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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미국영화

<영화> City Of Joy

by 똥이아빠 2015.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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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City Of Joy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한다. 물론, 이제는 그러한 목적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이나 창작행위들이 훨씬 많지만, 예술의 탄생이 인간의 소망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예술은 인간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떠한 예술이건 그 속에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실제로, 요즘의 예술이란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해체니 어쩌구 하면서 형식과 의미를 파괴하고 독선적인 행보를 하는 것이 유행이긴 하지만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공통선은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아닐까. 어찌보면 진부한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 ‘시티 오브 죠이’ 역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가운데 이런 종류의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몇 편 있었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고 ‘사라피나’가 그렇다. 사회적 관심과 정의의 실천을 그린 영화들이 대개 이런 범주에 든다고 보는데, 코스타 가브라스의 정치적 영화나 올리버 스톤의 사회성 영화들도 인간의 정의와 실천이 주제가 되고 있다. 즉, 인간의 올바른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인 것이다.
 줄거리를 말하는 것은 번거로울듯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역시 ‘제국주의적 시각’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평등과 사랑을 그린다고는 하지만, 작품의 바닥에 깔려있는 감독이나 제작자의 ‘제국주의적 시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만큼 이 영화에는 기분나쁜 그늘이 숨어있는 것이다. ‘맥스’로 대표되는 미국의 이미지는 제3세계인 인도의 땅에서 그 위력을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제국주의의 침략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려고 한 흔적은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겉으로는 틀림없이 패트린 스웨이지가 맡은 ‘맥스’라는 미국인 의사이다. 하지만 그는 주인공일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의 연기력은 매우 평범하고 역할의 비중 또한 그리 무겁지 않았다. 만일 패트릭 스웨이지의 연기력이나 그의 유명세를 생각하고 주인공 역을 맡겼다면 그건 틀림없는 실패이다. 백인 의사역에는 무명의 백인을 아무나 시켜도 되는 그런 역이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인도인 ‘하사리’이다. 시골의 빈민인 하사리 가족이 가뭄으로 빚을 지고 도시로 무작정 상경하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도시빈민이 되어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70년대의 우리 농촌을 보는듯 하다. 인도의 절대빈곤과 무지 속에서 민중들은 비틀리고 왜곡된 삶을 살아간다.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하사리 가족을 궁지에 몰아넣는 사기꾼도 있고 악질 자본가도 있다.
 그러나 ‘기쁨의 도시’라는 이름은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빈민촌의 이름이다. 아이러니컬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에 이런 이름이 붙은 까닭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알게되고 다시한번 인간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기쁨의 도시’를 지배하는 악질 자본가 ‘가탁’을 상대로 벌어지는 빈민들의 권리쟁취과정에서 이 영화는 ‘허구’가 아닌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의 계급사회는 아직도 유효하고 엄격하기로 이름이 나있다. 그만큼 세습적인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현실이 당장에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만큼 쉽지않음은 분명하지만 인도 민중들의 작은 싸움을 통해서 서로 협력하고 공동체로 살아가야하는 당위성과 필요함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극적인 구성에 있어서 하사리와 자본가의 아들인 아쇼카의 개인적 대결로 큰 싸움을 마무리하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극중에 등장하는 나병환자와 빈민들의 협동, 진료소를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고 돕는 빈민촌 사람들의 건강한 삶만으로도 관객은 감동을 한다. 오히려 이방인처럼 끼어든 백인들이 이 영화를 어설프게 만들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하사리가 딸의 결혼지참금을 벌기 위해 온몸을 던져 일을 하는 장면이다. 한 컷, 한 컷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지는 이 하사리의 일하는 모습은 다른 어떤 장면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성실한 자세는 한 인간의 고결한 인격으로 표현된다. 힘에 겨운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리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사리는 말한다. ‘인생이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들까’하고. 그렇다. 못배우고 가난한 민중들은 모두 말한다. ‘인생이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들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몫을 감당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들을 짓밟는 악질 자본가 ‘가탁’과 ‘아쇼카’같은 동족의 거머리들에게 피를 빨리면서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그 인내가 어리석기까지 했지만, 한번 분노하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는 그 엄청난 힘을 민중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사리는 이방인인 백인의 도움도 거절하고 자존심을 지킨다. 물론, 이방인이 모두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에서는 보여주고 있지만 이 땅을 지키는 것은 결국 이 나라의 민중들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누구의 힘에 의지하기 보다는 어려워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하사리의 몸부림은 인도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 영화에서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잘난 사람도 없고 기상천외한 장면도 없다. 정상적인 사람들과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잘난척 하는 것보다 못났어도 함께 어우러져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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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한 소녀가 위독한 상태로 있고 주치의 맥스(Max Lowe 패트릭 스웨이즈 분)가 열심히 심장 맛사지를한다. 그러나 소녀는 숨을 거둔다. 슬픔과 무력감에 맥스는 수술실을 나온다. 하사리(Hasari Pal 옴 푸리 분)는 아내 칼마(Kamla Pal 샤바나 아즈미 분)와 딸(Amrita Pal 에이샤 다커 분), 그리고 두 아들(Shambu Pal 산투 초우두리 분 / Manooj Pal 임란 바드사 칸 분)을 데리고 캘커타에 도착했다. 사기꾼에게 넘어간 일가는 모든 것을 잃고 뒷골목에서 밤을 보낸다. 
같은 시각에 맥스는 실의 속에 캘커타에 도착한다. 이 도시에서 공허한 마음을 매꾸려하고있었다. 그러나 캘커타의 참혹한 현실이 맥스를 비웃듯이 엄습해 왔다. 가족을 위해 몸을 파는 푸미아와의 만남, 그리고 폭력. 맥스는 거리의 대부 아들 아쇼카(Ashoka 아트 말릭 분)에게 매를 맞고 돈을 빼앗긴다. 
다음날 아침, 맥스는 초라한 오두막집에서 눈을 뜬다. 거기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아난드 니가르'(기쁨의 도시)로, 볼란티아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진료소였다. 진료소의 경영자 조안 바실(Joan Bethel 폴린 콜린스 분)은 그에게 일손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자포자기 한 맥스는 이를 거절하고, 전날밤 도와준 하사리에 도움으로 호텔로 돌아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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