 집에 들어와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친엄마는 있지만, 다른 곳에서 살며, 연락은 가끔 하지만, 만나는 건 매우 드물고, 자기를 버린 엄마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이 공존하고 있다. 젊은 계모는 철이 들지 않은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데, 그게 꼭 미운 건 아니다. 엄마가 아니라 누나처럼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계기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남동생 진섭

세 자매에게는 남동생 진섭이 있다. 분명 '네 남매'라고 해야 정확한데, 왜 '세 자매'이고, 남동생 진섭은 제외된 걸까. 진섭의 존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세 자매만의 특별한 유대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까.

아버지가 휘두른 폭력의 직접 희생자는 진섭이다. 진섭이 등장하면서 가족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난다. 미연이 기억하는 과거의 충격적인 장면도 이유가 선명하게 밝혀진다. 희숙과 진섭은 친남매였고, 미연과 미옥이 친자매였으며, 이 둘의 관계는 피다른 엄마이자 같은 아버지를 둔 남매라는 사실이다.

희숙과 진섭이 집에 들어온 이후,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날이 많았다. 그것을 보다 못한 미연과 미옥이 맨발로 2km나 떨어진 구멍가게까지 달려가 주인 아주머니와 가게에 있던 아저씨에게 경찰을 불러달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꾸중만 듣고 만다.

진섭은 아버지에게 온몸에 피가 나도록 폭행을 당하는데, 그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진섭을 감싸던 희숙 역시 무차별 폭행에 노출된다. 희숙이 말버릇처럼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서 비롯한 것이고, 동생을 지키지 못한 무력감이 희숙을 자존감 없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진섭은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폐인이 되었고, 마치 짐승처럼 집안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 그런 진섭을 누나들은 늘 걱정하면서도 정작 진섭이 치료를 받거나, 사회로 복귀하도록 능동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그래서 진섭은 누나들을 보고 '씨발년들'이라고 욕한다. 

진섭에게 아버지는 악마다. 개신교 장로라는 탈을 쓰고, 바깥에서는 온갖 점잖은 척을 하지만, 술만 마시면 자기를 잔인하게 폭행했던 이중인격자이자 악마인 것이다. 이제는 나이 들어 진섭을 때리지 못하고, 오히려 진섭이 늙은 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리게 되었지만, 진섭은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부모와의 관계

세 자매의 부모는 뒷 부분에 잠깐 나온다. 아버지 생신을 맞아 세 자매가 모이고, 이들은 떠난지 오랜 고향집을 찾는다. 고향은 거의 변한 것이 없고, 어렸을 때 맨발로 찾아갔던 구멍가게도 그대로 있을 정도다. 고향이 변하지 않은 건, 부모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목회를 하는 개신교 장로다. 생일을 맞은 아버지를 위해 식당을 예약하고, 근사한 생일상을 차리지만, 아들 진섭이 나타나 난장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가라앉았던 갈등이 폭발한다.

세 자매를 대표해 미연이 아버지에게 항의한다. 왜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느냐고. 사과하라고. 미연의 갑작스러운 태도는 맥락이 없어보이는 뜬금없는 상황같지만, '무엇'에 대해서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가족은 모두 알고 있다.

세 자매의 엄마는 수동적이고 피동적 인물이다. 그는 남편의 그늘 아래서 마치 하인처럼, 노예처럼 복종만 하고 살아왔을 것이고, 남편과는 학력, 지식, 경제력 등에서 모두 상당한 열세에 놓인 인물이어서 남편의 권위와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희숙과 진섭이 특히 아버지의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된 것은 미연, 미옥의 친엄마가 자기 자식은 감싸면서도 다른 여자의 자식인 희숙과 진섭은 친자식처럼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자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같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희숙과 진섭의 엄마와 좋지 않은 관계였거나, 희숙과 진섭의 엄마가 불륜 또는 가출로 집을 나갔다면, 화풀이를 자식인 희숙과 진섭에게 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네 남매가 서로를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미연이 아버지에게 사과하라고 한 것은, 그 자신도 폭력 피해자이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심한 폭력 피해자인 언니 희숙의 처지를 대변한 것이다. 정작 희숙은 아버지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다 괜찮다고, 진섭이 망친 잔치 자리를 다시 원래처럼 돌아가자고 애원하는데, 그 모습은 오래 전, 아버지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할 때,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어린 희숙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세 자매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사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알레고리를 드러내고 있다.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던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은 이 작품에서 교회 장로이자 위선자, 폭력배인 아버지다.

이들의 자식인 세 자매와 외아들 진섭은 피가 같은 형제가 아니다. 즉, 영호남으로 갈라진 지역의 민중을 상징한다. 미연과 미옥은 아버지의 친딸(경상도)이고, 희숙과 진섭은 입양한 자식(전라도)이다. 어릴 때부터 희숙과 진섭은 아버지에게 맞으며 자란다. 아마 희숙과 진섭은 친남매일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친딸인 미연과 미옥은 두 사람(희숙과 진섭)이 폭행을 당할 때 집을 뛰쳐나와 동네 가게로 달려가 동네 아저씨에게 경찰에 신고를 해달라고 말하지만, 그 아저씨는 오히려 아이들을 혼내며 아버지가 수갑을 차고 경찰에 끌려가면 전과자가 되고 인생을 망친다고 협박한다. 그러면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라고 말한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에게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이 억울하고 원통한 상황은 시간이 흘러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 생일에 모인 가족은 피해자인 진섭이 아버지에게 오줌을 싸는 사건으로 난장판이 되면서, 수십 년 동안 억울하게 살았던 딸들과 그 딸들의 딸이 아버지(할아버지)에게 '사과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른다.

숱하게 맞으며 살아온 세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응징하지 못한 채 억울함과 분노를 안으로 삼키며 살아온 세 자매와 아들은 마침내 독재자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하지만 아버지는 사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리벽에 머리를 박아 피를 흘리며 자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악착같은 고집을 드러낸다.

독재자의 폭력에 시달리던 민중이 독재시대가 끝나 독재자에게 과거의 폭력에 대해 사과하라고 말할 때, 그 독재자가 자신은 독재를 한 것이 아니며,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때, 피해자인 민중은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놓인다.

따라서, 미연이 아버지에게 '사과하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어리석은, 하지만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이때 '사과하라'는 질문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며, 사과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독재자에 대한 응징의 포고로 들린다.

우리는 독재자의 '사과'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독재자가 저지른 악행을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고, 진섭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에게 오줌을 싸듯, 과거의 독재자에게 몽둥이를 들어 가차없이 내려쳐야 하는 때가 되었다.

 

 

 

반응형

'영화를 보다 > 한국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부자들 : 디 오리지널  (0) 2022.04.10
내 안의 그놈  (0) 2022.03.10
세이빙 미스터 우  (0) 2021.08.17
모가디슈  (0) 2021.08.14
구타유발자들  (0) 2021.08.12
소리도 없이  (0) 2021.05.19
찬실이는 복도 많지  (0) 2021.05.05
낙원의 밤  (0) 2021.04.10
죄 많은 소녀  (0) 2021.03.07
위로공단  (0) 2021.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